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야기 중독자의 이야기 ;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드라마를,
최근에는 강연회로 사부님을 알게 해 준 전임 청년부 담당 목사님께 감사한 마음이 든다. 감히 이런 생각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부님이 평신도에 다른 성이었다면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고 감히 상상해 봤다. 하하!! 실제로는 많은 부분이 다르겠지만 사부님이 지나온 발걸음이, 그 자취의 큰 흐름이 흡사 내 발걸음을 보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는 자꾸 사부님이 쓰신 글을 읽을 때 마다 할 말이 많아진다. 들어줄 이가 있으니 더 그런 것 같다.
기왕지사, 듣는 사람이 있을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평소에 나는 들어주는 쪽이니 이런 기회가 흔치 않다. 기회의 여신은 앞머리만 있다고 하니까!
나는 어릴 때부터 조용한 아이였다고 한다. 손녀가 싫다는 표현 없이 밥 먹는 모습이 예뻐, 할머니가 주시는 밥을 계속 주는대로 다 받아먹고 몇 번이나 배탈이 났었다는 어머니의 증언이다. 자기표현이 드문데다 둔하고 수동적인 나의 성향은 초,중,고,대학교까지 이어져 지금 말로 치자면 그 시기 나는 거의 인상에 남지 않는 '아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뭐하나 특출한 것도, 유별난 것도 없는, 거기다 말 수도 별로 없는 그런 친구.
그런데 이런 내가 어렸을 때부터 유별나게 좋아한 것이 있다. 그것은 이야기다. 처음 생긴 만화책방에서 유리가면을 보기 시작하면서 만화책에 맛을 들이고, 토요명화가 하는 날이면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영화를 끝까지 보던 아이. 판관 포청천에 꽂혀서 중국드라마를 주구장창 보던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어 쉬는 날이면 한국, 중국, 일본 드라마를 넘나드는 내 모습을 보고 태교를 잘못하셨다며, 그때 무협 드라마를 보는 게 아니었다고 어머니가 혀를 끌끌 차시곤 하는, 그런 중증 이야기 중독자가 바로 나다.
추리소설, 로맨스소설, 판타지 소설 가릴 것 없이 시험기간에도 달려가서 책을 빌리고, 듣기 싫은 수업 시간에는 교과서 뒤에 소설책을 숨겨 놓고 몰래몰래 봤던 나의 꿈은 만화가였다. 지금은 만화가가 되지 못한 아쉬움은 없지만 그림 그리는 것은 여전히 좋아한다. 생각해보니 대학교 진학 전에 만화가, 글 쓰는 작가, 교사를 두고 고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째 보면 꿈을 다 이루었다. 지금 글을 쓰고 있고, 교사로도 일했고, 만화가는 아니지만 원하면 언제든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신기한 사람인생.
여튼 나는 때로 이야기의 여운이 일상생활에도 영향을 끼치기도 할 정도로 지독한 몽상가적인 기질이 있다. 게다가 봤던 이야기를 재탕하기도 좋아한다. 어머니는 이런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하시지만 나는 이야기를 듣고, 보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이런 기질은 성경을 볼 때도 어김없다. 드라마 보듯이 성경을 보다 보면 놀랄만한 장면이 너무 많다. 드라마 같아서. 드라마를 볼 때도 놀란다. 성경과 별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그리고 나서 또 놀란다. 내 인생이, 사람들 사는 인생이 드라마 같고, 성경이야기 같아서.
나는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아한다. 그들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다가올 때도 있고, 보통은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그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출근길 버스 안에서, 길을 걷다 횡단보도에서, 지하철에 앉아 각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와 그들의 이야기가 스쳐 지나가고 나는 찰나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 슬며시 웃기도 하고, 불쾌한 기분도 들었다가, 때로는 다가가 나도 모르게 말을 걸기도 한다. 이런 나의 습관은 성경을 볼 때 도움이 된다.
가만히 성경을 응시하고 이야기가 시작된 곳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성경의 이야기는 동양에서 시작되었다. 기독교가 서양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만 성경 이야기의 뿌리는 동양이다. 그래서 동양인인 우리나라 사람이 성서를 읽을 때 서양사람보다 유리한 면이 훨씬 많다. 그래서 나는 성경을 읽다 분위기나 장면이 생각나지 않을 때는 지금의 인도나 중동을 떠올려 보곤 한다. 놀랍게도 그 쪽은 아직까지 몇 천년 전의 관습들이 남아 있어 성경 읽기의 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주님이 왔다 가신지가 언젠데 아직도 관습안에 있는 그들을 보노라면 신기한 마음도 들고 기분이 미묘하지만 그렇기에 내가 성서를 보는 것에 그들도 모르게 기여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친하게 지내는 모교회 언니와 대화하던 중 성경을 잘 보려면 드라마와 소설 보는 걸 좋아하면 된다고 했더니 의아해 했더랬다. tv보는 것과 드라마 같은 것들은 신앙에 방해가 되기에 부정적으로 대하는게 일반적인데 이게 웬 뚱딴지냐고 생각했을 법 하다. 그렇지만 사실이다. 드라마를 보면 여러 사람의 감정과 인생, 다양한 문화속의 인간군상을 간접적으로 경험 하고 상상해 볼 수 있다. 마치 독서처럼. 단지, 독서와 다른 것이 있다면 눈으로 보는 이야기라서 사고하지 않고 생각 없이 보게 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또 장르별 문학작품을 잘 보는 눈만 있어도 성경을 잘 읽을 수 있다. 독서와 친숙한 사람들, 드라마나 소설작가들, 시인들, 수필가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과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국어수업을 들었던 사람들은 성경을 잘 읽을 수 있다. 국어 수업시간에 누구나 기본적으로 익혔던 저술 연대나 저자와 시대 배경, 장르의 특성들을 살피는 것과 같은 글에 대한 배경과 맥락을 살피는 일련의 일들이 성경을 볼 때 역시 단연코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이런 성경 읽기에도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내가 습득한 것이 아닌, 들었던 것들에 의존하는 성경읽기가 바로 그것이다.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도 스포일러에 의지해서 보면 제대로 작품을 충분히 감상하며 볼 수 없듯이 성경도 마찬가지. 미리 들은 스포에 의지하지 않고 성경을 볼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이 생기는지 살피고 장면을 상상하고 행간을 살피며 읽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성경 읽기를 할 때 영어성경이나 국어사전에 도움을 받을 지언정 이미 나와 있는 Q.T 해설이나 성경 주석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성서 읽기가 참 쉽지 않은 노릇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나라 말로 번역 되는 과정에서 언어가 바뀌며 어려운 한자 단어나 읽기 힘든 어투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나는 한글 성경의 뜻이 애매할 때는 영어성경을 보기도 하고 메시지 같은 쉬운 말로 된 성경도 같이 찾아 읽는다. 그러면 장면이나 글의 의미가 좀 더 뚜렷이 보인다. 지금의 번역도 좋은 점이 있지만 글읽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아이들에게는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초신자나 아이들이 읽기에는 유진피터슨의 메시지성경이나 쉬운 성경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나는 아직 성서 읽기가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나는 과감히 말하고 싶다. 성서 읽기가 힘드시면 드라마를 많이 보세요! 인간에 대해 알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성경을 펼쳐 보세요. 성경을 드라마처럼 볼 수 있어요! 칼 바르트가 말했던가,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나는 말하고 싶다. 한 손에는 성경을 한손에는 드라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