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연세중앙교회 목사 “순교 못해 억울해”
은혜로운 간증
1996년 12월 27일 그날 금요철야예배가 끝나려면 10분 정도 남은 시간이었다.
복면한 괴한이 강단 오른쪽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는 손에 도끼를 들고 허리에는 시퍼런 식칼을 여러 개 차고 있었다.
나는 복면한 남자를 보고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지만, 몸을 피하지 않은 채 강단을 지켰다.
괴한한 순식간에 나를 겨냥해 도끼를 힘껏 던졌다. 날카로운 도끼가 내 왼쪽 허벅지에 퍽하며 찍히더니 허벅지 근육을 베고 떨어졌다.
성도 수천 명이 두 분을 뜨고 있는 상황에서 일어났다.
찬양단이 우르르 뛰어가 괴한을 강단에서 끌어내렸고, 집사들은 콸콸 쏟아지는 피를 넥타이로 지혈시켰다.
하지만 바지는 피로 점점 물들었다. 나는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의 압력으로 욱신거리는 가슴 통증을 느꼈다.
나는 한 쪽 다리에 힘을 주고 강단에 서서 남은 10분 분량의 설교를 끝낸 뒤 통성기도를 인도했다.
토끼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던 성도들이 계속 통곡하며 내 안위를 위해 기도했다.
예배를 마친 뒤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S병원으로 향했다.
간호사가 도끼에 찍혀 벌겋게 벌어진 상처에 소독약을 들이부었다.
나는 괴한을 보는 순간 강대상 옆으로 한발 비켜서는 바람에 순교할 기회를 놓친 것이 억울해 아픈 것도 못 느꼈다.
그날 밤에는 의사가 없어 수술을 하지 못했다.
2시간 쯤 지나 아내가 병실에 들어섰다.
“여보, 순교할 뻔 했는데 참 아깝네요. 만약 하나님께서 이 일을 순교정신으로 목회했다고 인정하시면 하늘나라에서 순교의 큰 상이 있을 텐데. 그러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아내의 위로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됐는지 모른다.
“맞아, 순교로 인정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니 나는 그 시간이 황홀하기까지 했다.
“하나님, 만약 제가 강단에서 죽었다면 찬란한 영광 속에 순교자의 이름으로 하늘나라에 기록됐을 텐데. 아직도 못난 저에게 할 일이 남았습니까. 그렇다면 육체가 있는 동안 주의 일을 마음껏 시키시옵소서.” 마음속으로 감사기도를 했다.
그리고 “나를 헤치려한 사람이 구원 받게 해주시고, 우리 성도들이 이번 기회에 기도의 불이 붙게 해주십시오.” 밤새 기도했다.
다음날 토요일 의사가 출근하자마자 수술에 들어갔다.
“이렇게 될 때까지 도망 안 가고 뭐하셨어요.” 의사들이 미련하다며 핀잔을 줬다.
오전 9시 수술실에 들어가서 오후 3시에 나왔다. 6시간 수술을 했다.
병실에서 꼼짝 못하고 누워 있었다. 다음날 주일 아침 아내가 휠체어를 준비해 병실에 왔다.
“전국에서 온 성도들이 당신 설교를 기다립니다.”
의사는 꿰맨 자리가 터지면 큰 일 난다고 말렸지만 내가 휠체어를 타고 교회 도착했을 때는 설교 직전 통성기도 시간이었다.
성도들은 하나같이 울며 담임목사의 쾌유를 비는 기도를 뜨겁게 드리고 있었다.
업혀서 강단에 올라간 나는 휠체어에 앉아 기도했다.
“주님, 종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셔서 계속 말씀을 전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담임목사가 그 몸으로 감히 설교하려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교인들은 놀라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설교했다.
“하나님 사랑으로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나를 죽이려했을지라도 그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법적으로 큰 형량이 미치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베풀어야할 사랑입니다. 도끼를 휘두른 사람을 용서하고 법적 처벌을 받지 않도록 온 교인이 서명합시다.”
내가 설교를 마치고 병원에 갔더니 형사가 조서를 작성하러 와 있었다.
“목사님, 그 사람을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당시 죄목은 살인미수였고 살인미수는 무기징역형을 받는다.
내가 형사에게 말했다.
“형사님, 정신병자의 행동이라고 써주세요. 정신감정을 받을 때 정신병자로 인정받으면 바로 풀려날 수 있지 않습니까.”
“아니 목사님, 그 사람은 죽어 마땅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도끼로 찍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데요.”
“아니요, 그 사람은 예수 믿고 구원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가 법적 처분 받기를 원하지 않으니 풀어 달라고 우리 교인들이 모두 서명하기로 했습니다.”
형사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목사님, 과거에 그 사람이 목사님 교회에 다녔다면서요.”
“네, 우리 교회 다닐 때 내가 그를 참 사랑했습니다. 지금도 사랑합니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에게 도끼질을 하고 배신했는데도 목사님은 계속 사랑한다고 그러십니까.”
“나는 그가 처벌받지 않고 예수 잘 믿어서 온전한 정신으로 사회생활 잘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한 번 더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한마디로 많이 감형될 것입니다.”
그날 주일 저녁예배 시간이 가까워지자 아내가 설교하러 가자며 또 휠체어를 가지고 왔다.
그렇게 주일 저녁예배까지 설교를 무사히 마쳤는데 문제는 월요일부터 두 달간 진행되는 동계성회였다.
신문과 방송 등 여러 곳에 광고까지 나갔으니 반드시 해야 했지만 상처가 너무 깊었다.
월요일 날이 밝자 아내가 아침 일찍 나를 데리러 왔다.
의사에게 기도원에서 설교를 해야 하니 퇴원시켜 달라고 하자 점잖던 의사가 심하게 나무랐다.
“당신 미쳤어요, 이렇게 무식하게 나오다니 정말 목사 맞습니까. 다리 신경 끊어지면 평생 못 걸을 수도 있다고요.”의사는 노발대발하며 퇴원을 가로막았다.
환자를 걱정하는 의사의 심정을 십분 이해했지만 나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하고 차에 올라 기도원으로 향했다.
설교를 하려고 기도하고 있는데 병원에서 보낸 수간호사가 나를 찾아왔다.
그 때부터 매일 아침저녁으로 간호사가 기도원까지 와서 정성스럽게 소독해줘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됐다.
집회시간마다 그 몸으로 휠체어에 앉아 설교하니 전국에서 온 수천 명이 더 큰 은혜를 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집회가 끝나기 2주 전에는 두 다리로 서서 설교할 정도로 완전히 회복됐다.
그 후 연세중앙교회 교인 대다수가 나를 헤치려 했던 그 사람에 대해 법적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서명했고, 실제로 그는 얼마 후 풀려났다.
그의 가족이 치료비 전부를 대겠다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대신 예수 잘 믿고 꼭 천국가자고 말했다.
1996년 말에 내가 당한 죽음의 고비는 영적으로 보면 축복이었다. 기도원을 짓고 교회가 커지면서 나나 성도들이 교만해질 수 있었는데 엄청난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나니 교만이 들어올 틈 없이 모두 열심히 기도하게 됐다.
우리 삶에 최악의 경우가 닥치더라도, 죽을 고비를 맞더라도 절망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음부의 권세는 성도의 앞길을 가로 막지만 그 권세보다 더 큰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넉넉히 이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