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와 칼빈은 막상막하로 중요한 종교개혁자입니다. 그런데 루터는 칼빈과 조금 다른 율법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율법과 복음을 칼빈에 비해서 더 예리하게 구분하고 율법의 긍정적 용법을 인정하지 않은 경향이 있었습니다. 구분선 아래에서 그러한 루터의 율법 이해를, 문병호 교수님의 설명으로,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도덕률폐기론 계통의 이단들이 칼빈보다는 루터를 덜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데요. 칼빈이 주장하는 율법의 제3 용법과 성화론이 이단들의 오류와 방종을 억제하고 압박하는 것으로 느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율법에 대한 균형 잡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루터의 율법 이해
Lex Semper Accusat(율법은 항상 정죄한다)
루터는 율법의 의를 복음의 의와 철저히 구별한다. 그에 따르면, 율법은 은혜에 대한 약속을 내포하지 않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것을 보여 줌으로써 회개 과정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드러낼 뿐이다.
| The Freedom of a Christien in Luther's Writings, 616, "회개는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믿음, 또는 은혜는 하나님의 약속으로부터 나온다 … 따라서 율법의 위협과 공포에 의해 겸손해지고 자신을 아는 지식에 이른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가운데 위로받고 고양(高揚)된다." |
또한 율법의 의는 선행의 공로에 의지하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주어진 복음의 의("이상한 의〔iustitia aliena]")와는 구별된다(Two Kinds of Righteousness in Luther's Writings, 155, 157.) "가장 유익한 삶의 교리인 하나님의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의의 길에 이르게 할 수 없으며, 그저 방해할 뿐이다."(Heidelberg Disputation in Luther's Writings, 33-34. 참고 Disputation against Scholastic Theology in Luther's Writings, 특히 18-19 (70-89조); Heidelberg Disputation, in Luther's Writings, 특히 30-49 (신학논제 1-28).)
루터는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를 철저히 구별하면서, 죄를 깨달아 그리스도를 찾게 하는 율법의 신학적 용법 (usus theologicus)만이 참되다고 보았다.(Ebeling, "On the Doctrine of the Triplex Usus Legis,“ 71, 78.) 그는 율법이 신자들을 위해 규범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Ebeling, "On the Doctrine of the Triplex Usus Legis," 62-65.) 루터는 갈라디아서 4장 3절을 주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법의 문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형벌의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어 부득불 그것의 가르침을 좇아 선행을 하게 만들고 이러한 곤경을 깨닫게 하여 자유의 영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가게 만들기 때문에, 율법은 후견자이다.” Luther's Works, 56 vols., ed. Jaroslav Pelikan, Helmut Lehmann (St. Louis Concordia/ Philadelphia: Fortress, 1955-1986), 27. 286. 이하 '루터전집으로 표기. |
루터는 갈라디아서 3장 19절 주석에서 그리스도가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라는 사실만을 지적하면서,(『루터전집』27. 271-272,319.) 이 구절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율법보다 더 "가증스럽고 혐오스러우며 참을 수 없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우리가 중보자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함을 받게 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루터전집』, 27, 320.)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 20절을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그러므로 율법이 그 빛 가운데 우리의 양심을 조명하여 우리로 하여금 죄와 죽음과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미워하심과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작용도 할 수가 없다. 따라서 신학에서 율법의 주요한 원리는 사람들을 개선시키지 않고 오히려 더욱 악화시킨다. 율법은 사람들의 죄를 보여 주어 죄를 깨닫게 하고, 이로써 겸손해지고 경각심을 갖게 하며, 망연자실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복된 자녀가 되는 소망을 간구하게 한다." 『루터전집』 27. 327. |
루터도 칼빈과 마찬가지로 율법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며 영적이고 신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루터전집』27. 365 (갈 4:3)). 그러나 루터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율법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고 살아 있는 신앙(fides viva)을 가지고 살게 된다고 믿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에서 율법의 용법을 인정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 (*) 참고. Doumergue, Jean Calvin, 4.195-196; Karl-Heinz zur Miühlen, "Law," in The Oxford Encyclopedia of the Reformation, vol. 2. ed. Hans J. Hillerbrand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6), 405a. 루터는 "fides viva" 라는 개념으로 로마 가톨릭의 성향적인 습성(habitus) 교리를 극복하고자 한다. 참고. B. A. Gerrish, Grace and Reason: A Study in the Theology of Luther (Oxford: Clarendon Press, 1962), 92-99. |
루터는 그리스도의 율법의 중보라는 적극적인 측면은 인정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가 율법의 종속을 파하셨다는 것만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신자들을 위한 율법의 계속적인 용법에 부정적이며, 신자들의 계속적인 회개를 위한 율법의 신학적인 용법의 유효성에 대해서도 엄격히 반대한다. "율법과 그리스도는 상호 배타적이며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는 루터의 신념은 구원에 대한 그의 이해 전반에 깊이 반영되어 있다.(『루터전집』27. 366.)
문병호, 『칼빈신학: 근본 성경교리 해석 』(지평서원), pp.208~210.
첫댓글 이단들은 집중적으로 칼빈만 공격합니다. 율법을 폐기해서 엉터리로 막 살고 교주나 이단 목사의 부도덕을 감추기 위해서는 칼빈의 '율법의 용법'과 성화론이 경찰관처럼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양심을 버려야 산다! 는 식의 이단은 루터를 존중하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합니다. 루터는 훌륭한 종교개혁자이지만 칼빈만큼은 율법에 대한 균형잡히고 종합적인 이해는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이송오 등 킹제임스파가 칼빈만 집중 비난하더군요.
