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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과 재현을 넘어서
― 질 들뢰즈의 {프란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1)를 중심으로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일련의 철학적 개념들을 만들어 내면서 그것을 베이컨의 회화의 특수한 양상들에 연관시킨다.그 과정에서, 들뢰즈는 베이컨의 그림들(그 중에서도 삼면화(triptyque))이 기존의 회화의 역사를 어떻게 극복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내는지를 교향악적으로 때론 대위법적으로 기술한다. 들뢰즈가 만들어내는 개념들은 형상/윤곽/구조, 디아그람, 자유로운 표시들, 고기-되기, 증인, 리듬과 같은 것으로, 이 개념들은 반복적 소악장(ritournelle)처럼 책의 곳곳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곳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스스로 단일한 의미체계 내로 환원되거나 유기화[조직화]되기를 거부한다.
개념들로 놀이를 하듯이, 개념들로 음악을 작곡하듯이, 들뢰즈는 베이컨의 회화들을 이리저리 재구성하면서 어떻게 베이컨이 '구상(figuration)'을 자신의 회화에서 극복하고자했는지 밝혀낸다. 이 글은 그 극복의 과정을 따라가며 조금씩 드러나는 들뢰즈의 현대(modern) 회화에 대한 깊은 사유와 통찰, 예술에 있어서 들뢰즈가 말하는 '감각' 혹은 '형상'의 미학적 의의, 베이컨의 회화적 전략으로서의 '디아그람'을 조명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 형상(Figure)과 감각(sensation)
들뢰즈는 이 책에서 료따르의 {담론, 형상}을 따라서 '구상적인 것(le figuratif)'과 '형상적인 것(le figural)'을 구분하고, 구상적인 것의 특성을 서술적(narratif)이며 삽화적(illustratif)이라고 보고있다. 회화에서 구상이나 재현(repr sentation)이 위험한 것은 외계의 이미지가 그 화면 내의 이미지와 연관되고, 그 때문에 시각(the eye)이 재인(r cognition)의 모델에 종속되면서 감각의 직접성과 강도(intensit )가 상실되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회화는 재현할 모델도 전해주어야 할 스토리도 없으며, 그림 그 자체는 감각, 즉 우연히 마주친 기호이다. 그러므로 회화는 구상적인 것을, 재현적인 것을 피해야 할 것인데, 회화가 구상적인 것을 피하는 것은 두 가지 방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한가지는 추상(abstraction)을 통해 순수한 형태로 나아가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추출(extraction) 혹은 고립(isolation)을 통해 순수하게 형상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다(6쪽). 베이컨의 방법은 두 번째 것으로, 그는 전통적인 회화의 구상적 성격을 탈피하기 위하여 우선 형상을 고립(격리)시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왜냐하면 "격리는 재현과 단절하고 서술을 깨뜨리기 위해, 삽화성을 방해하고 형상을 해방하기 위해 충분치는 않더라도 필요한 가장 단순한 방법"(7쪽)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베이컨이 형상으로의 향하는 길을 세잔은 '감각'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정확하게 D. H. Lawrence가 말한 바, '세잔의 사과', '사과의 사과적 본질'과도 같은 것이다: "감각이란 빛과 색의 자유롭거나 대상을 떠난 유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그것도 재현된 신체가 아니라,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되어진 신체" 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회화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 체험된 신체를 그리는 것(베이컨에게서는 형상을 고립시키는 것)이라고 들뢰즈는 보고있다. 세잔이 감각을 그린다고 말한다면, 베이컨은 사실(fait)을 기록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세잔이 풍경화가·정물화가이고 베이컨은 [이렇게 부를 수 있다면, 머리-고기를 그리는] 초상화가이지만, 그들은 재현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대상으로 환원되는 형태(구상)를 거부하고 감각으로 환원되는 형태(형상)를 찬양한다는 점에서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64쪽 참고). 이야기할 스토리를 우회하거나 번거로움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감각. 이것이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그토록 반복해서 우리를 설득하고 조심스럽게 강조하려고 했던 것이고, 그가 창시하고자했던 '감각의 논리'가 아닐까?
형상은 살로 되어있는 신경 시스템 위에 직접 작용하는 감각에 기인하여 느낄 수 있는 형태이지, 두뇌에 관계하고 두뇌의 중계에 의해 움직이는 뼈에 가까운 추상적 형태와는 분명히 다른 형태이다. 따라서 베이컨은 형상에 관여하는 화가이므로, 그 자신이 {불가능의 예술: David Sylvester와의 대담}에서 말했듯이, 그는 "두뇌적으로는 비관주의자이지만 신경적으로는 낙관주의자", 또 다른 말로, "구상적으로는 비관주의자이지만 형상적으로는 낙관주의자"가 되는 것이다(73, 96-7쪽 참고). 베이컨은 두뇌가 아닌 신경 시스템으로 직접 전달되는 감각을 그리고자 했다.
