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여섯시 15분 전, 반사적으로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다. 키보드 앞에는 전날 메모 해놓은 열차 번호와 기차시간표가 잔뜩. 우리의 목표는 KTX111과 144. 데스크탑, 노트북, 넷북 모두 전원 ON. 크롬과 익스플로러는 듀얼모니터 각각 화면 하나씩 차지했다. 5시 50분. 언니, 폰은 몇 시야? 5시 51분. 언니가 커피를 내밀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우리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6시를 기다린다. 아직 까만 창밖. 52분, 53분,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미리 쳐 놓는다. 54분, 55분.수강신청 같다. 그러게, 전국민 수강신청. 56분, 57분. 커피 한 모금을 더 마신다. 58분. 고개를 한 번 휘젓고, 목을 돌리며 스트레칭한다. 59분. 마우스 위에 손을 얹고, 빛의 속도로 클릭 시작. 따다다다다닥따다다다닥따다다다닥따다다다닥따다다다닥따다다다다다다닥. 손가락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다시 한 번 따다다다다다닥. 됐다. 접속. 1초도 안 되는 시간, 크롬은 500번 대, 곧바로 클릭한 익스플로러는 1만 번 대, 노트북은 각각 1만 5천 번 대와 3만 번 대를 받았다. 숫자가 줄어든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는 이번에도 데스크탑 크롬에게 사활을 걸었다. 잊지마, 14일 111, 17일 144. 응, 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사뭇 비장하다. 전처럼 서울-부산을 거꾸로 끊을까봐, 다시 한 번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어, 들어왔다. 얼른얼른. 침착하게. 출발14일, 서울역, 도착 부산역, 111, 2명. 자 다시, 출발 17일 부산역, 도착 서울역, 144, 2명, 예약.
“아, 했다.”
그렇게 마지막 귀성열차를 탄다.
우리처럼 딱 붙어 있는 커플도 없을 거다. 사귄지 2년차였을 때였나, 1년 365일 중 단 이틀을 제외한 363일을 붙어 있었다. 늘 나는 언니의 팔에 머리를 대고, 언니의 가슴에 코를 대고, 앞머리로 언니의 코를 간질이며 잠들었다. 퇴근도 거의 무조건 칼퇴, 주말은 어디로든 돌아다니고, 하루에 한 끼는 무조건 같이 먹는다. 서울에서 알게 되었지만 고향이 같은 우리는 기차를 타는 시간에도 꼼짝없이 함께 붙어 있다. 지긋지긋한 KTX, 터널이 많아 귀가 멍멍해지는 KTX, 좁아터진 KTX. 간신히 도착한 부산역에서 아쉬운 인사를 뒤로하며 서로의 집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아마 이번 추석이 마지막. 우리는 이제 부모님이 그나마 가까이에 있는 부산에 살게 될 테니까.
어느 해 추석이었나 설날이었나. 부산역에서 손을 흔들며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그렇게 돌아간 집이 그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여긴 내 집이 아니야, 내 집은 서울에, 언니와 함께하는 그 방, 그 이불 속. 기어코 열은 났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해가 뜨자마자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우리 서면에서 만나자."
"응, 준비해서 나갈게."
한 마디의 망설임도 없이, 원래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익숙한 부산버스를 타고 사랑하는 언니를 보러 나가는 길. 서울에서 그랬던 것처럼 두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고, 때때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손등에 뽀뽀를 한다. 언니와 함께 있으면 모든 공간은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새로우면서도 편안하다.
아버지가 장남이라 1년에 제사만 5번을 지내는 나와 달리 언니는 명절에만 큰집에 가면 된다. 나는 명절때마다 산더미 같은 음식을 만드느라 초죽음이 되곤 했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의 석균아저씨처럼, 우리 아버지는 재래시장을 헤집고 다니며 무조건 좋은 걸로 사댔다. 나는 시장에서는 아버지의 짐꾼으로, 집에서는 엄마와 함께 조리사로, 왕복 6시간의 성묘를 갈때면 차 안의 분위기 메이커로 활약해야했다.
"이제는 집에 들어가서 음식해야해."
"너무 힘들겠다. 무리하지말고 쉬엄쉬엄해."
정류장에서 언니가 날 꼭 안아준다.
"얼른 시집와서 같이 음식하자."
"음식해야하면 시집 안가고 장가 들게."
우스개소리를 끝으로 나는 버스에 몸을 밀어 넣는다. 언니가 창밖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언젠가는 함께 명절을 보낼 날도 있을 거다. 함께 기름 냄새에 범벅이 되어가며 전을 부치고, 생선을 굽고, 국을 끓이고. 찾아오는 가족같은 친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눠먹을 날이 언젠가는 오지 않을까. 그 언젠가를 위해 수요일, 다시 한 번 더 KTX에 몸을 싣는다. 대한민국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왕복 5시간 20분의 마지막 여행이다.
첫댓글 하~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