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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 인간적인 그리움도 한몫을 하지만 영적인 영향력에 대한 마음이 되게 좀 착잡해요. 저는 저를 위해서 정말 오랜 기간 동안 제가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아니면 저를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기도해 주신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큰아버지고 한 분은 엄마이고 한 분은 어머니 제가 이렇게 장모님을 부를 때는 어머니라고 불러요. 왜냐하면 두 분 다 엄마라 불렀더니 헷갈려서 그래서 저희 엄마는 엄마라 부르고 장모님은 제가 어머니로 이렇게 호칭을 합니다.
이제는 큰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엄마도 돌아가시고 이제 어머니만 남았어요. 가장 아쉬운 게 뭐냐 하면 이분들을 못 보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얼마든지 못 볼 수 있잖아요. 헤어져도 못 보고 이 땅을 마감해도 못 볼 수 있잖아요. 가장 아쉬운 것은 저를 위해 끊임없이 믿어주고 기도해 주는 분들이 없다는 것이 되게 좀 속이 상하기도 하고 답답해요.
저희 이렇게 사촌들, 저희 아버지는 삼남매인데 저희는 각자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좀 달라요. 저희 사촌의 큰누나는 저희 아버지를 되게 좋아하시고, 또 저희 큰아버지는 아들이 있는데도 또 저를 좋아하시고 이렇게 사촌들이 모이면 이렇게 맞는 짝이 좀 달라요. 큰아버지는 아들이 동갑인데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를 정말 이쁘게도 여기시고 목회의 길을 간다고 평생 동안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어요.
근데 이 두 분이 사라지고 나니까 가장 마음이 아쉬운 게 기도인 거예요. 이제 나를 위해서 무한정 기도해 줄 분은 이제 어머님밖에 안 남았구나 이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제가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이제 마음을 먹었어요. 내가 두 분의 기도의 분량을 채우자 큰아버지가 안 계시고 또 우리 엄마가 안 계시면 그분들이 기도한 만큼 내가 기도의 시간을 채우자 그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노력은 하고 있지만 생각보다는 잘 되지는 않습니다.
이번 추석 때 저는 늘 양가를 방문하는데 양가를 방문했어요. 예전에 한 번 말씀드렸던 것처럼 마을 어이 좀 산 꼭대기 지점에 어머니의 기도 의자가 있어요. 교회를 가기에는 멀고 하니까 새벽이나 저녁에 곳까지 걸어가셔서 이 교회를 보고 이렇게 기도하시는 거예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지 못하니까 성전을 향해서 이렇게 기도했던 것처럼 다리가 아프고 몸이 아프시니까 교회를 걸어가지 못하죠.
그냥 교회만 이렇게 보고 기도했던 기도에 의자가 있어요. 이제 주인이 없어진 거잖아요. 그러니까 기도의 의자가 점점점 낡아지더라고요. 주변에는 풀이 자욱하게 자라서 많이 묻고 제가 이렇게 풀도 제거해 주고 이렇게 하고 온다고 하다가 깜빡 잊어버리고 그냥 이렇게 떠나왔습니다. 어머니 엄마의 상징이었던 기도의 의자가 낡아지는 것도 속이 상하지만 진짜 속이 상하는 것은 나를 위해 기도해줬던 기도의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것이 되게 좀 속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저를 향해 있었던 그동안의 집안 어른들의 기도의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도록 제가 다 채우지 못하는 저의 기도의 불량을 우리 성도님들이 좀 채워주셔야 됩니다. 저는 앞으로 기도하는 분들에게 조금 잘할 생각이에요. 지금까지는 잘했는지 아닌지 모르지만 앞으로는 좀 확연하게 조금은 잘할 생각이에요. 할 수만 있다면 제가 아부도 좀 하고 그것이 안 되면 협박도 좀 해서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기도의 영향력이 가장 크기 때문인 거예요.
오늘 본문은 요아스 왕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요아스에게는 영적인 스승이 있었어요. 제사장 여호야다라는 스승입니다. 여호야다는 요아스의 고모부예요. 그러니까 고모부이자 제사장인 이 여호야다가 이 요아스를 잘 보필했습니다. 이 여야다가 이제 나이가 돼서 130세에 죽었습니다.
