회암사는 인도에서 네팔, 티베트,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와 불교를 널리 알린 지공스님이 ‘이곳에 불사를 일으키면 동방에 불교가 크게 일어날 것’이라 부촉하면서 융성하기 시작, 조선조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이르러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천보산 자락에 끝없이 펼쳐진 옛 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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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절터를 가보면 그 규모나 폐사된 상황 등에 따라 여러 가지 마음이 떠오른다. 양주 회암사터는 20여 년 전에 가보고 이번에 다시 가봤다. 빈 절터지만 규모가 굉장하다.
절 초입에 서있는 당간지주와 억겁의 시간이 흐르더라도 거기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 같은 사리탑이 외롭지만 당당히 서 있었다. 한창 번성할 때는 방이 260여 칸이 넘었다고 한다.
아직도 발굴이 진행 중에 있으나, 복원이 이뤄져서 옛날의 활발발했던 가람으로 다시 돌아와 주기를 보광전 터에서 빌었다. 특히 왕들의 연호가 새겨진 봉황무늬 기와파편과 태극문양등 많은 출토 유물들이 이곳이 보통의 사찰과는 다른 곳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인도에서부터 직접, 육로나 해상으로 건너와 불법(佛法)을 전해준 스님들이 있었다.
원나라 법원사에서 입적한 나옹, 무학 두 스님의 스승
지공스님 유골이 고려에 도착하니 왕이 직접 두골을 머리에 이고
궁중으로 모시고…
법을 가르쳐준 성인이 들어오신 곳이라는 이름이 붙은 영광 법성포의 마라난타스님, 어머니 노비구니 스님과 함께 ‘연’이라는 용을 타고 날아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 가야 김수로왕의 왕후인 허왕옥의 오빠인 장유화상, 그리고 고려, 조선의 왕사 국사였던 나옹, 무학 두 스님의 스승이었던 양주 회암사의 지공스님 등이 있었다.
지공스님의 법명은 선현(禪賢)이고, 범어로는 디야나바드라(Dhyanabhadra, 西天薄伽提納尊者)라고 불린다. 마가다국의 왕자였으며 8세에 나란타사에 출가하여 19세에 인도를 시작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에 불법을 전했다.
한창 때 260여 칸의 방에 3000명이 거주하였다고 하니
그 사세 또한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의 티베트를 지나 원나라의 수도인 연경(북경) 법원사에 머물렀으며, 고려 개경과 금강산, 그리고 통도사, 송광사 등 굉장히 넓은 지역에 불법을 전했다. 교통이 좋은 지금도 이렇게 광범위한 지역을 단순히 여행만 하기에도 쉽지 않은 일이다.
문화적 토양이 다른 곳에 불법을 전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3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머물렀지만, 그가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금강산의 법기보살을 친견하고자 고려에 들어왔다고 하며, 금강산에서부터 남쪽 통도사에 이르기 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계율을 설하고 수계를 내렸다고 전해진다.
빈 터 위로 약간만 오르면
지공, 나옹, 무학스님의
사리탑과 영정이 모셔져 있는
회암사가 눈에 들어온다
또 지금의 천보산 밑 옛 절터를 둘러보고는 인도의 나란타사와 비슷하니 이곳에 불사를 일으키면 동방에 불교가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나옹스님에게 부촉한다.
불상이나 탱화를 점안할 때, 반드시 증명법사 세분을 모신다.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대사이다. 회암사에는 이 세분의 승탑이 함께 모셔져 있다. 지공스님은 가섭이후로 부처님 법을 108대로 이어온 스님이다.
나옹과 무학은 스승의 원력을 이어 받아 고려 말과 조선 초에 걸쳐 큰 불사를 이어갔고, 마침내 스승 지공의 원력을 성취하였다. 한창 번성할 때는 승려 3000여명이 거주하였다고 하니 그 사세를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여러 스님들의 기도와 원력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관음전
삼성각 등의 불사가 이뤄져 단청 체험까지 할 수 있는 도량으로 명성을 되찾아간다
우리나라의 사찰 중에서 가장 많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해인사도 500여명을 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회암사가 얼마나 큰 절이었는지 짐작이 된다.
후에 지공화상은 원나라 법원사에서 입적한다. 1370년에 고려에 지공스님의 유골이 도착하니 왕이 직접 지공의 두골을 머리에 이고 궁중으로 모셨다고 한다.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서 길을 떠나라’는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목숨을 걸고 이국땅으로 불법을 전하러 떠나온 수많은 스님들께 머리 숙여 예배를 드린다.
회암사 터 위로 약간만 걸어올라 가면 지공, 나옹, 무학스님의 사리탑과 영정이 모셔져 있는 회암사가 있다. 여러 스님들의 기도와 원력으로 대웅전을 비롯한 관음전, 삼성각 등의 불사가 이뤄졌다.
매년 삼화상 다례재를 올리고 있고, 주지 스님과 사부대중이 힘을 합하여 각종법회, 불교문화대학, 템플스테이 등 활발한 포교활동을 펴오고 있다. 마당 한켠에는 참배객이 언제든지 체험해 볼 수 있는 단청체험장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소나무 향기 짙게 배어있는 황톳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무학대사와 나옹스님의 일화가 떠올랐다.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좀 더 가깝게 지내고 싶었던지, 편안한 자리에서 놀이 삼아 서로를 헐뜯어 보자고 해본 모양이다.
이성계가 먼저, “저의 눈에는 무학대사님이 꼭 돼지로 보입니다”라고 했다. 무학대사는 답을 하기를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입니다. 저는 대왕이 부처님으로 보입니다”라고 답을 해서 농담이 끝나고 말았단다.
무학대사와 더 친하게 지내고 싶은 왕의 마음을 스님이 어찌 모르랴. 하지만 농담 속에서도 ‘지금 여기에 부처가 있다’는 이치를 깨우쳐 주고자 했던 왕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지공 화상의 부도. |
나옹 화상의 부도. |
무학 화상의 부도. |
옛터에서 발굴된 용두. |
회암사는 점차 옛 명성을 찾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