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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대 교학대학의 입학 학생이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면에서 불가피하다고 보고 장래의 원불교의 교역자 양성 또는 제도 개선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다고 보는가.
원불교 교육의 위기는 원불교의 위기다. 내가 학교에 들어온 1984년에는 지원자 2대1의 경쟁률에 정원이 70명이었다. 호시절은 끝났다. 대종사님의 말씀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형세를 보아 미리 미리 준비하라고 하신 가르침을 실천하지 않은 것이다. 교단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법(dharma, 진리)과 성현의 가르침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숱한 분석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는가. 교육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가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 예를 들어 여성 교역자 결혼 문제만 해도 그렇다. 나도 수위단 총무·법제분과에서 전문위원으로 이 문제를 푸는데 참여했다. 교법대로 원상회복은 했지만, 크게 영향을 준 것은 없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고 있는 지금 전문종교인에 대한 관심은 없다. 대종사님의 가르침대로만 운영되었으면, 교단은 지금의 모습과는 달랐을 것이다. 현재의 교단이 위기에 처한 이유는 딱 하나다.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어떤 불교계 교단도 해내지 못한 사회적 역할을 해내고, 한국의 불교로서 우뚝 서고, 나아가 아시아와 세계에서 불법에 기반한 세계적인 주교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영산선학대학과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의 교역자 양성 기관을 일반인에게 완전 개방하고,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종교적 가치에 기반하여 문명치유, 평화운동, NGO활동, 마음지도자 양성 등 다양한 차원에서 현대문명의 문제를 해결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코스로 전환했으면 한다. 교역자는 원불교대학원대학에 더해 각 대학의 전문대학원을 설립하여 그곳에서 미네르바대학(기본 교육 위에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열린 대학으로 전 세계의 대도시에 기숙사를 두고 있다.)식의 교육은 물론 각 대학원의 특징에 입각한 교역자를 양성했으면 한다. 선원제도도 부활하여 학력에 구애(拘碍) 없이 교역자가 되는 길을 열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학부과정에 현행대로 교역자 지망생이 와도 좋고, 대학원에서 여러 학부 과정을 거친 인재(학부 교육 비용은 사회가 맡게 된다.)를, 선원에서 원불교 전통의 교육 인재 등을 양산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변화무쌍한 사회의 흐름에 대응 가능한 다양한 형태의 인재가 양성될 수 있다.
2. 제생의제이지만 사회에 접목된 내용이 있는가. 제생의세 주체가(출가자 등) 기준을 잡지 못한다. 실지, 당처불공이 (불사)기도에 경도되어 있다. 기도로 내세에 천당 기대감을 유도하는 풍조가 만연하여 기성종교와 다를 바가 없다. 교당 등에서 개교정신 교법의 총론은 말하지 못한다. 대체로 솔성요론 일상수행요법이 장식물이 되어가는 풍조가 있다. 정신개혁을 챙기지 못한다. 시세대중에 영합한다(자녀교육, 부동산 우선, 비인간적 경쟁).
내가 아는 교도님은 은퇴 후에 교당을 다니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많음에도 이제 발을 끊었다. 교당 교도회장, 지역 명문의 교장선생님을 역임했다. 법호 수여식 때, 내가 축하 설교를 해드렸다. 나 또한 그 분의 은혜를 입었다. 예전에 그 분은 나에게, 원불교가 옛날의 불교로 돌아가 버렸다고 비판했다. 천일 만일 기도, 천도재, 교역자의 돈에 대한 집착 등을 말했다. 나는 등골이 서늘했다. 가슴이 아팠다. 밖에서도 예전의 학생회원, 청년회원들의 이야기도 대동소이했다. 그 교도님은 평교사 시절부터 도의 장학관을 거쳐 교장선생님을 할 때도 일원상 뱃지를 양복 깃에 달고 다닐 정도로 원불교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제 교법은 가슴에 간직하고 있되 교당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린 것이다. 나를 포함한 출가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을 한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불교를 개혁한 것은 고단한 현실 속에서 행복과 기쁨을 찾기 위해서였다. 불성의 공적영지의 능력을 회복하여 불법을 굴리고, 평화와 자유를 뜻하는 열반과 해탈을 얻어 모두 함께 이 세상을 부처와 부처가 함께 사는 불국낙원으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개혁성은 사라지고, 이제 하나의 생물학적 사회조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개교의 동기에 조직을 우선하라는 말이 어디 있는가. 교단이라는 제도나 물질이라는 외형은 다 방편에 불과하다. 도심이 곧 교단이다. 불법을 실현하자면 저축조합→불법연구회 기성조합→불법연구회→원불교로 변화된 것처럼 이름마저 바꿀 수 있다. 『정전』 어디에 돈이 있어야 교당이 운영되고, 천일 만일 기도를 해야 교법이 실현된다는 조항이 있는가. 부처님, 예수님, 대종사님께서는 깨달음으로 이웃을 제도함으로써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쁨에 겨워 재물을 바치고, 땅을 바치고, 건물을 바친 것이다. 도로써 돈을 버는 것이다. 돈이 있어야 교화가 된다는 것은 완전히 전도된 것이다. 그러니 교법을 우리가 등한시 하고, 우리가 교법을 그렇게 대하는데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 교법을 존중하겠는가. 그 교도님은 교단의 이러한 현실을 알게 되었고, 지금의 원불교는 방향을 잃었다고 본 것이다. 그 참신함, 세상을 변화시켜 모두를 불은(佛恩)에 목욕시키겠다는 종교적 야생성 회복과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강조하신, 진리와 성현의 가르침을 주와 본으로 삼는 주종본말의 원칙을 재정립해야 한다.