여러분 이 당시에는 제사장들은 왕들에게 묘실에 시체를 묻을 수가 없었어요. 근데 이 여호아다가 얼마나 영적인 영향력이 컸는지 이 여호와 아들을 왕실의 묘소에 이 여호와 아들을 장사했어요. 그만큼 요아스에게는 대개 영적인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요아스의 삶을 통치 기간을 두 곳으로 이렇게 분류를 하면 앞부분은 선한 통치를 하던 시기, 뒷부분은 악한 통치를 하던 시기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정을 펼치던 이 요아스가 갑작스럽게 악한 왕으로 돌변해요. 여러분 사람이 이렇게 돌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순식간에 돌변해버렸어요. 성경은 그 시기를 정확하게 구분해냅니다. 언제 요아스가 선한 왕이었다가 악한 왕으로 돌변했는지, 성경은 요아스가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고 기록했어요. 그러니까 여호야다의 영향력 아래에 있을 때에는 그의 교훈과 훈계를 받을 때에는 이 요아스가 선한 왕이었어요. 근데 요아다가 죽고 나니까 더 이상 이 요아사를 향한 훈의 교훈이 사라진 거예요.
왕이여 이렇게 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 같습니다. 왕이여 이것이 왕이 걸어야 될 길입니다
라고 하는 이 멋진 여호와의 대의 영감이 담긴 이 교훈을 더 이상 요아스가 들을 수 없게 된 거예요. 그때부터 요아스는 돌변해서 악한 왕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 악한 왕이 된 요아스를 신하들이 어떻게 했을까요? 불만인 거죠. 여러분 악정을 펼치면 신하들이 당연히 불만을 갖게 되죠. 불만을 가진 신하들이 요아스를 이제 죽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있고 없고가 이렇게 큰 차이를 만든 거예요. 여호야다가 죽고 죽자마자 악한 왕이 되었고, 악한 왕인 요아스를 친아들은 쿠테타를 일으켜서 죽였어요. 그래서 그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있고 없고가 나라의 운명도 좌우했고, 개인의 운명도 좌우했어요. 왜 그럴까요? 영향력 때문인 거죠. 가장 선한 영향력은 가장 거룩한 영향력은 영적인 영향력이에요. 이 영적인 영향력을 막 대학에 끼치던 이 여호야다가 죽자마자 요아스는 악한 왕으로 그리고 불순종 왕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저는 큰아버지와 저희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그게 마음에 남아 있었어요. 혹 내가 두 분의 기도가 사라지면 나쁜 목사가 되지 않을까 더 이상 나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없게 되면 내 생각과 가치관이 돌변해서 정말 하나님이 쓸 수 없는 인물로 내가 변하는 건 아닐까 이 두려움이 있었어요. 아직까지는 좀 변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막 돌변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아요.
열왕기하 12장 20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열왕기하 12장 20절. 시작.
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 반역하여 칠라로 내려가는 길가에 윌로 궁에서 그를 죽였고,
그러니까 이 요아스가 악한 왕으로 돌변하자 신하들이 쿠테타를 일으켜 그를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꼭 필요한 사람에서 종교개혁을 이끌던 사람에서 악한 사람으로 있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바뀐 거예요. 신하들이 죽여야 하는 왕으로 바뀌었던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으면 신하들이 죽일 생각을 했을까요? 이 모든 이유는 그에게 막대하게 끼쳤던 영적인 영향력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엘리사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었습니다. 스승인 엘리야예요. 열왕기하 2장 12절을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요 내 아버지요. 이스라엘의 병고와 마병이요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 엘리사가 자기 옷을 잡아 둘에 찍고,
엘리사 입장에서는 엘리야 스승인 엘리야가 무이스라엘의 모든 병거와 이스라엘의 모든 마병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거예요. 그가 이스라엘에서 사라진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지키든 막강한 군대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의미였어요. 그러니까 엘리사 입장에서 엘리야가 그런 존재였다는 거예요.
엘리야가 사라지는 것은 곧 이스라엘을 지키는 군대가 없어지는 것과 같았어요. 엘리사는 엘리야를 나라만큼이나 큰 존재로 여겼어요. 왜냐하면 그만큼 그의 영적인 영향력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왕들은 정말 최악이었어요. 백성을 괴롭히는 자, 선지자들을 괴롭히는 자들이었어요. 우상을 섬기고 앞장서고 악을 행하던 사람들이었어요. 그런 나라에서 이 영적 영향을 끼치는 엘리야가 사라지는 것은 곧 이스라엘을 지키는 군대가 사라지는 것과도 같은 거죠.
