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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345. [역경의 열매] 박천록 (1-18) 술 취해 방황하던 청년, 선교사로 쓰임 받다
미션스쿨·양로원 등 현지 20개 기관 운영, 무슬림 정부가 추방… 아내가 사역 이어가
한국에서 이슬람권 선교를 연구하며 아내(이정숙 선교사)의 사역을 지원하고 있는 박천록 선교사.나는 인구 1억6000만명의 세계 최빈국 방글라데시 선교사다. 그런데 무슬림이 90%에 이르는 이 나라에서 선교 사역을 너무 요란하고 적극적으로 펼쳤다는 이유로 2007년에 추방당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를 만나기 전부터 방글라데시 선교사였던 아내(이정숙 선교사)는 추방을 당하지 않아 현지에서 나와 함께 펼쳤던 선교 사역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추방당한 지 8년이 지났으니 선교지 사역이 축소되고 약화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에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아내와 내가 설립한 러브방글라데시미션(LBM)은 지금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를 중심으로 9개의 미션스쿨과 10개의 교회, 1개의 무의탁 양로원을 운영하고 있다. 이곳에서의 선교활동은 무슬림의 조직적인 박해가 있어 선교 열매를 거두기가 쉽지 않은데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학교 운영에 따른 유급교사와 직원, 교회 사역자만 130여명이니 매달 최소 3500만원 정도의 선교비가 필요하다. 은행 잔액은 항상 바닥인데 유지되는 것이 기적이다. 늘 숨이 벅찰 정도로 힘은 들지만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에 이 사역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벌써 보따리를 싸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추방 직후 난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13년간 온 몸을 불사르며 사역한 나를 왜 한국에 붙잡아 두시고 강제 안식년을 시키시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그러나 어느 날 내가 계속 방글라데시에 있었다면 나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것은 내 성격이 다혈질적이라 적극적인 선교를 해 온 탓에 무슬림 신도들의 표적이 되어 공격을 당했을 것이라 예상되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여러 차례 무슬림으로부터 피습을 당했고 또 암살당할 뻔했던 순간도 있었다.
방글라데시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정부는 외국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을 제한하고 있다. 지금까지 방글라데시에서 순교당한 이가 1만3000명이라고 하면 모두 놀란다. 무슬림이 삶 속에 뿌리를 내린 이들에게 배교는 용서 못할 죄가 된다.
한국으로 강제 출국당한 나는 그동안의 사역을 정리해 간증집 '사명'을 펴냈고 차분히 나를 돌아보며 이슬람권 선교에 대한 전략을 짤 수 있었다. 또 집회를 다니며 현지 사역을 소개하고 후원의 범위를 넓히게 된 것도 생각하면 또 다른 감사의 조건이다.
이제 국민일보 독자 여러분에게 내가 하나님을 만나 지금까지 걸어 온 간증을 소개하려고 한다. 사람마다 얼굴과 성격이 다르듯 하나님께서는 선교사에게도 각기 다른 분량의 달란트와 선교 분깃을 맡겨 주셨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품격 있는 선교가 아니라 밑바닥 인생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다.
이는 내가 살아온 다소 거칠었던 삶과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은 죄악에 물들어 인생을 허비하던 한 청년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어주셨던 것이다.
20대의 나는 술독에 빠져 살았다. 밥은 안 먹어도 술은 마셔야 했다. 술 취하면 실수가 따르지만 마시면 온 몸에 퍼지는 짜릿한 기분을 제어하지 못했다. 절엔 안 다녔지만 스스로 불교신자라고 생각하던 내게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날도 잔뜩 술이 취해 비틀거리며 집으로 향하던 중에 벼락치는 소리가 내 귀를 울렸기 때문이다.
"방탕하지 말라. 술 취하지 말라."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uk42@hanmail.net
* [역경의 열매] 박천록 (1) 술 취해 방황하던 청년, 선교사로 쓰임 받다
* [역경의 열매] 박천록 (2) 방탕 끝에 얻은 폐병… 일주일 금식기도 후 새 삶
* [역경의 열매] 박천록 (3) "이 땅의 모든 것 사랑하게 해주소서" 기도
* [역경의 열매] 박천록 (4) 방문전도 환자 병 낫자 주민들 찾아와 기도 부탁
* [역경의 열매] 박천록 (5) "개종해 줄테니 돈 달라" 대가 바라고 교회 출석
* [역경의 열매] 박천록 (6) "쌀만 나눠주면 안되겠다"… 단상에 올라 예수 증거
* [역경의 열매] 박천록 (7) 귀국 결심하자 "네 믿음이 이 정도냐" 음성 들려
* [역경의 열매] 박천록 (8) 무슬림들 "라마단 때 교회문 닫아라"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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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박천록 (11) "빵으로 무슬림 꾀어내" 음해에도 교회 꾸준히 성장
* [역경의 열매] 박천록 (12) "전도 훼방하던 폭력배들, 나에 대해 암살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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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박천록 (18·끝) '전도의 황금어장' 재정부족으로 무슬림 못 낚아
◇박천록 선교사 약력= △1959년 전남 해남 출생 △그리스도신학대학교 졸업 △1995년 방글라데시 선교사 파송 △2007년 선교활동을 이유로 추방 △간증집 '사명'(LBM) 발간 △현 러브방글라데시미션(LBM) 대표
***[역경의 열매] 박천록 (2) 방탕 끝에 얻은 폐병… 일주일 금식기도 후 새 삶
새 생명 얻고 주변 권유로 신학교 입학… 신학생 시절 믿음 좋은 아내 만나 결혼
1994년 조용기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 박천록 이정숙 선교사 부부.'술취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 메시지를 들었음에도 크리스천이 아닌 나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계속 술 마시며 방탕한 삶을 살았다. 이렇게 1년 6개월이 지난 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병원에서 '폐병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 주는 독한 약을 먹었다. 과음으로 위가 많이 상한 상태에서 약이 합병증을 유발해 더 이상 먹을 수 없었다. 나는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죽음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한창 나이의 28세 청년이 앙상한 몸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은 너무나 처량했다. 지난 세월이 너무나 후회가 되었다.
