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는 평등이 아니라 차이에 기반을 둔다. 모든 사람은 얼마간 차이 나는 유전부호를 가지고 있으며, 날 때부터 각기 다른 환경의 영향에 노출된다. 그래서 각기 다른 특질을 발달시키게 되며, 그에 따라 생존 가능성에 차이가 난다. 따라서 ‘평등한 창조’란 말은 ‘각기 다르도록 진화했다’는 표현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생물학에 따르면, 사람은 창조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 무언가를 ‘부여’하는 ‘창조주’ 같은 것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맹목적인 진화과정뿐이며, 개인은 어떤 목적도 없는 그 과정에서 탄생한다. ‘창조주에게 부여받았다’는 단순히 ‘태어났다’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물학에 권리 같은 것은 없다. 오로지 기관과 능력과 특질이 존재할 뿐이다. 새가 나는 것은 날 권리가 있어서가 아니라 날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기관과 능력과 특질이 ‘양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중 많은 것이 끊임없이 변이를 겪고 있으며, 세월이 흐르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얼마든지 자연스럽다. 타조는 나는 능력을 잃어버린 새다. 그러므로 ‘양도 불가능한 권리’란 표현은 ‘변이가 일어날 수 있는 특질’이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 <사피엔스>에서
[단숨에 쓰는 나의 한마디]
평소 내 머릿속 한구석에 있던 생각들을 이렇듯 정리해준 글을 보니 무엇보다 저자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러고 보면 ‘내 생각’을 만드는 데 독서만큼 유용한 것은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특히 위의 논리에 근거해 미국 독립선언문을 새롭게 쓴 것을 보면 ‘아, 이렇게 해도 되는구나!’라는 것에 내 생각이 더 넓어지는 것 같다.
다음은 저자가 쓴 독립선언문 앞부분이고 ()는 내가 인터넷에 있는 원본을 채워 넣은 것이다.
“우리는 다음의 진리가 자명하다고 본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르게 진화했으며, 이들은 변이가 가능한 모종의 특질을 지니고 태어났고, 여기에는 생명과 쾌락의 추구가 포함된다.”(“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조물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하였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잘 모르지만 저자의 생각은 대략 이런 것 같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자유, 평등, 행복은 모두 무의미한데, 인간이 인간 사회의 질서를 만들기 위해 상상해서 만들었고, 그것을 ‘상상의 질서’라고 명명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그런 것도 같다. 눈에 보이는 것과 머릿속에서 행해야 하는 것과의 괴리가 왜 있는지 알 것도 같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서술은 비슷한데, 그것이 상상과 추상으로 가면서 판이하게 달라지고, 거기서 분리와 갈등, 비교와 평가는 간섭으로 이어진다는 것 말이다. 오늘은 좀 길어지는 것 같다. 여기까지만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