2. 추상 회화, 추상 표현주의
현대 예술(또는 미술)은 현대 철학과 유사한 문제에 봉착했다. 즉 양자는 재현의 영역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그들의 목표를 '재현의 조건들'로 채택하게 된 것이다. 들뢰즈가 인용하듯이, 이것은 "보이는 것을 그리지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그려라"라는 폴 클레(Paul Klee)의 유명한 구절과 깊은 관련이 있어 보인다: 현대 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형을 발명하거나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포착하는 것(capter des force)인 것과 마찬가지로 회화의 임무도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려는 시도가 된 것이다(88쪽). 이처럼 가시적 형태들 뒤에서 작용하는 비가시적 힘들의 현전(presentation), 다시 말해서 강렬한(intensive) 힘들로부터 '감각의 덩어리(block of sensation)'를 추출하고 감각 내에서 이러한 힘들을 포착할 수 있는 재료(material)를 생산하려는 것이 현대 회화의 목표가 되었다.2)
앞서 보았듯이, 들뢰즈는 현대 회화가 구상의 진부함, 즉 판에 박힌 것들(clich s)을 회피하고 직접적으로 감각을 획득하기를 시도했던 두 가지 일반적인 경로가 있다고 말한다. 그 중에서 추상 미술로 나아갔던 경로에는 두 가지 극단적인 운동이 있다. 한 축으로는,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의 작품과 같은 추상 미술(abstract art)이 있는데, 그것은 비록 고전적인 구상을 거부했지만 감각을 정화하고 탈물질화하며 순수한 광학적(optical) 코드로 환원시키려고 하는 추상적 형태들의 집적을 여전히 유지하였다. 추상 미술은 건축학적(architectonic) 구성의 평면(plane)으로 향했는데, 그 안에서 회화는 일종의 정신적 존재, 즉 느껴지기보다는 우선 사고되었으며, 관람자들에게 일종의 '지적 금욕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다른 한 축으로는, 잭슨 폴록과 같은 추상 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또는 앵포르멜(informel)이 있는데, 그것은 추상적 형태들을 그려냄으로써가 아니라 선과 색의 유동적(fluid)이고 무질서한(chaotic) 텍스쳐 내에서 모든 형태들을 분해함으로써 재현을 넘어서려고 했다. 추상 표현주의는 눈에 대한 종속을 뒤집으며, 더 이상 어떤 것을 윤곽 짓거나 한계 짓지 않고 전 화면 위로 펼쳐진 순수하게 손에 의한[손적인](manual) 선에 의해 힘들을 보여주면서 질료(matter)에 최대한의 확장을 주려고 시도했다.3) 현대 추상 회화는 이처럼 두 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었지만, 들뢰즈가 보기에는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못하다.
화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혼돈(chaos)과 대재난(catasptrophe)을 어떻든 자신의 방식으로 껴안고 거기에서 빠져 나오려고 노력한다. 추상 미술이나 추상 표현주의도 나름대로 그 길을 걷고 있지만, 그것들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너무 멀리 나아갔다. 들뢰즈는 이것을, 구상적인 것에서 나와 혼돈을 너무나 쉽게 뛰어넘어 순수하게 시각적으로 가버렸거나(추상), 혼돈을 화면 전체로 확장시켜서 시각적인 것의 포기와 더불어 전적으로 손적인 것으로 가버렸다고(추상 표현주의) 평가한다. 베이컨은 어떤가? 베이컨은 추상 회화처럼 시각적인 길도 아니고, 액션 페인팅처럼 손적인 길도 아닌 제 3의 길을 따른다.
3. 비의지적인 자유로운 표시들(marques libres) 혹은 디아그람(diagramme)
들뢰즈는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를 마주할 때, 실제로 화가는 순백의 화면 앞에 있지 않다고 한다. 즉, "화가는 자기의 머릿속에, 혹은 자기 주변에, 혹은 화실 안에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가 자기 머릿속이나 자기 주변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소간 잠재적으로(virtuellement), 다소간 현실적으로(actuellement), 그가 자기 작업을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화폭 속에 있다"(125쪽). 따라서 화가는 화면 밖의 대상을 화면 위에 그대로 재생하기 위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이미지, '구상적인 소여들(donn es figuratives)'을 가지고서 그리기 시작한다. 'avant-coup'의 단계에서 주어지는 이러한 구상적인 소여는 이미 거기에 있는 것으로서 하나의 사실이다. 이것은 실제로 세잔이 수많은 습작들을 남기며 극복하고 싶어했던 '판에 박힌 것들'이다. 화가가 이 판에 박힌 것을 아무리 변형시키고 뒤틀며 무너뜨린다고 해도 그것은 소생하듯이 그림 안에 나타난다. D. H. 로렌스는 세잔이 판에 박힌 것과 얼마나 치열하게 투쟁했는지를 말하면서, 위대한 화가들은 진정한 변형, 진정한 웃음을 얻기 위해서는 판에 박힌 것을 학대하고 부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한다(126-8쪽). 어떤 엄격함이 필요하다.