교회 다니는 지인 한 분이 병문안을 와서 "예수님을 잘 믿으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하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그분을 따라 계속 교회를 다녔지만 차도는 없었다. 그래도 아픈 몸을 이끌고 주일 오후 3시에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가곤 했다.
하루는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속에서 "너는 내 종이다"라는 음성이 묵직하게 들려왔다. 종을 머슴살이하는 그런 뜻으로만 이해한 나는 시골로 내려가 농촌에서 품삯 받는 일꾼이 된다는 뜻인가 하고 매우 의아해 했다. 그런데 이 음성은 내가 교회에 갈 때마다 들려왔고 이것이 나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병세가 악화되고 있어 나는 이왕 죽을 바에 금식기도라도 한번 하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청평의 한 기도원을 찾아가 하나님께 매달리며 기도를 했는데 너무 병약한 상태에 음식까지 끊으니 기절을 하고 말았다. 간신히 의식을 차리고 눈을 떴는데 누군가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거적 같은 것을 내 몸 위에 걸쳐 놓았다.
금식 5일째 되던 날이었다. 폐에 가득 찼던 물이 저절로 마르면서 몸에 힘이 났다. 신기해하면서 금식 일주일을 마치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폐병이 다 나았다"고 했다. 나는 비로소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이 치료해 주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고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주님. 저는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새 생명을 주셨으니 남은 삶은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서원기도를 드린 나는 교회에 거의 머무르다시피 하며 전도와 예배, 봉사로 살았다. 주변의 권유로 신학교에 입학했고 '주의 종'이 되기 위한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신학공부를 본격적으로 하면서 내가 예전에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삶을 살았는지, 죄인이었는지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가 지은 죄들을 회개하려니 얼마나 많은지 몰랐다. 이 죄를 주님께 다 사함 받고 깨끗한 상태가 되어야 주의 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회개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신학교에 다니면서 한 믿음 좋은 여성을 소개받게 되었는데 그녀가 바로 아내 이정숙 선교사다. 그녀는 나와 교제를 이어가다 먼저 방글라데시 선교사로 파송받아 가게 되었고 나는 신학교 졸업 후 개척교회를 시작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모든 것이 부족하게만 여겨져 목회가 자신이 없었고 성도도 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1994년 12월, 이미 방글라데시 선교를 하고 있던 이정숙 선교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그녀가 한국에 돌아와 내 목회를 돕는 사모가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뜻은 그 반대였다. 기도 가운데 "네가 방글라데시로 들어가 아내와 함께 사역하라"는 강력한 미션을 주셨던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못산다는 방글라데시. 그것도 엄청나게 더운 이 나라로 나를 보내는 하나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남은 삶은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서원한 나로서는 신혼 2개월만에 방글라데시행 비행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3) "이 땅의 모든 것 사랑하게 해주소서" 기도
1995년 방글라 수도 외곽 빈민촌에 첫발, 외지인 왔다며 차에 쇠똥칠… 고약한 인사
1996년 3월 1일 지역유지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몰라떽 초등학교 개교식을 가졌다. 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박천록 선교사.1995년 2월 22일 오후 2시,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공항에 내렸을 때 나를 맞아준 것은 매캐한 연기와 쓰레기 썩는 냄새였다. 국제공항인데도 내가 보기엔 산업공단의 폐자재 창고 같았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몸도 날씬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잘생겼는데 행색들은 너무나 초라했다. 모두 맨발에 걸친 옷은 언제 빨았는지 모를 만큼 때가 꼬질꼬질 했다.
무덥고 비위생적인 이 곳에서 어떻게 살까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이제 이들과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어야 했다. 나는 이곳의 날씨와 사람들, 문화와 풍습까지 모두 사랑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인구밀도가 세계 1위라는 방글라데시는 어딜가나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이슬람교가 국교인 이 나라는 90%가 이슬람교도다. '알라'를 신으로 섬기는 거대한 공동체 이슬람은 하루 5번씩 일제히 나마스(기도)를 드릴 만큼 종교가 생활화 되어 있다. 이슬람교가 사람들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은 10% 중 7∼8%가 힌두교, 불교가 2%, 기독교인은 0.3% 정도인 것으로 당시에 집계됐다. 종교의 자유를 헌법이 보장하지만 실제로는 자유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 배타적이고 자칫 공격을 당하기도해 선교사들이 가장 꺼리는 국가 중 하나이다. 선교사 수도 인근 국가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아내와 나는 본격적인 선교사역에 나서기 보다 조용히 이곳에 적응하며 선교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단 교회 개척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곳저곳을 물색하다 몰라떽이란 지역을 가보게 되었다.
