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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소중한 꿈이 있는가?"
뮤지컬 '빌리 엘리엇'은 공연하는 3시간 내내 관객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눈물과 땀으로 빚어낸 '빌리'의 비상은 진한 감동 그 자체였고, 그 감동은 충격적으로 내 가슴팍을 파고 들었다.
지금까지 다양한 뮤지컬을 감상했지만, 왜 이 작품이 금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칭송받고 있는 지를 마지막 무대의 커튼이 내려지고 나서야 더더욱 실감할 수 있었다.
무수한 관객들의 기립박수와 열렬한 환호 그리고 뜨거운 갈채가 쏟아졌다.
감동이 컸던 만큼 그칠 줄을 몰랐다.
'LG 아트센터'의 그 가슴 벅찬 한 겨울밤의 열기를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 전율과 감동을 단박에 간파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과연 수작이었다.
어린 소년 '빌리'가 어쩌면 이리도 다양한 예술적 장르들을 완벽하게 소화해 낼 수 있을까?
완벽한 승화였다.
'발레'는 기본이고, 청아한 '보컬', 환상적인 '탭댄스', 평면과 공간을 조화롭게 아우르는 '아크로바틱' 그리고 현대적인 '힙합'까지,
그 치열한 열정을 마음껏 불사르는 다양한 몸짓들이 한데 뭉뚱그려져 강렬하고 웅장한 퍼포먼스를 멋지게 연출해 냈다.
예술적 향취와 벅찬 떨림이 시종일관 흥건하게 흘렀다.
놀라웠고 동시에 대견했다.
이 작품은 이미 영화로도 대중들에게 선을 보였다.
그랬던 만큼 친숙한 잔상들을 갖고있었다.
하지만 영화와는 비교를 허락치 않는 생동감과 리얼리티가 살아 숨쉬는 감동의 결정체였다.
공연장을 나선 이후로 며칠이 지났지만 이 공연은 감동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관객들에게 계속해서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당신에게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소중한 꿈이 있는가?"
"그 꿈의 실현을 위해 당신은 그에 합당한 땀과 눈물을 지속적으로 흘리고 있는가?"
온몸을 불사르며 열연했던 '빌리'.
그 소년의 머리카락 끄트머리에서도, 손끝에서도, 턱과 콧등에서도 쉼없이 미더운 땀방울이 뜨겁게 흘러내렀다.
많은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그 땀방울의 '메타포'도 바로 이 질문이자 화두였으리라.
1979년, 영국에는 '대처정부'가 들어섰다.
'대처리즘'은 그동안 강성노조로 정평이 나있던 북부의 '탄광 근로자들'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끝까지 합치될 수 없는 물과 기름이었다.
80년대 초반부터 대규모 파업과 농성이 빈들의 불길 같이 북부를 강타했다.
가난하고 힘겨운 사람들에겐 생사가 걸린 문제였다.
그래서 사생결단식 투쟁으로 '대처정권'에 극렬하게 저항했다.
필경 언젠가는 엄청난 파국을 맞고야 말리라.
초대형 폭발을 암시하는 도화선의 불꽃이 뇌관을 향해 거침없이 치닫고 있었다.
그런 암울한 상황이었다.
깊고 어두운 막장에서 어른들은 석탄을 캔 게 아니었다.
가족들을 위한 희망을 채굴한다고 생각하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갱도를 따라 흐른 건 시커먼 탄이 아니라 그들의 미래였고 가족들의 따뜻한 행복일 터였다.
때로는 죽음과도 직면해야 했던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그런 아버지들이었기에 자식들에게도 이따금씩 그 고생에 부합하는 비슷한 함량의 강권과 압박으로 애들의 미래를 재단하기도 했고 일방적인 권면으로 애들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심각하게 억누르기도 했다.
십대 초반의 '빌리'는 아버지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매일 권투도장에 나갔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허름한 '헤드기어', 아버지가 사용했던 낡은 '글러브', 후줄근한 '운동복'.
도장에서의 '빌리'는 누가봐도 가난한 석탄쟁이의 아들에 지나지 않았다.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계속해서 권투를 하고 있던 어느 날,
그동안 같은 건물 1층에서 연습을 하던 '발레스쿨' 학생들이 사정이 생겨 2층으로 옮겨왔다.
'빌리'에게는 새로운 인연의 시작이었고 그 인연은 운명의 나침반을 하루아침에 정반대로 돌려 놓았다.
그에게 발레스쿨의 '윌킨슨 선생님'은 사막의 오아시스였다.
