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가 잊혀져 가고 있다. 이 땅에 민주화의 횃불을 지핀 4.19 혁명이 무심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41년전 그날이 다시 찾아와도 형식적인 기념식이 간헐적으로 열릴뿐 점차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단순한 과거의 일로 남아 있을 뿐이다.
특히 청주는 마산, 서울과 더불어 우리나라 4.19 혁명의 3대 진원지임에도 그 업적이 상당수 평가절하되거나 세인의 뇌리속에서 잊혀지고 있다.
서울 수유리의 4.19 탑, 묘역, 4.19회관이 건립됐고 마산에는 3.15의거탑과 기념관이 들어섰음에도 당시 이승만 독재정권과 3.15부정선거에 대해 항거의 물결이 넘쳤던 청주지역에는 4.19와 연관된 아무런 기념물도 찾아 볼 수 없다.
기념탑은 고사하고 중앙공원에 있던 초라한 4.19기념비 마저 5.16후 실종되었으며 아직까지 4.19와 관련된 조형물이나 기념관 하나 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60년, 청주에서는 3.15부정선거 이후인 3~4월, 청주공고(현 청주기계공고), 청주고, 청주상고, 청주농고, 세광고, 청주여고 학생들 3천여명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몇차례 격렬하게 벌였고 이중 일부는 진압 경찰과 맞서다 40여명이 연행되었고 30여명의 부상자를 냈다.
또한 청주공고의 서클인 공석회(公石會ㆍ해공 신익희와 유석 조병옥의 호를 따서 만듬)는 시위를 모의하다 사전에 발각돼 고문을 당하거나 시내 모 여관에 감금되기도 했었다.
제 8대 4.19공로자회장을 역임한 신광성씨(자민련 전 흥덕지구당위원장)는 『충절의 고장에서 치켜든 민주화의 횃불은 오늘날 5.18정신으로 이어진 것』이라며 『우리 고장의 4.19가 폄하되고 있는 것은 역사의식의 부재』라고 꼬집었다.
4.19세대인 이융조 교수(충북대 고고미술사학)는 『연세대 재학시절, 불의에 맞선 젊은 학도들의 함성이 귓전에 울리는듯 하다』며 『청주 지역의 4.19도 마땅히 재평가를 받아 역사속에 민주혁명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화체육부 임병무 : lbm@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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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6장 근대
제2절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개발
1. 4·19 혁명과 청주시민의 궐기
이승만정권은 반일주의와 반공주의를 내세우면서 독재체제를 수립해갔지만, 이승만정권의 반일주의는 일본에 대한 하나의 외교상의 정략에 이용되었을 뿐이며, 정계에서는 물론 문화, 교육계에서도 친일세력은 그대로 안존했다. 친일파 숙청의 실패로 이승만정권 존립의 민족사적 명분은 무너졌고, 다만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립을 표방한 반공주의만이 정권유지의 명분으로 남게 되었다.
정당성을 잃고 독재체제로 치닫던 이승만정권에 대항한 민중운동으로서의 4·19운동은 국민주권회복운동으로 출발했다. 제4대 대통령선거에서 특히 부통령 후보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한 자유당의 선거부정은 절정에 달했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민중시위가 일어나 시위대가 경찰서를 습격하다 8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가 서울, 부산 등지로 퍼져나가는 한편, 마산에서도 피살된 시위학생 김주열의 시체 인양을 계기로 두번째 민중시위가 일어났다.
한편, 청주공업고등학교의 써클인 공석회(公石會)는 3월 9일의 민주당 강연을 계기로 시위를 벌일 것을 모의하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되고 시위는 사전에 봉쇄되었다.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은 시내 소명여관에 감금되어 있다가 민주당 강연이 끝난 다음 풀려났는데, 이 학생들의 발의로 각 학교 대표들이 모여 3월 12일 야간에 봉화데모를 하기로 결의하였으나 이것도 사전에 발각되어 좌절되었다.
