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장 : 산상수훈> : with 제임스 보이스 강해
[5:1-12] 팔복
"복이 있다"는 말은 "행복하다"를 의미한다. 이 행복은 상황에 좌우되지 않는 행복으로서 거의 모든 우울한 사건 속에서도 우리의 영혼을 기쁨으로 채워 준다.
A. M. Hunter : "이 여덟 가지 복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 하나님의 자애로운 규범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완전한 행복은 하늘나라에 속해 있지만 그들은 지금 이곳에서도 행복을 누리고 있다."
"복이 있다"(blessed)는 고대 영어의 명사 blod(blood, 피)에 근거한 것으로, 그 당시에는 어던 물건이 피의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따로 바쳐졌을 때, 그것은 복을 받을 것으로 간주했다.
cf. 식전 기도(blessing) :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음식과 우리 자신을 바친다는 의미 내포
또한 blessed는 라틴어 benedicere에 대한 번역어로서 사용되었는데, 이는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에 대해 "좋게 이야기 하다" "칭찬하다"를 의미했다. 그것은 라틴어 성경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기리거나 찬양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하며 그를 기리게 된다.
그뿐 아니라 "축복하다"(bless)와 "복이 있다"(blessed)는 고대 영어 단어 "bliss"(행복, 기쁨)와 철자 및 발음이 유사했다는 사실에서 의미가 유래된다. 행복과 기쁨은 성화, 찬양, 행복을 의미하게 되어, 영적인 기쁨을 의미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러한 정의에 의거할 때, 예수님 자신이 가장 행복(평온, 확신, 만족, 평화, 기쁨, 영혼의 만족)한 분이셨다. 외적인 자극에 상관 없이 삶의 갖가지 상황과 미레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 주는 비결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팔복은 이런 예수님의 초상이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행복을 우리도 누리자. 진정한 행복은 마음의 가난, 온유한 성품, 의를 향한 목마름과 굶주림, 자비로움, 마음의 청결, 화평하게 하려는 욕구에서 발견됨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다.(팔복을 통해 하나씩 살펴보자.)
그렇다면 행복의 비결이 무엇인지 팔복의 내용을 총괄하여 정리해보자.
1) 우리 자신의 힘으로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나님이 모든 영적인 복의 근원이시다.
2)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복이 죄사함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3) 어떤 실제적인 방법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한 삶으로 이끄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 자신이 그 방법을 이용해야 하는지 연구해야 한다.
사랑은 강요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를 사랑하기를 바라시기에, 공허함이나 좌절감과 같은 속성을 통해 우리를 설득하신다. 우리가 이를 받아들이면 풍성한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함으로, 그의 능력이 흘러들어와서 권능을 부여하셔서 우리를 충만케 하시는 것. 그것이 행복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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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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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적인 가난을 인식하는 것이다.(물질적 가난, 허약한 정신(열심이 부족함)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즉 하나님의 의와 거룩을 보기에, 자신의 마음의 부패함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할 자격이 없는 무능력을 인정하는 자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음으로써 의롭게된다는 사실을 강력히 선포하는 말이다. 우리의 어떤 노력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없다.
1) 산상수훈의 가르침은 구약의 율법과 마찬가지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셨다. 이러한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 의를 자랑하기 위해 율법의 높은 표준들을 실천할 수 있는 낮은 수준으로 깎아 내린다.(안식일 규정, 할례 등)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없기에, 우리는 그 가르침을 성취하셨고 자신에게 삶을 드린 자들 안에서 그 가르침을 수행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한 분에게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이사야 11장에 나오듯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거닐기 위해서는 이리에게 새로운 본능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율법이 우리 인간 세게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에게는 새로운 본성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다.
2) 우리의 삶은 충만해지기에 앞서 먼저 비워져야 한다.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세움을 입었도다, 눅2:34) 채워짐이 있기 전에 비움이 있어야 하며, 개종하기 전에 회개함이 있어야 하며, 구원을 받아들이기 전에 무가치함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빈 그릇입니다.'라고 고백하자.
3) 그러나 우리의 본성은 위에서 언급한 가난한 심령에 반한다. 따라서 거룩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직접 대면해 보지 않으면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 봄으로써는 불가능하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라는 고백을 나도 하자.