그녀로부터 본격적인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본디 '춤'에 대한 관심도 있었지만 그의 영혼에 발레에 대한 숨겨진 재능과 끼가 가득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빌리'의 삶에 지금까지와는 완벽하게 다른,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었다.
'빌리'는 점점 '발레'의 매력에 깊숙이 빠져들었다.
그러나 과묵하고 타협할줄 모르는 아빠, 파업과 투쟁의 선봉에 서있던 혈기왕성한 형,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
그의 가족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빌리'의 관심과 미래를 이해해 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빌리'에겐 런던으로 가서 세계적인 '발레리노'가 되겠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비원이었다.
그 꿈은 그로하여금 온갖 역경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훈련에 매진하도록 이끌었다.
빌리 옆에 열정적인 '읠킨슨 선생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해 추운 겨울 크리스마스 시즌.
'빌리'는 체육관에서 혼자 '발레'를 하며 연습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연찮게 아들의 '발레'를 지켜본 아버지.
그 이후엔 두 말하면 잔소리였다.
끝없는 갈등과 반대가 이어졌다.
숨이 막혔다.
그랬던 까닭에 '빌리'는 한동안 깊은 좌절의 구렁텅이에 빠져 헤매기도 했었다.
그런 일련의 과정들, 예컨대 발레의 입문과 열정적인 훈련 그리고 혹독한 시련과 극복의 파노라마 등이 매순간 '빌리'의 유연하지만 비트있는 몸짓으로 강렬하게 표출되었다.
훈련에 몰입하는 '드림발레', 낙담과 절망을 훌륭하게 담아낸 '앵그리 댄스', 공연 후반부에 종합적으로 완성된 공연을 보여주는 '일렉트리시티(열광)'.
이 세 개의 큰 단락은 공연의 전체 흐름에 강력한 임팩트를 부여했다.
런닝타임 3시간이 매우 짧게만 느껴질 정도로 '드림발레', '앵그리댄스', '일렉트리시티'는 탁월하고 멋진 퍼포먼스였다.
아름다운 꽃이 가득한 세 개의 '산정가든' 같았다.
특히 '빌리'가 절규하며 온 몸으로 울부짖던 격정적인 '앵그리댄스'에선 안타까움을 이기기 못해 나도 모르게 애닲은 눈물이 미간을 삐질삐질 적셨다.
아마도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 주변 관객들도 자주 손수건을 만지작거렸다.
그랬다.
관객들도 '빌리'의 맥박을 그대로 따라가며 함께 호흡했다.
그의 심장박동에 따라 함께 빨라지기도, 함께 느려지기도 했다.
어린 '빌리'와 함께 웃었고, 절규하며 같이 울었다.
완벽한 감정이입이자 몰입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결국, 세상은 '빌리'의 한결같은 꿈과 의지 앞에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었다.
동네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빌리'가 '런던'으로 가서 발레시험을 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일생동안 단 한 번도 북부 탄광촌을 떠나본 적이 없었던 아버지와 빌리는 그 모금된 돈으로 '왕립 발레스쿨'로 향했다.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로열 발레단'의 심사위원들 앞에서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인 '빌리'.
하지만 그는 전형적인 시골의 촌뜨기 소년에 불과했다.
테스트가 끝났다.
그의 실력은 아직도 여전히 미흡했다.
그렇지만 빌리의 집념, 그의 때묻지 않은 영혼, 발레에 대한 열정을 간파한 심사위원들은 '빌리'를 선택했다.
어린 '빌리'의 간절함이 발레계의 거목들을 감복시킨 것이었다.
합격 통지서를 받아들고 서로 얼싸안으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빌리의 가족들.
이제 더 이상 무엇을 바랄 것인가.
어려움과 난관은 어느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난관 앞에서 좌절하거나 주저앉으면 안된다.
갖은 풍상을 뚫고 전진하고 또 전진해야 한다.
그게 삶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꿈을 향한 옹골진 도전 속에 삶의 환희와 진한 감동이 꽃을 피우는 법이니까.
예외는 없었다.
'희망'은 현재의 척박한 삶을 견인하는 유일한 등불이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 세모에 어린 '빌리'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각자의 마음 속 등댓불을 더 환하게 밝힐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이 뮤지컬에 재삼재사 깊은 감사를 전하고 싶다.
대단원의 막이 내려졌다.
감동을 주체할 수 없었다.