다카 외곽에 위치한 빈민촌인 이곳 중앙에 함석지붕을 얹은 8칸짜리 건물이 완공돼 있었는데 원하면 임대를 준다고 했다. 가격도 높지 않아 이곳에서 학교를 열면서 예배를 드리면 되겠다 싶어 계약을 했다.
계약 후 차를 세운 동네 어귀로 돌아와 보니 차에 온통 소똥이 발라져 있었다. 외부인이 허락없이 들어왔다는 경고인데 환영인사치곤 고약했다. 알고보니 몰라떽은 보통 지역이 아니었다. 미리 알았다면 계약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은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이 사는 토종 이슬람 마을이었던 것이다. '몰라'는 수염이란 뜻으로 즉 종교지도자들을 의미했다.
막상 이곳으로 이사하고 보니 사방으로 직경 300m 안에 수천명이 모이는 대형 모스크(이슬람 회당)가 5개나 있었다. 나는 참으로 겁 없이 이슬람 본거지의 중심에 교회와 학교를 턱하니 세운 것이다.
문맹율이 70%에 육박한 이 나라는 교육시설이 부족해 누구든 학교만 세우면 대환영이었다. 나 역시 가난한 아이들에게 공부를 무료로 가르치면서 선교를 할 목적이었다.
1996년 3월 1일, 초등학교 1학년생 120명을 받아 교사를 채용하고 개교를 했다. 원래 50명만 받으려 했는데 소문을 듣고 찾아와 떼를 쓰는데 방법이 없었다. 외국인이 더구나 무료교육을 시켜주는 것을 매우 고마워했다.
우리는 미션스쿨을 지향하며 60명씩 2반으로 나눠 수업을 시켰는데 아이들이 외국인학교에 다닌다는 긍지가 대단했다. 난 8칸 중 2칸을 터서 교회성전 형태로 만들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성도는 아내와 나 뿐이었다. 이곳을 성도로 채워 주십사고 기도하는데 "네가 나가서 먼저 전도하라"는 깨달음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하고 물불 안가리는 나의 성격을 쓰신다고 생각한다. 다음날 나는 바로 전도하러 밖으로 나왔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움막집이 몰려있는 빈민굴이었다. 내가 들어서자 마자 수십명이 나를 애워쌌다.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쓰러질 것 같은 한 움막으로 그대로 들어갔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4) 방문전도 환자 병 낫자 주민들 찾아와 기도 부탁
몇주 만에 150여명 교회 몰려… 가난한 주민들 툭하면 비품 슬쩍
열병을 앓는 소년이 살고 있는 움막집을 찾아가 기도해주고 있는 박천록 선교사.전도차 처음으로 찾은 빈민촌 움막집에는 열병환자가 누워 있었다. 40도가 넘는 찌는 듯한 더위 속에 오한이 나서 벌벌 떨고 있는데 아무런 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폐병 말기로 죽음을 기다리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난 한국에서 왔습니다. 예수를 믿으시면 병에서 나음을 입습니다. 나도 10년 전 당신과 같은 입장이었습니다."
예수를 믿겠다는 그의 말에 영접기도를 시킨 뒤 머리에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다.
옆 움막으로 가보니 노인 한 분이 쪼그리고 있는데 눈을 씻고 봐도 집에 음식이 전혀 없었다. 며칠은 굶은 것 같았다.
"할아버지, 예수 믿으세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이 가난을 벗어나게 해 주시고 복을 주셔서 생활이 풍족하게 바뀌게 됩니다."
나는 예수를 믿겠다고 말하는 그분에게 100타카(2000원)를 드렸다. 쌀 10㎏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렇게 가가호호 방문전도를 했는데 모두 예수를 믿겠다고 해 전도가 너무 잘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때 선교사란 신분이 노출되면 안돼 학교를 운영하는 사장이라고 했다. 모두들 내가 돈이 많다고 생각했는지 요구하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내 말을 들으면 뭐라도 생긴다고 판단해 무조건 예수 믿겠다고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다시 사장이란 명함 대신 무조건 나를 '브라더'(친구)라고 부르도록 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살려고 온 친구이니 이렇게 불러 달라고 했는데 아주 잘한 결정이었다. 내가 거리에 나서면 이곳저곳에서 '브라더' '브라더'라고 부르며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내 이름이 정말 '브라더'인 것으로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긍휼하게 여기셨는지 내가 방문한 가정의 환자가 치료되는 일이 수시로 일어났다. 놀란 주민들은 내게 찾아와 기도를 부탁했고 어떤 이는 기도 한번 받는데 얼마를 내면 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하나님께서 방글라데시 빈민촌 몰라땍에서 사역하는 나를 어여삐 여겨 신유의 능력을 주신 것이라 여겨졌다.
나는 기도로 병이 나은 환자에게 주일에 학교로 예배를 드리러 오라고 했는데 단 몇 주 만에 150명이 모였다. 50명이면 꽉 차 버리는 성전인데 최대한 끼어 앉고 문 밖까지 앉아야 했다.