C.S. 루이스 : "우리의 종교생활이 우리 자신을 선한 사람(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더 나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도록 이끌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악마의 지배를 받아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든지 우리 자신을 매우 하찮고 더러운 존재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묵상 : 칭의 뿐 아니라, 성화도 하나님께서 이루신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다는 모든 일도 내가 잘나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광에 참여케 하신 것이다. 이를 깨달을수록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본성의 악함을 본다. 나도 깨닫고 있는가? 죄에 대해 깊이 자각하며, 존 오웬처럼 이를 이기기 위해 항상 기억하며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바리새인처럼 '난 이만큼이나 괜찮은데'라며 스스로 칭찬한다. 얼마나 가증스러운가. 그러나 한편으로 내 죄가 크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쉽지 않다. 스스로를 죄인 중에서도 괴수(딤전1:15)라 말하기엔 너무도 교만하다. 그러나 그럴때 주님의 은혜로 내가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지 처절히 느끼게 하실 때가 있다. 너무도 감사하다. 이런 나를 더욱 주께서 연단시키시기를 기대하며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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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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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라는 말씀은 부분적으로는 이 세상의 악을 슬퍼하는 것, 사회적 양심을 가리킬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은 기독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기독교인은 사랑과, 죄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으로 사회개혁에 임해야하며 기독교회는 이에 참여해야 한다. 즉, 사회문제에 참여하라는 요청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바르지 못한 사회 문제들을 안고 슬퍼해야만 하며 해결을 위한 구체적 행동을 낳아야만 한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이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개인적인 애통이며, 개인적인 위로로 말씀하셨다. 개인의 영적 상태, 죄에 대한 애통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자를 하나님 자신이 위로해 주시리라는 약속이 성립된다.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된 상태를 아는 것은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첫 번째 산상수훈) 그러므로 그 조항 뒤에 죄에 대한 애통이 뒤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죄악과 죄악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성도 안에 살아 계신다. 우리는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 그와 연합되어있다. 두 번째 복이 주는 약속인 "위로"는 죄를 깨닫고 죄 때문에 슬퍼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위로다. 먼저 죄의 형벌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사실 안에 위로가 있다. 또한 우리와 우리가 하는 일에는 항상 죄의 냄새가 배겨 있으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죄를 제어하여 죽음이라는 오염물이 우리로부터 확산되지 않을 것이라는 위로가 있다. 마지막으로 언젠가 신자들의 죄와 죄의 결과를 영원히 제거하신다는 점에서 위로가 있다. 우리는 완전한 선이 무엇인지 알게될 것이며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될(롬8:21) 것이다.
묵상 : 우리에게 아무런 선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 때 나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한다. 나에게 선한 것이 없음을 깨달을 때에, 내가 죄로 가득한 자임을 고백할 때에 우리는 참된 회개를 한다.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할 때의 회심 뿐 아니라, 더욱 거룩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항상 죄를 고백하며 나 자신의 존재를 깨달아야 한다. 내가 죄로 가득하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것을 통해 내가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너무도 큰 감격이며 은혜다. 나의 죄를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기도하며, 그것을 통해 더욱 큰 감사함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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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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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사람은 거만하거나 건방지거나 완고하거나 도전적인 사람이 아니라 온유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약1:21)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벧전3:15)
"온유함"은 헬라어로 "프라우스"이다.
1) 이 단어는 희랍의 윤리학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단어로서 지나친 분노와 전혀 분노하지 못하는 무능력 사이의 중간 개념으로 규정된다. 이를 두고 바클레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분노해야 할 때 항상 분노하며 분노해서는 안될 때 결단코 분노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떤 모욕이나 모략이 가해질 경우에는 결코 화를 내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가해진 모욕에 대해서는 때때로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기적인 분노는 항상 죄악입니다. 그러나 사심이 없는 분노는 세상의 위대한 도덕적인 힘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2) 이 단어(프라우스)는 집에서 길들인 동물들에 관해서도 사용되었다. 확대해서 행동하는 법을 아는 사람에게도 사용되었으며, 특히 상류 사회에 속한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스럽고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점잖고 균형잡히고 훌륭한 행위 규범을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신사가 되어야만 한다.