영화 속 '빌리'보다도 뮤지컬에서 열연한 한국의 제1대 빌리들(김세용,정진호,이지명,임선우)은 더 훌륭했고, 더 섬세했으며 더 파워풀한 퍼포먼스를 멋드러지게 선보였다.
신들린 '빌리들'이 진심으로 자랑스럽고 예뻤다.
2005년 5월,
영국에서 뮤지컬 '빌리 엘리엇'을 보고 감동에 겨워 이 작품을 한국에서 무대에 올려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제작사의 문을 두드린 (주)매지스텔라의 '문미호 대표님'의 열정과 집념에 오마주를 보낸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작품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문 대표의 땀과 노력 덕분에 한국은 이 공연을 무대에 올린 세계 4번째 국가가 되었다.
아시아권에서도 처음이었고 비영어권 국가 중에서도 처음이었다.
수 년 동안 영국 제작사를 집요하게 설득한 끝에 한국에서의 공연이 결정되었지만 출연진 구성, 무대장치, 자금조달, 음악, 마케팅, 세부연출, 공연장 섭외, 피나는 연습 등등 할 일이 산적한 상황이었다.
그 중에서도 '빌리찾기'에 대한 후일담은 잔잔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빌리'의 조건은 '변성기를 지나지 않은 키 150cm 이하의 대한민국 소년이면 누구나'였다.
이 한국 '빌리찾기' 대장정은 2009년 2월부터 근 1년 간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오디션에 들어갔고, 수많은 예비 '빌리들' 중에서 탁월한 가능성을 보여준 4명을 제1대 '빌리들'로 선발했다.
공연의 성패가 곧 '빌리찾기'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므로 엄청난 대장정을 펼친 것이었다.
내가 본 '빌리'는 '정진호 군'이었다.
그는 특히 '탭댄스'의 신동이었고 진정한 달인이었다.
나머지 3명의 '빌리들'은 아직 접해보지 못했는데 공연장을 나서면서 관계자를 찾아가 문의해 보니 각각의 '빌리'에 따라 맛과 감흥이 조금씩 다르다고 했다.
또한 연출도 주인공에 따라 약간 변경된다고 귀뜸했다.
걸출한 4명의 한국 '빌리들'.
그들 각자에겐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과 캐릭터가 존재할 터이니 그런 귀뜸이 충분히 이해가 가고도 남았다.
'뮤지컬'은 현장성과 적시성 그리고 살아있는 리얼리티로 인해 영화나 책보다 훨씬 더 감명 깊고 공명의 울림이 오래 간다.
십대 초반의 어린 '빌리', 그의 발군의 연기력에 찬사를 보내고 동시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빌리'가 단순히 춤을 잘 추고, 노래를 잘 한다고 해서 전 세계의 관객들을 단숨에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은 아닐 것이다.
가난한 집안, 탄광노조의 장기간의 파업과 치열한 투쟁, 척박한 환경과 현실속에서도 꿈을 향해 전진하는 행동하는 진정성,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훈련에 매진했던 성실함과 끈기가 빌리의 육신과 영혼을 타고 절절하게 표출되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관객들도 그런 '빌리'와 더불어 매순간 같이 전율했고 감동했다.
2010년 8월부터 역삼동 'LG 아트센터'에서 장기공연에 돌입한 금세기 최고의 감동 뮤지컬, '빌리 엘리엇'.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완벽하게 준비하여 영국의 '워킹 타이틀'을 비롯한 해당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오히려 영국, 미국,호주의 무대보다 한국 공연이 더욱 훌륭하다는 최고의 평판과 갈채를 이끌어 냈다.
형설지공으로 최고의 무대를 창조해 낸 연기자들및 스탭진들께 이 자리를 빌려 진심어린 감사와 존경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영원히 잊지 못할 세모의 감동이자 축복이었다.
확신컨대, 한 번 보면 남녀노소 누구나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감동의 물결을 고스란히 퍼담아 우리네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바쁜 시간을 쪼개서라도 공연장 문을 두드려 보라고
진심으로 권하고 싶다.
감동을 전파하는 일,
살아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버금하는 가장 중요한 특권이자 책무라 생각한다.
다시 한번 수고해 주신 수많은 관계자 분들께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
'빌리 엘리엇'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낸 작가 'LEE HALL'과 영화 시연회 때 큰 감동을 받아 뮤지컬의 음악을 흔쾌하게 맡아 주었다는 'ELTON JOHN'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사랑하는 'BILLY ELLIOT'
부디 그 이름, 그 감동, 영원하기를.
GOD BLESS YOU !!!
2010년 12월 23일.
심야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