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1일 (일) (백) 예수 부활 대축일 [요한 20,1-9]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도다.알렐루야
예수 부활 대축일이다. 우리를 위해 오셨고 사셨으며, 수난하시고 돌아가시고 묻히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이다. 모든 믿는 이들과 더불어 기뻐하고 진심으로 축하를 드린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시는 축복이 온 누리에 가득하기를 기도드린다.
우리에게는 공통된 꿈이 있다. 모두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슬픔도 아픔도 없으며, 정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곳에서 언제까지나 영원을 향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그러한 행복 말이다. 하지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살이에서 아무런 우여곡절 없이 지낸다면 결코 사람답게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불가에서 석가모니는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언급하며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했다. 하지만 인생은 고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이다. 그러한 은총의 장(場)을 고해로 느끼는 것이 문제다. 그렇게 느꼈다면 괴로움의 바다를 어떻게 은총의 바다로 느끼며 살아 갈 것인가?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혹은 그가 처해 있는 공동체에 달려 있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참으로 부활하셨다. 그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믿는다면 그 구체적 증거는 무엇인가?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으시고 묻히신 예수님 무덤을 조배하러 갔다. 거기에서 빈 무덤을 보고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하고 전한다. 정황상 매우 긴박한 분위기다.
제자들도 마리아 막달레나 말을 못 믿고 달려와 빈 무덤을 봤다. 하지만 빈 무덤이 곧 예수 부활의 결정적 증거는 못 된다. 빈 무덤을 보고도 그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요한 20,9)는 성경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어떤 것만을 믿으려 들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잘 믿으려 하지 않는 못된 습관을 갖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는데도 그들은 그 말씀을 잊어버리고 믿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모습을 뵙고 함께 생활하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참으로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진정한 일꾼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시면서 참사람이신 예수께서 오늘 부활하셨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에 생로병사를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지만, 사람으로 오셨기에 또한 생로병사에 노출돼 있으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생로병사의 사슬을 끊어버리시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말이다. 다시 살아나셨기에 다른 모든 인간에게도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렇다면 누가 부활할 수 있는가? 정답은 사람이면 누구나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이가 다 부활한다는 말은 아니다. 부활에는 몇 가지 충족해야 할 조건이 있다.
첫째는 우선 죽어야 한다. 죽지 않고 부활을 기다릴 수는 없다. 우리는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서도 부활에 참여할 꿈을 꾼다. 그러나 죽지 않으면 부활은 어림없는 소리다.
문제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이다. 부활을 희망하는 자는 부활하신 분을 믿어야 하고, 또 그분이 걸어가신 길을 그분과 함께 걸어야 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우선 죽으셨기 때문이다. 어떻게 죽으셨기에 부활할 수 있으셨을까? 그것은 평소 그분의 삶이 대답해 준다.
예수께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 내가 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아야 한다"(요한 14,31)고 말씀하셨다. 오시고 사시고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묻히신 분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고, 그분과 함께하는 삶을 산다면 은총에 힘입어 그 분 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진리를 외면한 채, 그리고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에 상심하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요한 20,10).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지난날의 삶도 잊어버린 채 또 다시 평범한 일상생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예수께서 초대하신 부활의 삶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활은 어느 날 우연히 발생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부활하신 몸에서 출발한다. 부활이신 분은 사랑이시고 진리이시고 생명이시다. 주님이신 예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 예수 부활 대축일을 맞아 그분의 부활하심을 깨닫고, 부활하신 분을 몸 입으며, 생활 속에서 진실로 부활을 증언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한다.
"주 참으로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신 대원 신부 ( 평화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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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월) (백)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복음묵상] 마태오 28,8-15
오늘 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고 두 부류의 반응이 나옵니다. 첫째 부류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경비병들과 수석 사제들입니다. 무덤을 찾아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은 그분께 경배하면서 진실한 믿음을 보여 드렸습니다. 그 반면, 경비병들과 수석 사제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걱정과 두려움이 앞섭니다. 또한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도록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일제 말기에 독립투사 두 사람이 일본 헌병을 죽이고 도망쳤습니다. 이 둘은 깊은 산골짜기에 몸을 숨긴 채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살았습니다. 조국의 광복을 맞이했지만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꾼이 산속 깊이 들어갔다가 이 두 사람을 만났습니다. 이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해방 소식을 아직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 나무꾼이 말하였습니다. “저런? 괜한 고생을 하고 계시는군요. 해방이 되어 왜놈들 다 쫓겨났소. 그러니 나와 함께 마을로 내려갑시다.”
나무꾼의 기쁜 소식을 듣고서 한 사람은 그와 함께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나무꾼의 말을 믿지 못한 채 산속에서 계속 숨어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지만, 그것이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의 부활을 믿는 이에게는 기쁨이 되지만, 믿지 않는 이에게는 그러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진정으로 믿습니까? 그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참된 기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까?