나는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가 선교가 힘들다고 들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교회로 이렇게만 몰려온다면 너무나 신나게 선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지 절절히 체험해본 터였기에 이곳 목회가 너무 쉬운 것 같아 신기할 정도였다.
"주님. 이렇게만 주민들이 교회로 몰려온다면 방글라데시 선교사 할 만합니다. 이곳에 마음을 붙이고 평생 선교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아직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상태였기에 한 기도였다. 겉과 속이 다른 이들의 마음을 내가 전혀 몰랐던 것이다.
교회에 나오는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가난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식은 많이 낳아 한 가정이 10여명은 예사였다. 교회에 나와 며칠째 굶었다며 배고픈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목사로서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들을 최대한 도와야 했다.
그러나 이곳의 구제 사역은 하면 할수록 내미는 손길이 더 많아졌다. 여기에다 교회 비품은 사다놓기가 무섭게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설교시간에 하나님의 전에 있는 물건에 손대면 안 된다고 해도 소용 없었다. 나는 계속 참았는데 비싼 돈을 들여 사놓은 반주용 키보드까지 사라지자 드디어 분노가 폭발했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5) "개종해 줄테니 돈 달라" 대가 바라고 교회 출석
'무조건 교회 나오라' 방식 전도법 바꿔 주민 속으로 들어가 예수님 복음 설명
교회를 찾아온 시각장애인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박천록 선교사.성도 누구도 반주용 키보드를 안 가져 갔다고 시치미를 떼길래 건물 경비로 채용한 성도에게 역할을 못했으니 해고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제서야 이실직고를 하는데 내가 가장 믿었던 남전도회장 등 교인 5명이 공모해 키보드를 시장에 내다 팔고 돈을 나눠가진 것을 알게 되었다.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들에겐 아직 신앙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고 무언가 이득을 얻기 위해 교회를 나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교회 비품을 눈에 보이는 대로 가져가 버린 것이었다.
내 전도 방법이 잘못된 것인지 회의가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배를 멈출 수도 없었고 인내를 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 때부터 나는 교회 비품을 사면 무조건 빨간색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려 넣었다. 교회용이라는 것을 표시한 것인데 그제서야 물건이 잘 사라지지 않았다.
주일예배는 내가 한국어로 설교하면 아내가 현지어로 통역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나보다 일찍 이곳에서 사역한 아내는 열심히 언어를 공부해 의사소통엔 지장이 없었다.
성도들이 예수를 믿고 크리스천이 되려면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고 그나마 빠짐없이 교회 나오고 봉사하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세례를 주려고 했다. 그랬더니 모두들 놀라며 손사레를 쳤다. 그들의 이야기는 한결 같았다.
"제가 교회는 나오지만 이곳 동네는 모두 모슬렘 신자들이 모여 삽니다. 세례를 받고 제가 정식 교인이 되었다고 소문이 나면 전 이 동네서 쫓겨나거나 맞아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세례를 받을 수 없고 개종할 수도 없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자기 목숨을 걸고 기독교로 개종할 수 없다는 말에 나도 수긍은 갔다. 그런데 자기가 특별히 개종을 해 줄테니 한국돈으로 1000만원에서 2000만원 정도의 고액을 줄 수 있느냐고 거래를 제시하는 것에는 정이 딱 떨어졌다. 이들은 나를 위해 교회에 나와 주고 있었고 위험하게 개종을 해주니 그 대가로 엄청난 금액을 요구한 것이다.
이때서야 나는 이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전도의 방향을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교회만 나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복음의 진리를 정확히 알고 깨닫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부터 나는 무조건 교회에 나오라고 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 대화하며 예수를 소개하는 것으로 전도 방법을 바꾸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차 마시는 것을 참 좋아한다. 틈만 나면 구멍가게 앞에 놓여 있는 나무의자에 앉아 삼삼오오 차를 마시며 이야기 꽃을 피운다.
나는 이들 속으로 들어가 전도하는 새로운 방법을 만들어 냈다. 먼저 나와 함께 일하는 현지 사역자가 차 마시는 이들 사이에 들어가 불쑥 나를 소개했다.
"여러분 한국에서 온 이 분은 지금 우리 어린이들이 다니는 초등학교를 설립한 브라더씨로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돕고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이 마시는 차 값도 모두 다 내 주신다니 마음껏 시켜 드시고 대신 몇 말씀만 들어주시겠습니까?"
차를 사니 이들은 외국인이 무슨 말을 하나 듣겠다고 했고 나는 이들에게 복음의 핵심을 짧은 시간에 설파했다.
"여러분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 피조물인 인간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만들어져 이 땅을 다스리도록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타락으로 원죄가 생겼고 고통 가운데 살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삽자가 사건으로 죄사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폐병을 앓다 죽기 전에 예수믿고 병고침을 받았다고 말하면 모두들 진지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들어 주었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6) "쌀만 나눠주면 안되겠다"… 단상에 올라 예수 증거
쌀을 받지 못할까 걱정돼 주민들 끝없이 긴 행렬… 뼈만 남은 모습에 눈물
전도집회 후 지역민들에게 닭죽을 나눠주는 박천록 선교사. 뭐든지 금방 동나기에 항상 못 먹는 사람이 나온다.주민들이 모여 차 마시는 곳을 순례하는 전도는 꽤 효과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기독교에 대해 질문하는 부분도 공개적으로 설명해 주면 관심을 나타내고 주일날 교회로 찾아오곤 했다.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오든 성전에 들어와 함께 예배를 드린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조바심을 내지 않으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교회에 나오는 과정이고 그들이 영적으로 깨어져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성령께서 그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야 한다고 여겼다.