그래서 내 아버지요.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요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또한 엘리사 입장에서는 엘리야가 아버지와도 같았어요. 그래서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요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없어지는 것은 아버지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와 아버지라고 그가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엘리야의 존재가 그만큼 막강했던 거예요. 엘리사 개인에게서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고,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이스라엘을 지키는 막강한 군대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위치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고와 마병이여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정말 감동적인 것이 있습니다. 요아스가 죽자 요아스가 엘리사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도 동일하게 부르짖어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 이스라엘 병고하여 마봉이는 마이야 하는 이 외침은 엘리사가 엘리야를 향한 외침이었어요.
근데 이제 엘리사가 병에 걸려요. 근데 그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요아스가 이 엘리사가 병에 걸리자 똑같은 외침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병과 마병과 같은 존재를 존경하고 따랐더니 엘리사도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과 같은 존재가 됐던 거예요.
열왕기하 14장 14절입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습니다. 시작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요. 이스라엘의 병과 마병이여. 하매
요아스도 엘리사가 죽을병에 걸리자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요.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엘리사가 죽는 것은 요아스에게 있어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군대와 같은 존재가 사라지는 거예요.
여러분 너무 멋지지 않나요?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병고와 마병 같은 존재로 살았어요. 엘리야는 엘리사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막대한 영적 영향력을 끼치고 살았어요.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엘리사도 이제 이스라엘에게 그런 존재가 됐던 거예요. 그래서 요아스가 동일하게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부르짖던 그 부르짖음을 요아스가 엘리사에게도 하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요 아버지요.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스승인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영적인 아버지로 이스라엘의 군대보다 더 큰 존재로 살았던 것처럼, 제자인 엘리사도 이스라엘의 영적인 아버지로 그리고 이스라엘의 군대보다 더 막강한 존재로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면 어떻게 엘리사의 이 영적인 영향력이, 엘리야의 영적인 영향력이 엘리사에게로 전달이 됐을까요?
열왕기하 2장 9절 하반절에 보면
엘리사가 구하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하기 전에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엘리야에게 말했어요. 그러니까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이 자기에 있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다니면서 존경하게 됐어요. 스승인 엘리야가 소원을 묻자 자기는 최소한 엘리야와 같은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렇지만 더 나은 삶을 원해서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을 저에게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엘리사는 엘리야처럼 이스라엘의 막대한 영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걸 봤기 때문인 거예요.
우리가 부럽고 또 막 갖고 싶어 하는 게 되게 많아요. 만약에 여러분이 저한테 물으면 순위 중에 돈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겠죠. 제가 정말 하나님이 저에게 딱 하나만 구하라고 한다면 저는 동일하게 엘리사처럼 영적인 영향력을 구할 거예요.
말씀을 전했을 때 성도들의 삶이 변화되는 영적인 영향력, 함께 사역을 하면 그곳에 사역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사역을 받는 대상자들이 변화되는 역사들 우리 교회가 구미의 한 중앙의 시청 앞에 있잖아요. 그래서 구미 시내에 구미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는 것 이게 저의 가장 간절한 바램이에요.
아마 엘리사도 그랬던 것 같아요. 엘리야를 보면서 저 막강한 영적인 영향이 나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엘리야럼 왕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영적인 모든 상황을 통치하는 영적인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아마 엘리사가 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것을 구했고 하나님이 그에게 그를 주셨어요. 그래서 자기가 스승을 향해 외쳤던 그 외침처럼 자기가 섬겼던 왕이 자기에 대해서도 그렇게 외쳤던 것입니다.
신약에서 엘리야는 세례 요한으로 비유되고요. 엘리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가 됩니다. 이렇게 보는 것은 그만큼 엘리사의 사역이 탁월했기 때문인 거예요.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엘리아의 영적인 영향력 때문인 거죠. 엘리야의 영적인 영향력이 없었다면 엘리사는 스승보다 더 탁월한 삶을 결코 살 수 없었어요. 엘리야의 영적인 영향력으로 인해서 엘리사가 스승보다 더 나은 탁월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선한 영향력을 갈망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그가 소망하는 영적인 능력을 주셨습니다.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선한 것을 사모하지 않으면 선한 것을 누릴 수가 없어요. 내가 결국 사모하는 것을 내가 누리게 돼요. 내가 소망하는 것을 내가 누리게 된다고요. 엘리사가 선한 영향력을 갈망했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갖게 됐던 거예요.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선한 영향력을 흘러 보내야 하는 공동체입니다.
근데 교회가 선한 것을 갈망하지 않으면 선한 영향력을 가질 수가 없어요. 근데 문제는 지금 이 시대는 선한 것을 갈망하는 시대가 아니에요. 세상 어디에도 선한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찾기가 너무너무 어려워요.