그런데 3월 13일, 청주에서는 경찰이 학생들을 협박하여 자유당 관제데모를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각 학교 학생대표 13명은 3월 14일 오전 9시를 기하여 부정선거 규탄데모를 감행할 것을 결정했다. 그러나 이것도 사전에 발각되어 봉쇄되었으며 주동자 13명은 연행되어 고문을 받은 후 소명여관에 감금되었다. 연행되었던 학생들은 15일 오후 5시에 석방되었는데, 그 다음날 마산사건이 보도되고 그 후 김주열의 참사사건이 보도되자 학생들은 다시 동요하기 시작했다.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은 4월 16일 청주지방의 장정징집일을 기하여 청주공업고등학교 교정에서 데모를 일으키려 하다가, 경찰의 방해로 여의치 못하자 장정환송을 위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던 청주역으로 분산 이동하였다. 그러나 선언문을 낭독하려 할 때 경찰이 몰려와 데모대는 해산당했는데, 이때 학생 40여 명이 연행되었다.
4월 18일 서울에서는 고려대생의 시위가 있었는데, 이 날 청주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은 오전 9시 교문 진출을 시도했으나 경찰에 의해 봉쇄되자, 교내는 들떠 있었고 수업시간에는 삐라를 만들기에 바빴다. 그러나 11시경 천여 명의 학생들은 교문 진출에 성공했고 내덕동 방면으로 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淸州商高생 천여 명과 청주고생 9백여 명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순식간에 불어났다. 경찰은 백차로 길을 막고 기마대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했으나, 시위대는 전진하여 청주여고 앞에 이르렀고 청주여고생 300백 명이 합세하게 되어 시위대는 3천여 명이 넘었다.
시위대는 도청앞에 이르러 증원된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야 했다. 이때 23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는데, 그 중 주모자로 몰린 오성섭, 신광호, 이용희, 이세현, 임병준 등 5명은 구류 처분을 받았다. 30여 명의 부상자를 낸 시위대는 경찰의 공포발사로 2시경 일단 해산하였으나, 대다수의 학생들은 우암산 계곡으로 피하였다가 다시 청주여고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시내는 오후 4시경이 되어서야 잠잠해졌으나, 다시 8시경 5백여 명의 학부모들이 자녀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4월 19일 오전 9시경, 청주농고 학생 5백여 명은 괭이, 삽 등 농기구를 가지고 내덕지서 앞을 통과하여 대성중학교 부근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경찰과 정면으로 충돌하여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또한 청주대학, 세광고등학교, 청주공고 학생들이 부정선거 규탄과 구속학생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했는데 경찰은 소방차를 동원하여 제지하였다. 충북대학은 20일을 시위일로 예정했다가 19일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그 후 질서회복과 희생학생을 위한 모금운동에 주력했다.
이외에 당시 재야인사 홍원길(洪元吉), 25일 서울의 교수단시위에서 연락사무를 맡았던 청주대학의 이정규(李丁奎)학장 등이 학생들의 시위와는 별도로 4·19 운동 상황에 참여했다.
4·19 운동이 폭발한 직접적인 동기는 대통령선거에서의 자유당의 파렴치한 선거부정에 있었지만, 그것은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운동이 아니라 국민주권주의를 회복하려는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미국의 경제원조의 감소로 산업이 침체하고 실업률이 높아져서 6·25 전쟁 중의 독재체제 및 반공체제 강화에 눌려있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이 활성화되고, 이승만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마저 약화되어 4·19 민주화운동은 독재정권 타도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4·19 민주화운동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위에 성취된 민주주의는 5·16 군사쿠데타로 인해 그 발전의 진로가 또다시 불투명하게 되었다.