3) 또한 이 단어는 종종 성경에서 '하나님 앞에서 복종하면서 신뢰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을 의미한다. 낮아져야 한다. 온유한 자의 삶을 지배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기에, 온유함은 우리를 담대하게 한다. 고난 중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가 회복될 것을 믿으며, 꿋꿋이 인내해 나가는 것이 온유함이다. 시편 37:11에 나타나는 온유한 자는 여호와를 의뢰하며 여호와 안에서 기뻐하며 여호와께 길을 의탁하며 여호와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자들이다. 이와 같은 자들이 행복하며, 땅을 유업으로 받는다.
예)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모세는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사건은 모세가 구스 여인(흑인)과 결혼하는 것에 반대하여 아론과 미리암이 반역을 일으킨 사건이다. 그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벌하여 미리암이 문둥병(하얗게)에 걸리게 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인종적인 편견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나님은 가르쳐 주셨다. 이렇게 비방당한 모세는 그럼에도 미리암을 위해서 기도했고 그 기도 때문에 병이 나았다. 모세는 보복하거나 스스로를 변호하지 않았다. 그는 온유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했고, 하나님께서 변호하셨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반응을 통해서 모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던 것이다.(벧전:22,23)
땅을 기업으로 상속받는다는 약속은 무엇인가?
1) 이 약속은 미래를 위한 약속이지만, 지금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의미도 있다. 온유한 자는 만족한 인간이며 따라서 부족함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의 약속은 미래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이기에 세상을 심판할 것이다.(고전6:2) 현세에는 슬픔과 고난이 있으나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와 함께 통치할 것이다.(딤후2:12)
이러한 온유를 우리의 본성과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다. 예수께서 그 성품을 우리 안에 창조하실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8,29)
묵상 : 나는 온유하지 못하다. 나 자신이 거룩하지 않으면서도 타자에 대해서는 공의를 얘기한다. 온유함은 내가 지니지 못한 본성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한 자를 가르치고 이끄신다. 나도 그 과정 가운데 더욱 온유한 자가 되길 꿈꾼다. 나의 이기를 위한 분노는 억누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의의 분노는 더욱 지니자.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자. 이러한 본성의 변화를 위해 기도하자. 그 과정 중에서 내 노력이 없음을 기억하고 나를 변화시킨 주를 더욱 찬양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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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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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씀은 인간의 영적인 갈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산상수훈의 처음 세절은 모두 인간의 필요를 문제 삼고 있다.(3-5절) 따라서 인간이 영적으로 행복해지기 위해 취해야 할 태도를 보여준다. 이제 네번째 복에서는 하나의 해결책이 제시된다. 인간이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의로 채워주실 것이며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실 것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 "이 복은 논리적으로 앞에서 이야기한 세 가지 복에 뒤따라 옵니다. 이 복은 모든 다른 복을 수렴하는 하나의 초점 역할을 하는 선언입니다. 이복은 또한 다른 복들의 논리적인 결론이며, 이 복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감격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복이 기독교인이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충실하게 감당해 가고 있는가를 평가해 보는 가장 좋은 표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말씀이 당신에게 성경의 모든 말씀 가운데 가장 축복된 말씀으로 느껴진다면 당신은 틀림없는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우리는 1)그의 의를 추구하고(마6:33), 2)완전한 의를 소망해야 하고, 3)깊이있게 의를 추구해야만 한다. 각 내용을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행복은 오직 의를 통해서만 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이시며,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과 다시 교제를 갖고 복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인간을 하나님께로 천거해 주는 의와 거룩을 소유하는 길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실 수 있고, 또 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완전한 의를 갈망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의를 갈망해야 한다. 본문이 지닌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어떤 부분적인 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시도에 만족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인간의 선하심으로 만족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자만이 행복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 의를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의를 깊이있게 갈망해야 한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한다.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음식을 원하듯, 가뭄에 허덕이는 사람이 물을 갈망하듯 의를 원해야만 한다. 며칠 째 물을 마시지 못하여 정신이 없는 상황 속에서 네 시간 거리에 물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거리를 달려나갈 만큼의 갈망이 필요하다. 우리가 의를 그토록 바랄 때 얼마나 풍부한 성령의 열매들이 맺히겠는가!