4월 2일 (화) (백)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복음묵상] 요한 20,11-18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죽었던 자신의 오빠 라자로를 살리셨던 분이신데도 말입니다. 더구나 마리아 막달레나는 직접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랬던 그녀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언뜻 보기에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렇게 친밀한 사이인데 어떻게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부활은 변화입니다.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는 것처럼 썩어 없어질 육신은 사라지고 새로운 육신으로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애벌레에서 나비로 바뀌었는데, 어떻게 그 나비를 보고서 애벌레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변모하신 예수님을 곧바로 알아보게 됩니다. “마리아야!”라고 부르시는 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알아봅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27)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비록 겉모습은 부활하시어 알아볼 수 없었지만, 평소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실 때 그분의 목소리에 담겨 있던 사랑을 기억하였던 것입니다. 그 사랑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님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있습니까?
4월 3일 (수) (백)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복음묵상] 루카 24,13-35
오늘 복음을 보면, 엠마오로 가던 예수님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까지는 ‘말함, 들음, 머무름’의 세 단계를 거쳤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이 세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첫 번째는 ‘말함’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동행하시자, 비록 그분을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걸음을 잠시 멈추고 자신들의 상황을 먼저 이야기하였습니다(루카 24,17-24 참조). 이처럼 우리도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기도하면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말씀드려야 합니다.
두 번째는 ‘들음’입니다.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성경 전체에 나오는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루카 24,25-27 참조). 우리 또한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는 과정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머무름’입니다. 저녁때가 되어도 더 멀리 가시려는 듯한 예수님께 제자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며 붙듭니다. 제자들의 청을 받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식탁에서 빵을 들어 올려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셨고, 그때서야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루카 24,28-31 참조). ‘말함’과 ‘들음’의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 성찬례의 신비 안에 머무르게 되자, 마침내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면서 그분께 우리의 삶을 말씀드리고,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시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성찬례 안에서 그분께 머무르게 될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4월 4일 (목) (백) 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복음묵상] 루카 24,35-48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을 다시 만나셨습니다. 그때에 하신 인사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직전의 상황을 생각해 본다면, 사실 이 인사는 얼토당토않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나타나시기 직전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자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사랑하셨던 제자들에게 큰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이제 겨우 사나흘이 지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이렇게 인사하신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들을 단죄하지도 않으시고, 그들에게 서운하다는 말씀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배신감에 사로잡혀 복수하지도 않으십니다. 그저 평화를 간직하라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 인사말에는 당신을 배신한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롭지 못한 그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시며 그들을 이미 용서하시고, 오히려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들이 온전히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 대한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에게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일상 안에서 예수님을 모른 체하거나 불편하시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예수님 앞에서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먼저 인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4월 5일 (금) (백)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복음묵상] 요한 21,1-1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고기를 잡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베드로는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벗고 있던 겉옷을 두르고 물속으로 뛰어듭니다. 베드로의 이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과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가 처음 만났을 때입니다(루카 5,1-11 참조). 그때도 오늘 복음의 내용처럼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했으나 한 마리도 낚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하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그대로 따랐더니 과연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심을 느꼈습니다. 그분 앞에서 부족하고 약하기만 한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매력에 이끌리는 마음보다도 죄책감이 더 컸던 베드로였습니다.
오늘 복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때는 첫 만남이었고, 이번에는 마지막 만남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베드로의 반응이 전혀 다릅니다. 그는 오늘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겉옷을 두르고 물속으로 뛰어듭니다. 첫 만남 때의 죄책감보다도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더 간절했습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그분을 뵙고자 하는 마음이 더 절실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도 압니다. 죄인인 자신까지도 예수님께서 받아 주시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보다도 사람들 자체를 보시며 그들과 만나시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4월 6일 (토) (백)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복음묵상] 마르코 16,9-15
예수님께서는 삼 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며 그들을 교육하셨습니다. 특히 당신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되살아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는 표현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옵니다. 늘 가르치셨으나 그들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그래서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무지와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제자들에게 실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다음과 같이 분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어떤 면에서 보면 참으로 무모한 명령입니다. 당신의 부활을 제대로 믿지도 않는데 복음 선포를 하라는 명령은 사실 불가능한 일을 시키시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명령이 결코 무모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사도들 모두가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이러한 면모는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답한 말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부족했던 제자들을 끝까지 신뢰하셨기 때문에 복음 선포의 명령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과연 제자들은 그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였습니다. 이는 비록 믿음이 약한 제자들이라고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들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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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상징 어부의 반지.문장
반지 : 사람 낚는 어부, 베드로 후계자 의미
문장 : 그리스도와 성모.성 요셉 상징 새겨
어부의 반지’와 ‘교황 문장(紋章)’은 교황의 상징이다.
반지는 새 교황 즉위 때마다 새로 만들고 사임 교황의 반지는 망치로 부숴 파기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반지는 바오로 6세(1963~1978)에게 선물로 바쳤던 것을 재활용해, 은에 금도금을 한 것이다.
‘어부의 반지’라는 이름은 예수가 어부였던 베드로(초대 교황)를 제자로 삼을 때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한 말에서 유래했다.
‘교황 문장’에서 방패 중앙의 ‘IHS’와 둥근 불꽃 모양은 교황이 속한 예수회의 상징 문양이고, IHS는 ‘인류의 구세주 예수’(Iesus Hominum Salvator)를 뜻하는 라틴어의 머리글자다. 방패 왼쪽의 별은 성모 마리아, 오른쪽 포도 모양의 ‘나르드 꽃’은 성 요셉을 상징한다.
박 영호 기자 (가톨릭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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