3. 현 교단은 사업위주로 운영하면서 수많은 관리상 문제로 사고가 점철되어 왔다. 이의 근본 원인은 전문성이 결여된 인재(人災)로 보는 견해가 있다. 대책은 무엇인가.
교단도 대종사님의 유훈에 의해 교화·교육·자선을 병행하게 됨에 따라 자연히 전문적인 실력을 갖출 필요가 생겼다. 실재로 여러 분야에서 전문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자신의 일터를 성장시켜 온 것도 사실이다. 또한 사회 여러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재가교도들도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관에서 일하는 것은 당연하다.
교단 교육은 교화자를 전문으로 키워왔다. 여러 기관이 늘면서 교화자들이 그 기관으로 가게 되어 그 분야에 대한 공부를 통해 능력을 길러왔다. 이제는 예비교역자 숫자도 줄어들다 보니 기관으로 가는 것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도 앞서서 예측하고 준비했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또한 애초에 교화자로 서원한 대다수의 교무들이 기관으로 가는 것은 나름대로 같은 교단의 일터에서 사명감으로 가는 것이지만, 사회와 경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특히 경제 분야나 경영의 측면은 재가교도들이 주축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교단 여러 분야의 전문가는 자신의 종교적 열정이 살아 있는 전문가라야 한다. 부처님이나 예수님, 소태산 대종사님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신앙과 수행의 정열이 살아 있어야 한다. 나는 인생의 정신적 고문(顧問)으로 한 분을 두고 있다. 대학 구내에서 구두수선을 하고 계시는 원무님이다. 특별히 그 분에게 무엇에 대해 자문을 구하지는 않는다. 그 분의 삶 그 자체가 고문으로서 충분히 자문을 해주고 계신다. 문자 그대로 영육쌍전 이사병행 하면서도 법(dharma)이 중심이 된 삶을 산다. 그분의 삶이 바로 무시선의 모습이다. 출가와 재가는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연기(緣起)의 관계다. 교화의 주역은 출가만이 아니다. 오히려 재가야말로 교화의 주역이다. 오직 진리와 법을 향한 종교적 정열 위에 쌓인 전문적 실력, 그리고 자신의 분야에서 존경받는 경륜을 가진 분이라면 교단 어떤 분야를 맡겨도 좋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4. 지도체제 중 종법사 피선거권확대에(원정사에서 정사로)대하여 오히려 교무 집단 또는 현 지도체제 내에서 거부가 심하다고 들린다. 이에 대한 평가와 지도체제 제도개선 면에서 평가를 부탁한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것은 법위가 정치화된 결과다. 법위의 인플레이션이 심각하다. 이렇게 가다가는 교단은 이름뿐인 법강항마위 교단이 될 가능성이 높다. 성현들이 가득한 교단이야말로 대종사님이나 역대 선진님들이 원하는 바다. 그렇다면 과연 법위에 합당한 사회적 실천은 그만큼 해왔는가. 오히려 법위 양산만을 하다가 이러한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해당 법위에 대한 철저한 검증이 없었다. 가톨릭의 성위만도 백 수십 가지의 검증이 필요하다.
종법사 또한 교단과 사회가 인증한 지도자여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법을 사전(私傳)이나 단전(單傳)이 아닌 공전(公傳)하신 이유는 법에 대한 실력을 자타(교단과 사회)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나는 종법사 위는 진정한 특신급이면 충분하다고 본다. 경전에서 설하듯 특신에서 어떻게 여래로 즉입(卽入)할 수 있는가. 바로 자신이 여래임을 믿음을 통해 확인하고, 그 믿음의 힘으로 법신의 진리를 증득했기 때문이다. 원정사라면 보살의 위인데 적어도 죽음을 무릅쓰고 남북한 평화와 통일을 위해 모든 것을 던져 해결한 정도의 실적이 나와야 한다. 그러니 현행의 어떤 법위 수준에서 종법사를 선출한다고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혹자는 교단이라는 조직, 대표성을 가진 분들이 결정한 것은 따라야 한다고 한다. 일리는 있지만,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법(dharma)에 있어서만은 그럴 수 없다. 내 모든 삶의 보루, 죽어서도 찾아가야 할 길이 불법이자 교법인데 그러한 속임수에는 굴복할 수 없다. 참된 특신급이라면 교단의 어떤 직을 맡겨도 된다. 그런데 과연 그런 특신급이 있는가. 나는 이생의 최고 목표가 특신급이다.