우리의 의에 대한 욕망이 있을 때 배부름도 있다. 배부름은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시다.
묵상 :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기아에 허덕였다. 그 허덕임 속에서 아버지의 종이라도 하고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 때 아버지는 얼마나 따뜻하게 받아주시며 기뻐하셨는가! 나는 그런 탕자의 갈급함으로 의를 갈망하는가? 나의 행복은 오직 주님께로부터 온다. 우리가 그 의이신 주님께로 나아갈 때, 주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것들을 넘치도록 주셔서 귀한 성령의 열매가 충만히 자라날 것이다. 나를 이끄시고 기르시기 위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나 자신의 삐딱한 본성때문에 거부하지 말아야겠다. 이는 내 평생 추구해야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평생토록 나 자신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더욱 갈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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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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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의 처음 세 가지 복은 죄인으로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가를 보여준다. 네 번째 복은 그와 같은 마음 상태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의 약속을 담고 있다. 다섯 번째부터 나오는 항목들은 그리스도의 영의 감동을 받아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재창조되어 가는 사람의 변화된 성품을 보여준다.
특히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의 성품이 다른 사람과의 관련 속에서 묘사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세가지를 주목할 수 있다. 1)이 세 가지 자질들은 본질적으로 신적인 자질들이다. 2)이 세 가지 자질들이 그리스도께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살펴볼 때만 비로소 그와 같은 자질들을 이해할 수 있다. 3)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같은 자질들을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도 그와 같은 자질들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어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복종할 때만 이와 같은 삶을 살 수 있다.
은총이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베푸는 사랑이다. 긍휼은 무력한 자, 구원을 요청하는 자에게 도움을 베푸는 사랑이다. 은총과 긍휼은 모두 값없이 주어진다. 이러한 긍휼을 정의할 때 항상 십자가를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행동은 완성되었으므로, 오직 십자가에서만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긍휼히 여김을 경험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의무가 있다.
반하우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작에 죽으셨을 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예언의 능력으로부터 벗어나 역사적 사실이 되었습니다. 한님이 이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 기도는 하나님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다시 반복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풀고자 하는 모든 긍휼히 여기심을 이미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완전히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긍휼의 전부입니다. 그 이상의 긍휼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은혜의 자리에서 행동을 보여주실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샘이 터지고 샘에서 물이 풍성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 7절의 말씀을 우리가 긍휼을 보여주어야만 긍휼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았고,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긍휼히 여김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는다면 우리를 구원하신 긍휼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정결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이 어떻게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시51:10)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며 하나님께 순응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점차적으로 정결하게 만드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법적으로 그 일을 하시며, 성령의 부름에 순응할 때 우리의 마음을 실천적으로 정결케 하시고,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모든 악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깨끗하게 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하심 앞에 설 수 있도록 해 주실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평화를 추구할 수 있고, 또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평화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가정에서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 예를들어 부부는 서로 다른 삶을 살다가 만났기에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이를 피하기 위해 날마다 함께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께 은총을 간구해야 한다. 각자가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보고 상대에게 불편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답변해 주면 얼마든지 그와 같은 성가심은 사랑으로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반하우스)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옛 본성이 되살아나 평화를 추구하려는 노력에 이의를 제기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순종해야 한다. 우리의 옛 본성을 십자가에 박도록 요청해야 한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활동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이 일을 할 수 있다.
묵상 :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의 정수가 아닌가 돌아본다. 긍휼히 여김과 청결함, 그리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긍휼히 여긴다는 사실은 내가 예수님을 믿고 얼마나 밑바닥에서 건져졌는지를 경험할 때 아직 건져지지 못한 자들에 대한 긍휼함을 깨달을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하기 위해서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기에 나를 깨끗케 하신 주를 찬양할 수 밖에 없다. 또한 구원받은 자로서 받은 사랑을 전해야 하기에 참된 사랑 가운데 우리는 평화를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불완전하기에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누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온전할 미래를 바라보고, 그 가운데 완전한 안식과 승리를 누릴 나의 모습은 얼마나 기쁘고 아름다운가! 더욱 주께 순종해야겠다. 이 모든 것은 주께서 이루시는 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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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2절)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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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은 기독교인에 대해 묘사한다. 고난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베드로도 이 말씀을 인용하며(벧전3:14;벧전4:14), 바울도 인용한다.(딤후3:12;빌1:29;살전3:3,4)
그런데 박해란 과연 무엇인가? 먼저 이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박해가 아닌 것을 살펴보자.