말도 문화도 잘 모르는 내가 그들을 메시지로 감동시켜 신자로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 더 이상 욕심을 내지 않도록 마음을 비운 것이다.
방글라데시 우기는 5월부터 11월까지 이어진다. 우기에는 국토의 70%가 물에 잠기다시피 바뀌는 것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기에는 일거리가 없어져 굶는 이들이 더 늘어났다.
주민들이 사는 집은 나무로 얼기설기 기둥을 세워 움막을 만들고 지붕은 함석 하나를 올려놓는 것으로 완성된다. 이 움막은 낮 동안 열을 받아 밤에 들어가도 실내가 40도나 되었다. 우기엔 물이 허리까지 차 집에서 살 수가 없는데도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왜 물 속에서 집을 지키느냐고 했더니 그렇지 않으면 이것마저 다 뜯어가 버린다는 설명에 할 말이 없었다. 주민들이 굶는 것을 보다 못한 나는 쌈짓돈까지 다 꺼내 쌀을 사고 토요일에 교회로 오면 나눠줄테니 굶는 사람들은 이웃까지 데려오라고 광고를 했다.
쌀 값은 싼 편이어서 수십 포대를 사 두었다. 토요일 아침 교회 앞에 나와 보니 깜짝 놀랐다. 혹시 늦어 쌀을 받지 못할까 걱정돼 달려 온 주민들의 긴 행렬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말라 뼈만 남은 주민들의 쾡한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나왔다.
이들에게 쌀만 나눌 것이 아니라 복음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단상으로 올라가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나중 일이고 나는 선교사로서 사명을 다해야 했다.
일부 항의를 받으면서도 메시지를 끝낸 나는 한 줄로 선 주민들에 쌀 배급을 시작했다. 150명에서 많아야 200명이 올 것이라 여기고 3㎏씩 줄 쌀을 준비했는데 500명이 넘게 오는 바람에 1㎏씩밖에 줄 수 없어 마음이 아팠다.
모두 쌀을 받아들고 기쁜 표정으로 교회를 나섰다. 지구촌 한편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비만으로 고민을 하는데 어느 한편은 죽도 못 먹어 죽어가는 현실이 참으로 불공평하게 느껴졌다.
아내와 나는 주민들이 너무나 불쌍해 선교비를 모두 털어 써도 언제나 부족했다. 예산을 세울 것도 없이 선교비는 들어오기가 무섭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둘째인 아들 돌이 되었는데 마침 돈이 딱 떨어져 우리도 굶게 생겼다. 아이의 돌 상 차려주는 것을 생략하고 지나가려 했다. 그런데 선교사 모임에서 우연히 이 사실을 알고 각자 돈을 조금씩 추렴해 돌잔치 상을 차려 주었다. 비록 이틀이 지난 돌 잔치였지만 색종이를 오려 붙이고 고무풍선 장식을 멋지게 해 준 선교사 사모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하나님. 동역자들을 보내 아들 돌상을 차려 주시고 축하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더욱 열심을 내어 방글라데시 선교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교회와 학교를 운영하며 사역하는 가운데 예상치 않았던 첫 번째 고난이 다가왔다. 우리를 파송해 준 모 교회에서 교회가 어렵다며 후원선교비를 말 그대로 딱 끊어 버린 것이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7) 귀국 결심하자 "네 믿음이 이 정도냐" 음성 들려
후원교회 선교비 끊겨 폐교 직전에 몰려… 아내 연주회로 학생들 1년 급식비 모금
방글라데시 사역 초기에 두 자녀와 함께 한 박천록 이정숙 선교사 부부후원교회에서 보내주던 선교비가 끊기면서 우리는 바로 빚쟁이가 되었다. 임대한 학교건물 월세를 못주고 교사들 봉급도 밀렸다. 학생들에게 먹이던 점심 급식을 마련하기도 힘들었다.
일단 제일 먼저 타던 차를 팔아 두 달을 버텼지만 이젠 돈이 나올 곳도 없었다. 해결을 위해 기도는 했지만 한국에 아는 교회도, 사람도 별로 없는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여보. 우리 사명은 여기까지예요. 억지로 학교를 끌고 나가면 나갈수록 빚만 쌓이는 것이고 학교를 내놓고 한국으로 들어갑시다."
내 말에 아내도 대꾸를 못했다. 집은 금방 나갔는데 학교는 맡을 후임자가 없었다. 하기야 매달 돈이 만만찮게 들어가는 학교를 누가 맡을 것인가. 잘 알고 지내던 선교사님이나 외국 선교단체에까지 부탁을 했지만 모두 난색을 표했다.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 이유였다.
진퇴양난이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공부하던 어린이들에게 이제 더 이상 학교에 오지 말라고 하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짐정리를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표까지 끊었지만 차마 어린이들에게 폐교 소식을 알리지 못했다.