베이컨은 아무리 변형시켜도 진정한 변형을 이룰 수 없는 판에 박힌 것으로부터의 탈출을 위해 우선 들뢰즈가 말하는 '무기력한[비겁한] 포기(l che abandon)'를 감행한다.
아무리 판에 박힌 것을 변형시킨다 하여도 그것은 최소한의 회화적인 변형을 이루지 못한다. 차라리 판에 박힌 것에 완전히 몸을 맡겨 버리고, 그것들을 다 불러들이며, 그것들이 그만한 수효의 회화적 여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쌓고 증폭시키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우선 <의지를 상실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거부(rejet)에 의해서 거기서 빠져 나올 때 화가의 작업이 시작될 수 있다(131쪽).
하지만 화가가 무기력한 포기를 가지고 그리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이 그리는 것이 판에 박힌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려진 이미지 내에서 움트기 시작하는 구상을 파괴하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형상에 어떤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들뢰즈는 그려진 이미지 내부에 '자유로운 표시들'을 아주 빨리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자유로운 표시들은 우연한 것으로서(au hasard) 돌발적인(accidentel) 것이며 전혀 재현적이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화가의 시각적인 이미지를 전혀 표현하지 않으며 오로지 화가의 손에 의한 우연에만 관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가는 이 자유로운 표시들, 또는 손적인 표시들(marques manuelles)을 자신의 시각적 이미지에서 판에 박힌 것과 삽화적인 것, 서술적인 모든 것을 떼어내기 위해, 그리고 그 시각적 이미지로부터 형상(혹은 감각)이 솟아나도록 하기 위해 사용할 것이다(132-3쪽). 화폭 위에 있는 판에 박힌 것에 무기력하게 항복하는 것처럼 속임수를 쓰면서, 우연을 조작하고 돌발적인 흔적들, 손적인 표시들을 만들어 내며 재빨리 판에 박힌 것에서 벗어나는 것, 마침내 회화적인 형상을 구성해 내는 것; 이것이 베이컨이 선택한 회화의 전략이다.
이러한 작업 이후에도 형상은 여전히 구상적이다. 그러나 'avant-coup'에서의 구상적인 것과는 다른 것으로서, 형상의 결과로서, 회화적 행위의 효과로서 화가가 획득한 구상, 즉 되찾은 구상(figuration retrouv e)이다. 시각적 형상들은 '그리는 행위(acte de peindre)'를 통과하면, 즉 'apr s-coup'의 단계에 다다르면, 출발시의 구상과 닮지 않은 재창조된 구상으로 시야에 떠오른다. "그로부터 베이컨의 지속적인 공식이 나온다. 닮도록 하라. 단 우발적이고 닮지 않은 방법을 통해"(137쪽).
따라서 우리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전후하여 전혀 다른 무언가가 발생하며, 아마도 앞서 살펴보았던 판에 박힌 것에 대한 화가들의 다양한 방식의 대응이 이 '그리는 행위'의 차이에서 오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베이컨은 '그리는 행위'가 "우연에 맡긴 표시들을 하기(터치들-선들), 어느 장소나 지역들을 닦고 쓸거나 혹은 헝겊으로 문지르기(얼룩들-색채), 여러 각도에서, 그리고 다양한 속도로 물감을 뿌리기"(139쪽)와 같은 행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규정한다. 화폭 속에 이미 존재하는 구상적 여건들이, 그리는 행위를 통과하여 나온 결과를 베이컨은 '디아그람[돌발 흔적]'4)이라고 부른다.
디아그람은 그러니까 비의미적이고 비재현적인 선들, 지역들, 흔적들 그리고 얼룩들 전체이다. . . 디아그람은 사실 일종의 혼돈이며 대재난이다 그러나 또한 질서 혹은 리듬의 싹이다(140-1쪽).