1) 부당하게 사생활을 침범함으로써 불필요한 반응을 일으킨 것은 박해가 아니다. 조셉 베일리는 『복음의 비행선』이라는 책을 통해 상상의 이야기를 전한다. 어느 상상의 도시에 비행선을 타고 날아다니며 "폭탄"이라 불리는 소책자와 안내 전단들을 뿌렸다. 그러나 아무도 이를 통해 개종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인을 향한 적개심만 증폭되었다. 이것은 박해인가? 그렇지 않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글들을 읽도록 강요하고, 종교적인 논쟁을 하는 가운데 그들을 모욕하고, 상대방의 요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일에 개입해서 간섭한 뒤에 어떤 적대 감정이 나타나면 그것을 박해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박해가 아니다.
2) 성경이 말하는 박해는 광신 때문에 받는 박해도 아니다. 예루살렘의 유대 법정이 예루살렘 시 주변에 있는 알 아크사 사원에 불지르려고 했던 미카엘 로한을 재판한 것은 그를 박해한 것이 아니다.
3) 어떤 대의를 따를 때 찾아오는 박해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의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다는 것인가? 이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같이 되는 것 때문에 박해받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의로움 가운데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악을 드러내셨고, 인간들은 예수께서 악을 드러내신 이유 때문에 예수님을 미워했다. 인간은 자신들의 마음과 본성이 노출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를 노출시킨 그리스도를 죽였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의를 증거함으로써 자신들의 악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낼 때 그것을 몹시 싫어할 것이다.
나의 행위 안에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있는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서는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겪었던 것과 같은 차원의 박해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가 박해 받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대단히 저급한 상태로 전락된 것은 사실이다. 의와 생계 사이에서 우리는 고민할 수 있다. 나는 가정과 연구실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의 원리들을 실천했는가?
이러한 박해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행복의 조건이 되는가?
1) 박해는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있음을 증명한다.
2) 만일 우리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다면 우리는 우리 마음 속에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시며 우리를 우리의 죄로부터 그리고 우리의 죄악된 길로부터 돌이켜서 그리스도의 길로 향하게 하며 마침내는 그리스도의 무죄한 형상으로 형성시켜 간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묵상 : 오늘날 한국 교회는 많은 핍박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핍박인가? 오히려 그것은 박해가 아닌 것의 1)번에 의한 것이며,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에 받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현실을 바라보며 교회가 핍박받고 있다는 사실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박해를 받고 있지 않음에 애통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산상수훈을 묵상하며 느끼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잘못에 대해 "일부"가 그렇다고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처럼 온유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대해 애통해야한다. 그리고 우리는 박해가 아닌 것을 박해라고 하며 세상을 정죄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는 과연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나타내고 있는가? 정말 자신 없다. 내가 과연 그랬는가! 그저 교회 다니고, 술 안마시는 사람으로서만 나타나지는 않았는가? 나는 내 모습이 자신이 없어, 부끄러워 나와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복음을 전하지 못했다. 이런 내가 안타깝다. 그러나 박해가 행복의 조건이 되는 까닭은 내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음을 증명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있음을 믿고 믿음으로 행동해야겠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여 너희를 구원하며 그의 손에서 너희를 건지리니 두려워 말라 (렘4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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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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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를 이기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감정과 이성을 의지할 수 없다. 엘리야가 그랬듯이 고난을 받게 되면 슬픔과 좌절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인간의 마음이 교묘하기에 이성을 사용해서 이를 어기고 벗어나야 하는 이유를 갖가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우리의 본성은 부패했기 때문이다. 다만 박해를 주신 하나님의 목적과 고난을 하나님께서 통제하신다는 지식을 신뢰할 수 있을 따름이다.(즉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 이 지식은 성경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승리는 지성적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박해 가운데서 기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무엇인가?