한국행 3일 전이었다. 나에게 '브라더'를 외치며 밝게 웃는 교사들과 아이들을 뒤로 하고 나만 도망치는 것 같아 너무나 괴로웠다. 하나님께 기도로 다시 매달렸다. 마음 속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천록. 네 믿음이 고작 이 정도냐. 학교운영 힘들다고 보따리 싸면 그 정신으로 한국에서 목회 잘 할 수 있겠니. 선교사는 어차피 고난과 역경의 길인데 버틸 때까지 버텨보아라."
아내 역시 철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비행기표는 샀으니 일단 한국으로 들어와 교회를 찾아다니며 선교보고를 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간신히 그 달 운영비를 마련해 학교로 돈을 송금해 주었다. 급한 불은 껐지만 점심을 굶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학교설립 초기에 아이들이 결석을 많이 해 알아보니 굶어서 다리에 힘이 없어 못나온다고 했다. 너무 마음이 아파 이 때부터 점심급식을 조금씩이라도 하려는데 어린이들이 워낙 많으니 비용이 만만치 않아 힘들었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주는 점심으로 하루를 버텼다.
나는 한국서 방글라데시 급식비 마련 음악회를 열어 보기로 했다. 나는 아내에게 피아노 연주를 하라고 했다. 이제 이야기 하지만 아내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미국유학까지 다녀와 대학강사를 하던 재원이었다. 하나님께 붙잡혀 선교사가 되고 모든 것이 시원찮은 나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아내에게 큰 기대를 걸었던 처갓집 식구들은 생병으로 앓아누웠었다. 아내는 "대학교수는 내가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지만 방글라데시 영혼사랑은 나 아니면 안 되기에 선교사의 길을 택한 것"이라고 말해 나를 감동시켰다.
"아니 여보. 내가 피아노를 손 놓은지 얼마나 되는데 이제 와서 모금 연주회를 하라고 해요."
"음악회 티켓을 팔았는데 음악을 들려줘야 할 것 아니예요. 그냥 잘치는 찬송가만 치세요."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1만원짜리 음악회 티켓을 강매하곤 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표를 팔고 숙소인 인천 선교관으로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었다.
음악회날, 아내의 피아노 연주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실려 있었다. 녹슬었던 실력이 되살아나면서 많은 참석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표를 판 가격에다 즉석 헌금까지 더해지면서 400만원이 들어왔다. 아이들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급식비였다. 나와 아내는 얼싸안고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역경의 열매] 박천록 (8) 무슬림들 "라마단 때 교회문 닫아라" 경고
"한국에선 이슬람 선교 방해 안해" 담대한 항변에 결국 예배 인정
학교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어린이들. 이 식사 한 끼로 하루를 버티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연주회 수익금을 들고 기쁘게 귀국한 우리는 바로 학생들에게 점심을 해 먹이며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 결식아동돕기 자선음악회는 이후 매년 열렸고 입소문이 나면서 이듬해에는 800만원, 3년 차에는 무려 1500만원이 모이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나는 이 돈으로 학교 어린이들의 점심뿐만 아니라 지역에서 굶고 있는 주민들까지 점심을 나누어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딸 귀영이에게 "너도 피아노를 엄마에게 잘 배워라. 나중에 선교사가 되면 선교비도 마련할 수 있으니 말이다"라고 말했다.
방글라데시 사역을 하던 중 하루는 파이다밧이란 곳으로 전도를 나갔다. 이곳이 이슬람 신자들이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인데 겁 없이 들어간 것이다.
가정들을 방문해 전도를 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 가정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갑자기 무슬림 10여명이 나타나더니 전도하는 나를 에워 쌌다. 그들은 무슬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하얀 뚜삐(빵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나를 노려보며 무슨 말을 하나 경청했다.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 겁을 먹은 나는 힘 있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전도를 끝내고 말았다. 나의 말을 현지어 통역을 통해 이야기 듣던 무슬림 대표는 "별거 아니네. 서로 사랑하자는 것 같은데 종교를 바꾸라고 하는 것 같지는 않네"하며 일행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오는데 부끄럽고 창피했다. 무슬림에게 겁을 먹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이렇게 전도를 계속하는 나를 몰라떽 무슬림 지도자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다. 하루는 나를 자신들의 사무실로 오라고 했다. 그곳 대표는 나를 보자마다 대뜸 교회문을 닫으라고 다그쳤다.
"당신, 학교에서 교회 운영하는 것 다 알고 있소. 그래도 아이들이 공부하니 봐 줬는데 곧 이슬람의 금식일인 라마단이 시작되오. 그러니 이 기간에는 교회에서 절대 예배를 드리지 마시오."
"라마단과 교회예배와 무슨 상관이 있소. 우리가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일방적으로 교회문을 닫으라는 것은 말이 안되오."
내가 뜻을 굽히지 않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자칫 나와 가족, 성도들이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며 수긍을 해줄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순간 "주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을 믿는다면 무엇이 두려우랴"하는 강한 믿음이 생겼다. 내 입에서 더 큰 소리가 나왔다.
"절대 교회문은 닫을 수 없습니다."