그래서 교회도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도 목회자나 성도들이 선한 것을 갈망하지 않아요. 그래서 교회가 세상을 향한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내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선한 것을 갈망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우리는 선한 영약을 가지게 됐을 것이고, 그것을 세상에 흘려보내며 우리가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가 불의한 방법으로 물질을 갈망하고 교회가 맹목적으로 세상을 갈망하고, 교회가 세상의 권력을 갈망하면 그것들은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선한 영향력은 갖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가 물질을 갈망해요. 물질을 얻었어요. 교회들이 커졌죠. 권력을 갈망했어요. 그래서 권력을 얻었어요. 얼마나 막강한 세력이 됐어요.
그러나 선한 영향력은 잃어버렸어요. 왜냐하면 그것을 갈망하고 소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한 공동체는 선한 것이 그 안에 보여요.
이 사람이 선한 사람인지 선한 영향력의 사람인지를 알려면 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선한 것이 있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어요.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섬기는 목장 교회가 선한 공동체라면 우리 교회 안에 선한 것이 있어야 돼요. 우리의 사역 안에 우리의 교재 안에, 우리의 섬김 안에 선한 것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선한 영향력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 삼서 1장 11절을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요한 삼서 1장 11절입니다. 시작
사랑하는 자요.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베지 못하였느니라.
여러분 왜 교회가 선한 것을 갈망하지 못할까요? 오늘 말씀은 명확하게 말해요. 선한 것을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라는 거예요. 점점 교회 안에 하나님을 만나거나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점점 줄어들어가니까 교회가 선한 것을 갈망하지 않는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그렇게 모시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당연히 선한 거절을 갈망하고 선한 것을 소망하는 게 정상인 거예요.
근데 이 시대에 교회가 선한 거절을 갈망하지 않아요. 왜일까요? 하나님과의 만남이 점점 더 빈도 수가 줄어들고 예수님을 영적으로 영접한 사람들의 수가 점점점 줄어들어서 선한 것을 갈망하지 못하는 거예요. 선한 마음을 주시는 이가 그리스도예요. 그분과 교제가 없이 여러분과 저는 선한 마음을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착한 마음인 사람이 선한 마음을 가질까요? 아니요. 그렇진 않아요. 교회가 선한 공동체가 선한 영향력을 가진 공동체로서 부족함이 있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고,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이 없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을 갈망하지 못하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3장 17절 말씀이 우리가 선한 일을 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 말씀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이 우리를 선한 일을 하게 한다는 거예요.
교회가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말씀으로 점점 멀어지면서부터 선한 일을 하게 하시는 말씀의 메시지를 못 듣고 있는 거죠.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셔서 여러분을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말씀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만 듣고만 가기 위해 이 자리에 앉혀 놓은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선한 일을 결단하고 세상에 가서 선한 일을 하게 하려고 이 자리에 여러분을 앉혀놓은 거예요. 말씀을 잘 들어 귀만 호강하고 돌아가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말씀을 듣고 선한 결단을 하고 세상에서 선한 사람으로 살게 하시려고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서는 선한 역량을 가진 성도도 교회도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선한 삶이 선한 역량을 갖게 하고 또한 기도가 선한 영향력을 갖게 해요.
안동에 가면 석주 이상룡의 생가인 임천각이 있습니다. 이 가문을 웬만해서는 설명하기가 되게 어려워요. 그래서 저도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참을 뒤졌는데 행여나 조금 틀린 부분이 있을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너무너무 방대한 이 가정이라서 막 다 이렇게 알아내고 이렇게 하기가 그 홈페이지에 들어가서도 막 역사를 다 뒤지고 안동기독교 역사를 이렇게 살펴도 제가 다 자세히 알기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행여나 조금 틀리게 말하는 부분이 있어도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석주 이상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습니다. 동생인 이상동은 평양신학교를 나온 장로이고요. 둘째 아들인 이운형은 목사였습니다. 그래서 경북 일대에 많은 교회를 세운 목사였어요. 이 이상용의 가문에서만 무려 11명의 독립 유공자가 나와요.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 11명이 아니라 국가에서 그 업적이 탁월해서 상을 준 사람 유공자가 무려 19명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좀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데 왕산 허위 여기가 기념관이 구미에 있잖아요. 구미 사람이잖아요. 이 사람 집안에 수녀 꼴 되는 사람이 허은이라는 사람인데 이 허은이 이상용의 손주의 며느리예요. 손자 며느리죠. 이 이상용이 어떤 일을 했냐 하면 국가가 이렇게 나라가 어려워지자 재산을 다 팔고 임천각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노비 문서도 다 태워버렸어요. 그냥 노비들에게 자유를 주려고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 그 가정에게 뿌리가 있었기 때문에 노비 문서를 다 태우고 일가 50가구를 50명이 아니라 50가구를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해요.