1) 하나님께서는 박해를 통하여 기독교인이 그리스도 편에 서 있음을 보여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즐거워할 수 있다. 미국의 외교 정책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는 중동 지역에 미국인이 간다면 좋지 못한 시선으로 볼 것이다. 그의 개인의 됨됨이 때문이 아니라 그가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에게 일본인이 그렇듯 말이다. 이와 비슷하게 세상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정책에 대해 반대할 것이며, 예수그리스도께서 파견한 대사들을 미워할 것이다. 따라서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한편에 있다는 증거가 된다.
2) 하나님께서는 종종 신자들을 완전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박해를 사용하신다. 시험을 통해 믿음이 연단된다는 베드로의 가르침(벧전1:6-8)과 이전에는 제멋대로 행하다가 고난을 통과하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다는 다윗의 고백(시119:67), 그리고 고난을 지난 욥의 고백을 살펴보자. 욥은 고난과 커다란 박해를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지식을 통해 승리했다. 가장 혹독한 시련을 그에게 주셨을 때 욥은 그 시련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과 자신을 향한 꺼지지 않는 사랑이 나타나 있다는 지식을 갖게 되었고 기뻐했다. 시련이 계속되자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험하시며 자신의 신앙을 정결하게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으며, 더 많은 계시를 기대하게 되었다.
3) 기독교인이 박해를 통해서 기독교인의 삶의 초자연적인 영광을 보여줄 기회를 얻게 된다. 상황이 부정적일 때도 기뻐할 수 있다면 우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드러날 것이며, 기독교 신앙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날 것이다. 아더 매튜 부부는 중국 내지 선교에 참여했다가 공산당이 집권하기 시작한 무렵에 많은 핍박을 당했다. 동료들을 만날 수도 없었고, 기금도 끊어졌고, 연료를 태우기 위해 동물들의 배설물을 주워 모아야 했다. 그런 고난 속에서 그들의 관점에 변화가 찾아왔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뜻 안에서 기뻐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 또한 자신이 하는 체험이 이와 비교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이 기회가 주님의 뜻에 즐겁게 순종함으로써 영광을 드러내며 자신들의 행위를 통해서 초자연적인 영광스러움을 효과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고, 이후부터 즐거워 찬송까지 부르게 되었다.
4) 하나님께서 보상을 약속하신다. 보상은 대단히 영적인 개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를 나누는 것과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나가는 것이 모두 보상이다. 이와 같은 보상들은 전혀 자기 중심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이는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히11:26, 히12:2)
5) 예수님 자신이 혹독한 박해의 순간에 박해받는 자에게 특별히 가까이 하신다는 지식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풀무불에 던져인 다니엘의 세 친구를 보라.(단3:24,25)
묵상 : 앞서 박해에 대해 살펴봤는데 여기서 다시금 살피는 까닭은 제임스 보이스의 관점은 박해가 없다시피한 당시(80년대) 미국의 상황에 연약해진 미국의 모습때문일 것이며, 나의 경우는 오늘날 많은 한국교회의 교인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강한 용사가 되기 보다는 상처에 연연한 자로서 드러나는 모습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고난에서 나는 과연 이러한 것을 강하게 이겨나갈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과 두려움 때문이다. 많은 것을 제임스 보이스는 얘기하지만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갈 뿐이며 천국에 더욱 큰 상급이 있다는 사실, 내가 그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나의 본성을 깨뜨리기 위한 도구로 쓰신다는 사실이 다가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성경을 아는 지식에서 온다는 사실을 다시금 배운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다. 우리의 개인의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다. 이 계시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계시를 알려하지 않는가! 왜 말씀보다 각자의 내면의 아픔에 더 초점을 맞추는가? 내면의 아픔은 물론 안타까운 것이지만 그것은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도구임을 기억해야한다. 그 때 그 아픔, 고난이 복임을 깨달을 것이다. 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집중하자. 더욱 주의 말씀을 꾸준히 읽으며 그분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Sola Script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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