5. 제6차 교헌개정특위에서도 무소불위의 종법사 권한을 줄이고 종통의 정통성 유지가 될 수 있도록 종법사가 보호될 수 있도록 성안 되었는데 실패했다. 6차 교헌개헌 내용이 4대의 (종법사 등)제도에 적용될 수 있도록 교헌 개정을 할 수 있다고 보는 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시 총강분과위원으로 참여했던 나 또한 큰 아쉬움을 느낀다. 그때 나는 “연원불” 조항으로 김종대 부위원장과도 논쟁을 벌였다. 헌법재판관을 할 정도의 권위를 가진 그 분의 법(law) 지식에 대해서는 존경의 마음을 갖는다. 또한 교법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도 나보다 더욱 훌륭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불법에 대해서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연원불 조항을 하위법으로 해도 좋다고 한 것은 법의 체계 측면에서는 맞을지 몰라도 종교적 측면에서는 그것과는 관계가 없다. 교법의 종교적 특성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조항을 일부러 선진들께서 넣은 것은 교조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점에서 실망을 느꼈다.
종법사는 한 마디로 교단의 대표자다. 그러나 회사나 국가처럼 단순한 대표가 아니다. 출가와 재가의 모든 정신을 지도하는 구루(Guru, 스승)로서의 지도자다. 그러니 종통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리고 교법에 있어 현대적인 해석을 통해 대중들에게 끊임없이 교도들이 직면한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따른다. 그러므로 조직의 다른 권한은 내려놓아도 된다. 수위단의 수장으로서 교법을 지키고, 교단의 방향을 설정하며, 새로운 교법을 끊임없이 창안해서 내놓아야 한다. 그러니 어떤 권력보다도 우위에 있는 것이다. 현행의 종법사는 거의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지지 않는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권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수위단과 종법사는 교법에 있어 최고의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교단이 산다. 다른 모든 권한은 다 내려놓아야 한다. 교법을 잘 수호하면 나머지는 대중들이 집단 지성을 발휘하여 운영해 갈 것이다. 6차 개정이든 7차 개정이든 이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6. 혁신특위의 지도체제 개선안 중에 수위단 구성을 재가·출가 1:2로 추진하고 있다. 재가에서는 1:1 정수위단 18명을 제안한 바 있는데 이에 대한 평가를 부탁한다.
문제는 수위단 구성에 있지 않다고 본다. 물론 현재의 핵심 개혁과제 중의 하나는 수위단 구성원의 비율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나는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고 본다. 수위단원을 출가자 위주로 다 채우든 재가자 위주로 다 채우든 실력이 없으면 무의미하다. 생각해보라. 부처님이, 예수님이, 소태산 대종사님이, 그리고 수많은 불보살과 조사들의 교단에서 그 분들이 단명을 하든 장수를 하든 독재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정치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배분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세속의 국회와 같은 운영방식을 놓고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원불교도 정치화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종교로서는 끝난 것이다. 이렇게까지 오게 만든 기존의 지도자들에게 책임이 있다. 우리 구성원들 또한 이러한 문제를 강하게 비판하지 못한 것에도 책임이 있다.
눈 밝은 지도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 교단은 밝은 미래가 있다. 나는 출가 재가가 어떻게 구성되든 교법에 대한 믿음과 수행의 실력을 쌓은 분들이 교단을 이끈다면 교단은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본다. 결코 질문이 던지는 숫자의 문제를 외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정산종사님께서 제시하신 공화제를 운영한다는 의미에서는 출가와 재가가 합심 협력하는 수위단을 구성하는 것은 가르침을 올곧게 받드는 것이다. 그러나 도(道)의 실력이 없이는 지금 어떻게 구성되든 세월이 흐르면 또 새로운 비율을 들고 나올 것이다. 조계종에서 왜 예전에 최고의 권력이 종정과 총무원장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문제를 일으켰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숫자에 관계없이 출가자나 재가자나 대중들로부터 공인된 실력자들이 지도자들이 되어 교단을 이끈다면 종신직이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바꿔서 생각해보라. 재가자가 18명, 출가자가 9명이라면 교단을 세계적인 종교의 반석에 올려놓을 자신이 있는가. 출가자들이 실패한 것을 극복할 자신이 있는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수위단의 핵심 역할은 교법의 해석이다. 지금까지 수위단이 이를 제대로 실행했다고 볼 수 있는가.) 결국은 출가자든 재가자든 교단 구성원과 사회 대중들로부터 인증 받은 실력 있는 분들이 교단의 지도자 그룹을 이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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