화가 난 무슬림 지도자들이 나를 뚫어져라 째려보는데 나도 질세라 그들의 눈을 피하지 않고 같이 째려보았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다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한국에서는 이슬람의 선교활동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방글라데시도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국제법을 지켜 우리의 종교활동을 방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워낙 당당하게 이야기 하니 이젠 자기들끼리 "된다" "안 된다"로 나뉘어 싸웠다. 그러다 "기존대로 교회문을 열고 예배를 드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내가 두려워하고 그들의 뜻에 따르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담대함을 주셔서 선교사로서의 자긍심도 지키고 예배도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그들이 교회예배를 인정해 준 것이기에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다.
나는 내친김에 마을 전도집회를 한 번 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현지 성도들은 깜짝 놀라며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예배를 드리게 해준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인데 집회를 열면 잠잠하던 무슬림들이 공격할 수 있는 빌미를 주는 것이라고 했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9) 전도집회 도중 설교… 무슬림들 "중단하라" 거친 항의
반발 우려해 '학교 잔치'로 바꿔 강행 "개종시키려 한다" 불량배들 계속 난동
선교 초창기에 몰라떽 함석으로 지은 교회에서 설교하는 박천록 선교사전도집회를 두려워하는 성도들과 내 생각은 달랐다.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한다면 마을 분위기가 달라지고 성도들도 교회에 다니는 것을 숨기고 있는 지금과 달리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당당히 밝힐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나는 맞다 싶으면 불도저처럼 밀어 붙이는 성격이다. 계획을 짜서 한국에서 강사를 비롯 단기선교 봉사자 20여명이 와서 전도집회를 열도록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자 성도들은 더 크게 반발했다.
"목사님. 이곳 주민 모두가 무슬림입니다. 대형집회를 열면 우리가 다 알려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저희는 맞아 죽습니다. 아직 이곳 분위기를 모르세요. 만약 집회를 강행하시면 저희가 교회를 떠나겠습니다."
전도집회를 위해 한국서 강사와 단기팀이 오기로 했는데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전도집회' 명칭 대신 '학교잔치'라고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그 때서야 교회 성도들도 좀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 강사와 단기선교 봉사자 20여명이 도착했고 나는 학교 옆 큰 공터에 대형천막을 치고 주민들을 불러 모았다. 주민 대부분이 직업 없이 노는 사람이라 행사만 열리면 자리가 비좁을 만큼 사람은 넘쳤다. 40여명의 지역 유지들도 참석해 힘을 실어 주었다.
시작은 축제분위기였다. 단기선교 율동팀이 찬양하며 춤을 추자 모두 박수를 치며 신나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드디어 강사가 올라가 설교를 시작했다. 축사인 줄 알았는데 통역에 의해 기독교 복음을 전해지자 갑자기 내부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때 마침 무슬림들에게 기도시간을 알리는 아잔소리가 근처 모스크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순간 설교 중인데도 좌석 중간에서 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마이크를 끄고 당장 집회를 중단하라. 지금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아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그리고 저 한국인들이 학교잔치를 한다고 우리를 모아 놓고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키려 하는데 우리 모두 다 일어나 이것을 막아야 한다."
놀란 선교팀은 모여 앉아 통성기도를 시작했고 당황한 나도 소요를 막아보려 했으나 주민들은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역 유지들은 나를 향해 "학교축제를 한다고 해놓고 이게 무슨 짓이냐!"며 강하게 항의했다. 난 "이것은 한국의 축제스타일이다. 또 미션스쿨인데 이 정도는 이해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조금도 지지 않았다. 화가 난 그들은 내게 "내일 또 이 집회를 열면 가만두지 않겠다. 천막을 모두 불태워 버릴 것"이라고 경고한 뒤 사라졌다.
내게 협조적이던 유지들도 이들의 거센 반격에 꼬리를 내리고 사라졌다. 그나마 물리적 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단기팀의 중보기도 덕분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날도 집회를 강행했다. 주민과 지도자들은 오지 않고 불량배들만 모여 있었다 설교가 시작되자 이들은 난동을 피웠다. 집회는 또 무산됐고 마지막 날인 3일째도 마찬가지였다.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한 전도집회여서 선교팀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들은 "이슬람권 선교의 어려움을 알게 됐다"며 나를 오히려 격려해 주고 떠났다. 이 일로 나는 사역에 힘이 쭉 빠졌다. 이슬람권 선교는 정말 안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슬럼프에 빠져 있던 나를 일으켜 준 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음성이었다. 기도 중에 주님이 "이곳을 잡고 있는 악한 영들이 너희의 기도로 다 무너졌다. 이제 이 지역 영권이 네게 있으니 자신감을 갖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이 성령의 음성은 내 몸과 두 손에 힘이 불끈 솟게 했다. 처져 있던 어깨가 다시 반듯이 올라갔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10) 전도집회 방해하던 폭력배, 회심 후 35명 전도
전과 화려하던 누리, 세례 받고 새사람… 하나님 섭리 깨닫고 전도 사역 더 힘써
우기 때에는 배를 타고 전도나 심방을 가야 한다. 한 학생의 집을 찾아가는 박천록 선교사.주민들과의 마찰로 전도집회가 중단돼 움츠려 있을 줄 알았던 내가 더 열심히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 동네 이슬람 지도자들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주님이 주신 약속을 붙잡았기에 담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슬람 신도들은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전도하는 것은 방해하면서 자녀들을 우리 학교에 보내고, 아프기만 하면 나를 찾아와 약을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가난한 이들은 약국이나 병원에 갈 처지가 안 되었고 내가 주는 진통제 몇 알과 소화제, 연고 등 상비약으로도 쉽게 치료가 되었다. 나는 마을의 의사 아닌 의사였다.