디아그람을 통해서 회화는 무질서, 혼돈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새로운 질서의 단초를 구성해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디아그람은 사실의 가능성이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며, 회화에서 모든 구상적 여건들이 사라져버려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구상, 형상의 구상은 디아그람으로부터 빠져 나와야 하고, 감각을 명확함과 엄밀함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149쪽). 디아그람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전면적인 디아그람, 카오스나 카타스트로프의 상태에 머무는 경우를 잭슨 폴록의 경우에서 보았다. 고삐 풀린 액션 페인팅은 관람자에게 날것의 감각을 잘 전달해 주기는 하지만, 그 감각은 돌이킬 수 없이 혼란스런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이 경우를 살과 뼈의 관계에 유비시켜 보면, 형상으로서의 살과, 구조 혹은 골격으로서의 뼈의 문제가 된다. 들뢰즈는 이와 같은 살과 뼈의 변증법을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살이 예술에 적합한가 하는 문제는 또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다. 과연 그것은 지각과 정서를 떠받칠 수 있으며, 감각 존재를 구축할 수 있는가? . . . 비록 살이 감각의 발현에 관여할지라도, 살은 감각이 아니다. . . 살을 지탱하게 하는 제2의 요소가 없었더라면, 아마도 그것은 그저 얽힘이나 카오스에 불과할 것이다. . . 두 번째의 요소는 뼈나 뼈대라기 보다는 집이며 골조물이다. . . 감각에다가 제 스스로 자율적인 틀들 안에서 지탱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주는 것들이다.5)
디아그람은 결국 뼈대와 살, 다시 말해 기하학적인 구도와 착색 감각(sensation colorante)의 결합에 의해 이루어진다.6) 세잔이 인상주의를 비난하면서, 혼돈스럽고 일시적인 감각을 단단하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고집스런 기하학을 만들어 내었듯이 말이다. 역으로 보면, 뼈대만으로도 부족하다. 그것은 추상적이고 코드화 되어있어, 감각을 신경 시스템으로 직접 전달하지 못하므로 두뇌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베이컨이 생각하고 행하는 예술도 결코 두뇌와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니다.7) 그는 추상도 번뜩이는 아이디어도 진정한 예술을 구성해 내지 못한다고 본다.
4. '눈과 손'에서 - '눈으로 만지는(haptique/haptische)' 기능으로
들뢰즈는 베이컨이 자신의 회화에서 근본적인 세 요소를 구별하고 있음을 언급한다. 그것은 '형상'(세워진 이미지), '윤곽'(동그라미-트랙, 평행육면체), [물질적인] '구조'(아플라)이다.8) 베이컨은 자신의 회화가 [이집트] 조각에서처럼 "지속성, 본질 혹은 영원성"(161-2쪽)을 획득할 수 있도록 하고 싶어하는데, 그 때 세 가지 요소들은 "골격, 유동적인 받침대, 그리고 받침대를 타고 골격 속을 돌아다니는 형상"(17쪽)이 된다.9) 들뢰즈에 따르면, 이때 베이컨은 저부조(bas-relief)와 같은 유형의 조각, 즉 조각과 회화의 중간적인 어떤 것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162쪽). 말하자면, 회화적 구도가 아니라 저부조적인 이집트적 구도를 따르고자 했다.
리글(A. Riegl)은 이집트의 저부조에서 나타나는, 시선으로 더듬거리고 가까이에서 보여지도록(근접 시각) 만들어진 유형의 비전을, '광학적인 것(l'optique)'과 구별하여 '눈으로 만지는 것(l'haptique)'으로 표현한다. 리글에게 있어서, "저부조는 눈과 손의 가장 엄밀한 결합을 만들어낸다. . . 이 평평한 표면은 눈으로 하여금 촉각처럼 움직이도록 허용해 준다. 더 나아가서 눈에게 촉각적인 혹은 눈으로 만지는 기능을 부여하고 명령한다"(161쪽). 눈으로 만지는 기능은 이집트적인 것으로서 서양 회화사를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겠지만, 들뢰즈는 오히려 그 이집트적 구도를 서양 회화의 출발점으로 간주하면서 베이컨을 이집트인이라고 부른다. 어째서 베이컨이 이집트인인가?