성 명 혁명당시 소속 성 명 혁명당시 소속
강 병 웅 청주농고 3학년 금 유 식 서울대 법대 2학년
김 광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3학년 김 광 순 수도공고 3학년
김 교 근 경기대학 2학년 김 기 병 외국어대학 영어과 3학년
김 기 일 민간인 김 대 건 동국대 법대 3학년
김 덕 만 광주고등학교 3학년 김 덕 창 서울대 문리대 2학년
김 만 옥 성남고등학교 3학년 김 우 석 사회 단체 소속 일반인
김 양 부 마산상고 3학년 김 순 길 민간인
김 어 상 성남고등학교 김 용 화 전북대 문리대 3학년
김 이 현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3학년 김 정 수 부산대학교
김 종 림 경희대 법대 4학년 김 종 순 홍익대
김 종 옥 조선대 문리대 체육과 1학년 김 종 운 성남고등학교 3학년
김 진 태 성남고등학교 3학년 김 춘 식 중앙대 법대 3학년
김 효 은 중앙대 김 훈 기 동국대 정외과 4학년
남 호 명 한양대 토목과 4학년 노 만 석 수도공고 3학년
문 봉 섭 평택고 3학년 민 병 천 홍익대 4학년
민 승 찬 외국어대 영어과 박 민 원 양정고 3학년
박 선 영 대전고 2학년 박 승 진 영남대 법학과 1학년
박 영 호 건국대 정치과 4학년 박 은 수 수도공고 1학년
박 제 구 대전고 3학년 박 종 환 양정고 3학년
박 찬 세 고려대 법학과 4학년 박 춘 하 홍익대 법대 4학년
박 효 성 성남고등학교 3학년 배 금 원 청구대학교 1학년
배 자 옥 건국대 법학과 배 철 웅 영남대 법학과
백 운 호 건국대 법학과 4학년 서 종 구 영남대 법학과 4학년
설 송 웅 중동고 3학년 손 문 영 중앙대 보육학과 1학년
송 기 석 영남대 법대 2학년 신 경 관 청주대 정치과 3학년
****신 광 성 淸州商高 3學年 신 달 선 청구대 4학년
신 동 림 건국대 4학년 안 길 원 경희대
안 명 희 마산 성지여고 안 병 규 서울대 문리대
양 성 철 서울대 정치과 3학년 오 성 섭 청주공고 3학년
성 명 혁명당시 소속 성 명 혁명당시 소속
위 해 룡 한양대 3학년 유 세 희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
유 용 태 중앙대 3학년 유 인 균 외국어대학
유 일 라 민간인 유 정 하 중앙대 보육학과 1학년
윤 석 순 부산대학교 윤 용 섭 고려대 문리대 4학년
윤 정 우 경희대 법대 4학년 윤 흔 명 청주대
이 기 택 고려대 이 래 필 청주고등학교 3학년
이 기 후 외국어대학 이 병 길 제천농고 3학년
이 상 철 양정고등학교 3학년 이 세 기 고려대
*****이 세 현 淸州商高 3學年 이 영 교 영남대 법학과
이 영 재 홍익대 법과 3학년 이 영 진 국학대학
이 완 수 성균관대 4학년 이 완 식 경북고 3학년
이 을 랑 경남공고 3학년 이 장 춘 서울대
이 재 환 고려대 이 춘 근 중앙대
이 태 우 중앙대 정외과 2학년 이 태 우 건국대 경제학과 2학년
이 해 춘 MBC라디오 정치부 기자 이 홍 배 경희대
*****임 병 준 淸州商高 3學年 장 영 순 경희대 법대
장 용 상 영남대 4학년 장 제 모 부산동래고 2학년
장 진 호 홍익대 정 동 성 경희대 4학년
정 원 찬 건국대 법학과 4학년 정 우 상 청구대 법대 2학년
조 융 부 수도공고 3학년 조 재 린 외국어대학
조 창 도 숭실대 3학년 주 락 서 사울대 사범대학
지 승 수 조선대 약대 채 용 국 민간인
최 순 권 단국대학교 최 영 하 성균관대 3학년
최 정 택 성균관대학교 추 은 석 홍익대
하 승 용 국학대 경제과 4학년 한 규 철 건국대 정외과 2학년
한 영 수 청구대 2학년 한 호 상 성균관대 1학년
홍 관 옥 중앙대 국문학과 2학년 홍 승 길 청구대 법과 2학년
홍 충 식 동북고등학교 3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