실제로 안동 독립기념관에 보면 그 역사적인 사실이 기록이 되어 있어요. 온 마을 사람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다 이렇게 서간도로 다 간 거예요. 가서 이 사람들이 처음 한 일이 독립군들의 자치단체가 있는데 가장 첫 번째 경악사라는 자치단체를 만들었고요. 두 번째로는 신흥강습소라는 무장 단체를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육사 같은 거죠.
이게 나중에 보면 신흥무관학교로 이렇게 변해요. 이 신흥무관학교에서 3500명 정도의 독립투사들이 배출이 되었고 우리가 대표적으로 잘 아는 사람이 김좌진 장군입니다.
물론 이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이라는 초대 부통령을 지냈던 형제들과도 대개 밀접한 관계가 있어요. 그래서 이 이상용 씨 가정만으로는 다 설명하면 안 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이 이 가정의 근원에 기독교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10대 명문가에 속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10대 명문가에 속하기도 하고 그 뿌리의 근원에 가면 안동의 복음 하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가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가문을 한번 세워보고 싶지 않으세요? 이 막대한 영적인 영향력을 세상에 끼치는 공동체 이런 교회와 이런 성도들 지금은 이런 가문도 이런 교회도 너무 많이 줄어들었어요.
하나님 우리가 예배만 잘 되길 원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을까요? 하나님 우리가 세상에 하나님의 살아계시다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을 선한 영적인 영향력을 알려줄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이 지금 찾고 계신 겁니다. 우리가 지금 걷거나 달리는 길은 처음에는 존재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누군가 걷다가 보니까 오솔길이 되고 길이 되고 도로가 되어서 지금 여러분과 제가 걷거나 달리고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 앞에 보이는 큰 강도 처음에는 하천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물이 흐르고 흘러서 큰 강이 된 거예요. 교회는 여호야다와 엘리사와 엘리야 같은 선한 영향력을 세상으로 보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자꾸 돌아보게 돼요. 목장교회는 구미 땅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흘려보내는 공동체일까
교회가 선한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 이미 앞에서 짧게 짧게 말씀드렸죠. 먼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고요.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아내의 말씀 안에 있어야 하고요. 세 번째로는 선한 삶을 살아야 하고요. 네 번째로는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됩니다.
그럴 때 이 엘리사와 엘리야는 여러분 한 사람이었어요. 한 사람인데 이스라엘의 군대보다 더 막강한 영적인 영향력을 끼쳤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영향력을 갖게 됐을 때 나 한 사람이 나라보다 큰 인물이 될 수도 있어요. 이게 영향력의 파워인 거예요.
여러분과 제가 이 선한 영역을 위해서 갈망하고 소망하고 삶으로 살아가다 보면 지금 우리가 가진 영향력이 작고 너무 경미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10년 20년 시간이 흘렀을 때 어쩜 우리 중에 나라보다 더 막강한 영적인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배출될 수도 있을 거예요. 목장 교회가 선한 영향력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 목장 교회가 우리나라의 군대보다 더 막강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리사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군대보다 더 강력했어요. 그럼 우리 교회는 엘리사 엘리야 2명이지만 우리는 그래도 한 200명 정도 되잖아요. 그러면 우리나라 군대보다 더 막강한 영적인 영향력을 가진 하나님의 군대가 될 수 있어요. 이 영향력을 지닌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주제의 신문 기사를 봤습니다. 교회는 영향력을 잃고 성경 중심적 목사는 감소 이렇게 신문 기사의 제목이에요. 그러니까 목회자들이 말씀 위에 서 있지 않아서 영적인 영향력이 사라졌다는 거예요. 작아지고 있다는 거죠.
이것을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교회는 영적인 영향력을 읽고 성경 중심의 성도는 감소 우리가 말씀 위에 기도 위에 선한 삶 위에 서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영적인 영향력을 잃어가게 됩니다.
다시 말씀의 영향력이 우리 이 재단 위에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기도의 영향력이 이 재단 위에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시 선한 삶의 영향력이 목장 교회 가운데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시 예배의 영향력이 다시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