들뢰즈는 기독교주의(christianisme)를 최초의 기준점으로 삼아 서양 회화사를 재구성해낸다. 우선 기독교주의와 더불어 형상은 근본적인 변형을 겪게 되었고(신의 육화 등등), 어떤 본질적인 것으로 되돌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건, 혹은 우발적인 것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 예술에서도 면들의 구분, 원근법의 발명, 빛과 그림자의 활용과 같은 광학적 공간의 정복이 이미 시작되었다(163-4쪽). 이 광학적 공간은 촉각적인 가치들을 시각에 종속시키면서도 촉각적인 것에 의거하기 때문에 단순히 시각적이지만은 않은데, 들뢰즈는 이것을 이집트의 눈으로 만지는 공간을 고대 그리스의 '촉각[지]적-광학적(tactile-optique)' 공간이 대체했다고 본다. "한마디로 눈은 그의 만지는 기능을 포기하고, 광학적으로 되면서 촉각적인 것을 2차적인 힘으로 종속시켰다"(165). 바로 이 '촉각적-광학적' 공간이 '구상'을 발생시킨 것이다.
그러나 '촉각적-광학적' 공간이 발생시킨 유기적인 재현의 균형을 깨뜨리는 시도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순수한 광학적 공간으로 몰입하는 '비잔틴 예술'과, 반대로 광학적 공간에 반란을 일으켜 종속성을 뒤엎어버리는 손적인 공간을 강요하는 '고딕 예술'에 의해서였다.10) 이 두 경향이 서로 대립된다고 해서 공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양자는 모두 "고전적이라고 하는 촉각적-광학적 재현 공간을 해체시키는 것"(168쪽)을 공통의 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들뢰즈는 이 양자 구도를 빛과 색의 이분법으로 설명해 내고 있다: 빛주의(luminisme)와 색채주의(colorisme). 빛주의는 명암의 관계(rapports de valeur)로서, 흑과 백의 대비 위에 근거하여, 어둡거나 밝은 색조, 포화되거나 연한 색조를 정의하며, 색채주의는 색조의 관계(rapports de tonalit )로서, 스펙트럼 위에서 노랑과 파랑 혹은 초록과 빨강의 대비 위에 기초하여, 따뜻함이나 차가움과 같은 이러저러한 순수 색조를 정의한다.
광학적 공간은 밝음과 어둠, 빛과 그림자의 대비에 의해 정의되었다. 하지만 눈으로 만지는 공간은 따뜻함과 차가움의 상대적 대비에 의해, 팽창적이거나 수축적인 운동, 팽창 혹은 상응하는 수축 운동에 의해 정의되었다(170-1쪽).
그러므로, 광학적 공간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은 빛주의를 채택하면서 재현적인 구상으로부터 빠져나가 흑과 백의 순수한 추상적 코드 안으로 도피하게 되고, 색채주의를 채택하는 손적인 공간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은 회화의 유사적 언어로서 추상화를 피하면서도 구상화와 스토리를 동시에 추방함으로써 끝없이 순수 상태의 회화적 <사실>에 접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이란 시각의 만지는 기능을 다시 형성해내는 것이다(171쪽 참고).
들뢰즈가 베이컨을 이집트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베이컨이 반 고흐나 고갱의 이래의 가장 훌륭한 색채주의자로서 눈으로 만지는 공간을 창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으로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구상과 서술을 몰아내기 위해, 베이컨은 촉각적-광학적 세계나 순수 광학적 세계를 벗어나고 횡단한다. 그 작업은 앞서 보았던 디아그람을 통해서 가능하다. 베이컨은 시각에 반대하고 또 어떤 낯선 힘으로서 손적인 힘을 강요하는 구분불가능의 영역을 추구하여 광적인 의지, 우연, 자동 기술로 제시되는 하나의 카타스트로프로 구성해낸다(174쪽 참고). 그러나 고삐풀린 손적인 힘인 디아그람이 광학적 세계를 해체하지만, 동시에 시각적 총체 속으로 다시 던져져야 하고 그 속에다 고유하게 눈으로 만지는 세계를 끌어들이고 눈으로 만지는 기능을 끌어들여야 한다.
5. 나오며
들뢰즈가 베이컨을 높이사고 있는 이유는, 바로 눈으로 만지는 기능을 손적인 격렬함과 비종속으로부터 출발한 <현대적> 눈 속에서 다시 창조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촉각적-광학적 공간과 구상으로부터 출발하지만, 구상적 형태를 혼란시켜며 눈에 종속되지 않는 디아그람의 법칙을 따르고, 광학적 기능과는 구별되어 오로지 자신에게만 속하는 접촉 기능을 자체 내에서 발견해냄으로써 '형상'이라고 하는 전혀 다른 성격의 형태를 결과로서 산출하는 베이컨의 회화 전략은, 진부함과 추상의 늪에 빠진 현대 회화의 운명을 구원해낼 가능성을 충분히 지니고 있어 보인다. 현대의 이집트인인 베이컨은 돌발흔적으로부터 온 눈으로 만지는 기능을 통해 촉각적인 것과 광학적인 것의 이원성을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꿈꾸는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