@노베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개혁파 전통은 루터의 율법과 복음에 관한 이분법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율법이 지닌 긍정적인 용도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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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파와 칼뱅주의는 '오직 믿음'에 따른 삶이 어느 정도까지 은혜의 점진적인 결과로 이해될 수 있는지에 관해 의견을 달리했다. 마르틴 루터는 어떤 개인이 은혜와는 별도로 의의 공로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고, 하나님이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로 선언하심으로써 결정적인 성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달리 말해, 루터의 관점에서 의롭다 함을 받은 죄인은 당연히 성화된 것이다. 장 칼뱅은 성화의 이 결정적인 측면에 동의하면서도, 신자들을 그리스도를 닮은 존재로 빚어 가시는 하나님의 점진적인 사역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개혁파 전통은 루터의 율법과 복음에 관한 이분법보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율법이 지닌 긍정적인 용도에 더 큰 비중을 두어 왔다. (루터에게 율법과 복음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분법적 도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율법과 복음은 언제나 상호변증적 긴장관계로 설명되는데,
개혁파 신학에선 이 관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루터의 주장을 설명한다.) 칼뱅은 성도의 견인에는 영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일뿐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능동적으로 섬기며 교제하는 일 역시 포함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러 개혁신학자들이 성화의 각기 다른 측면을 강조해 왔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성경에 성화의 결정적 측면과 점진적 측면 모두 언급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캘리 M. 캐픽 등, 『개혁신학 용어 사전』, p.37.
루터가 조금 더 균형 감각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공재설, 야고보서의 지푸라기 폄하 등도 그러했지요.
칼빈, 율법의 세 번째 기능: 신자들을 가르치며 권고함
12. 신자들에게도 율법이 필요합
율법의 세 번째 기능은 - 이는 율법의 가장 주된 기능이요 또한 율법의 고유한 목적에도 더 가까운 것이다 - 이미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 마음에 거하시고 다스리시는 신자들과 관련된 것이다. ...
13. 율법을 폐지하는 것은 그릇된 처사임
... 율법은 우리에게 완전한 삶을 권고함으로써 평생토록 우리가 열심히 지향하여야 할 목표를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율법은 우리의 의무와도 일관성이 있으며, 또한 유익하기도 한것이다. ...
칼빈, 『기독교강요』, 2.7.12.∼2.7.13.
해당 내용 기강에서 찾아 더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① 초등학문으로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이 있고, ② 인간의 악함과 행동을 억제하는 역할이 있으며, 그에 더해진 ③번째 목적이자 용도는 신자들에게 성화(sanctification)의 길과 방향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루터교(Lutheran) 전통은 율법의 ①•② 용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개혁파(Reformed) 신학자들은 율법의 ③번째 용도에 자리를 제공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성장하는 개념인 성화를 더욱 강조합니다. 이러한 율법의 용도에 대한 이해는 개혁주의의 원조인 칼빈의 주장을 벤치마킹 한 것입니다. 아래 링크에서 칼빈이 말한 율법의 3번째 용도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이전에 올린 초판이 아니라 1559년판 기독교강요).
https://cafe.daum.net/1107/Y4cZ/106
기강 원문이 여기에 있군요. 포스팅 전체를 다시 잘 읽었습니다.
칼빈, 율법의 용도(초판 기독교강요)
① 첫째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그것은 각 사람의 불의를 책망하며 그의 죄를 깨닫게 해준다.
② 둘째
율법은 하나님께서 보복하실 것을 선언하고 범법자들을 위한 형벌을 설정하며 사망과 심판을 선언하기 때문에, 최소한 무엇이 옳으며 바른 것인가에 관한 고려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 어떤 사람들을 형벌의 공포에 의해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③ 셋째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셔서 다스리시는 신자들에게도 그것은 못지않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으며,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인가에 대해 더욱더 엄숙한 경고를 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손가락에 의해 그들 마음에 새겨진 율법을 갖고 있지만(렘 31:33; 히 10:16), 즉 그들은 주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할 만큼 마음이 움직인 자들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율법에 의해 유익을 얻는 것은 율법으로부터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매일 더 철저히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존 칼빈, 양낙흥 옮김, 『기독교 강요(초판)』, pp.56~58.
[율법의 세 번째 용도] (third use of the law):
하나님의 율법은
첫째, 초등학문으로서 죄인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이 있고,
둘째, 인간의 악함과 행동을 억제하는 역할이 있다.
그에 더해진 셋째 목적이자 용도는 신자들에게 성화(sanctification)의 길과 방향을 제공하는 것이다. 루터교(Lutheran) 전통은 율법의 처음 두 용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개혁파(Reformed) 신학자들은 율법의 세 번째 용도에 자리를 제공하며,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을 통해 성장하는 개념인 성화를 더욱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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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그렌츠 등, [신학용어사전], p.47.
네, 다시 읽고 더 숙지합니다.
츠빙글리의 신학 사상: 복음과 율법 (코람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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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가 율법과 복음을 대립시킨 것과는 달리
츠빙글리는 율법을 복음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었다.
https://cafe.daum.net/1107/bzn6/30
좋은 내용입니다. 루터가 이신칭의의 교리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율법이 여전히 신자들을 성화로 이끄는 순기능의 작용이 있음을 간과한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가톨릭에서 선행으로 구원 받는다는 교리 때문에 너무 애를 먹어서 그런가 싶기도 합니다.
루터가 피데스 비바의 개념을 중시했다는 설명이 이채롭고 중요하군요.
공감합니다. 세밀하게 보셔서 저도 더 잘 읽습니다.
@에이프릴 공감합니다^^
다시 읽어 보니 살아 있는 신앙이 피데스 비바네요. 복음이 율법에 우선하지만 율법을 완전히 폐기하면 그것도 이단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교수님이 한국어 원어로 쓰셔서 이해가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