하루는 약을 달라고 온 사람이 전도집회 설교 때 중간에 일어나 큰 소리치며 소동을 일으킨 사람이었다. '누리'라는 이름을 가진 그에게 내가 어떻게 왔느냐고 묻자 "배가 아파서 왔다"고 했다. 그는 내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것으로 알았지만 당시 집회중단 충격이 커서 그의 얼굴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자, 약 여기 있소. 약은 드리지만 배 아픈 것은 낫지 않을 거요. 그 이유는 당신이 지난번 행사를 망쳐 버렸기 때문입니다. 회개를 해야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실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영권을 주셨다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정말 그는 낫지 않아 계속 나를 찾아왔고 "예수 믿고 회개해야 한다"는 말을 처음엔 믿지 않다 계속 병이 낫지 않자 결국 백기를 들고 예수를 믿겠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세례를 주기로 했고 사람들이 안보는 밤 시간을 틈타 강물에서 세례식을 거행했다. 그 역시 자신이 세례받은 것을 절대 알리지 말아 달라고 신신당부했고 나도 그 약속을 지켜 주었다.
참 감개무량했다. 이 마을에서 학교와 교회를 시작해 예배를 드린 지 3년 6개월 만에 첫 세례자가 나온 것이다. 교회 나온 지 오래되고 열심인 성도들도 세례를 꺼리는데 누리라는 이 친구는 배짱이 있다고 판단됐다. 나는 그를 교회 지도자로 키우겠다는 생각에 매일 아침 10시부터 일대일 성경공부를 하기로 했다. 그가 직장에 나가 한 달에 2500다카(5만원)를 버는데 내가 성경공부를 매일 2시간만 하면 3000다카(6만원)를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대신 하루라도 빠지면 돈을 주지 않기로 약속했다.
머리가 명석하고 두뇌회전이 빠른 누리 형제는 내가 가르치는 성경공부 내용을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 빨아들였다. 더구나 말주변이 대단해 가르친 것을 설교로 시켜보니 나보다 몇 배 나은 것 같았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지난번 집회를 망친 자를 회심케 해서 교회의 일꾼으로 삼아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누리는 수단이 좋은 것인지 믿음이 좋은 것인지 정말 전도를 척척 해내 주민들을 교회로 데려왔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전과가 화려한 폭력배로 동네에서 소문이 아주 안 좋은 자였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슬슬 피하는 정도였는데 이렇게 예수 믿고 딴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세례를 받고 연말까지 무려 35명을 전도했다.
나는 여기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보았다. 전도집회를 망쳐버렸던 자를 들어 전도자로 세우는 이 일은 인간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나를 향해 힘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한국에서 많은 인원을 오게 하고 정성을 다해 전도집회를 열었지만 한 영혼도 구원받지 못하고 실패한 행사가 되고 말았다.
반면 주님이 허락하시니 단 한 명만 움직였는데도 35명이 교회에 나오는 역사가 일어남을 보여주신 것이다. 바로 이렇게 방글라데시 선교를 하라고 말이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11) "빵으로 무슬림 꾀어내" 음해에도 교회 꾸준히 성장
"2만명 개종시켰다더라" 유언비어 돌자 "2만명 전도하게 하소서" 목표 삼고 기도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교회에서 오븐으로 만든 빵을 받고 기뻐하고 있다.하나님께서 내게 능력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을 믿고 전도에 힘쓴 결과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엄청나게 몰려왔다. 물론 우리학교 학생들도 일부 주일학교에 나왔지만 갑자기 어린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 매주일 400여명이 모였다.
아이들의 영은 맑고 순수하다. 그래서 주일학교에서 가르치는 찬양과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며 모두 즐거워했다. 매주일 아침, 부모들은 자녀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교회에 가지 못하게 했고 아이들은 가겠다고 했다.
또 교회에서 찬양이 크게 울려퍼지니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일부 주민들은 주일아침 골목을 지키며 아이들이 교회에 가는 것을 막기도 했다.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직접 만든 빵을 하나씩 주었는데 "어린이들을 빵으로 꾀어내 개종시키려 한다"는 소문을 퍼트리기도 했다.
아이 때문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이 지역 주민들에게 교회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흠씬 두들겨 맞는 것이 다반사였다. 악성 피부병으로 고생하다 교회에서 고침을 받고 개종을 했던 '롯나'라는 여성은 예배 중에 성령을 체험하고 든든한 교회 일꾼이 되었다.
하루는 이 부부가 온몸이 멍투성이가 되어 교회에 왔다. 개종 사실이 알려져 친척과 이웃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는 것이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받는 이들이 너무 불쌍해 격려도 해줄 겸 주중에 롯나의 집에 심방을 갔다.
단칸 오두막집에 4명의 가족이 침대도 없이 깔개 하나만 펴놓고 축축한 맨 바닥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피부병이 걸리는 것이 당연하다 싶었다. 남편은 무직자라 수입이 없으니 하루 한 끼도 잘 못 먹는다고 했다.
나는 한국 돈으로 5000원 정도하는 간이침대를 사서 들여 주고 남편에게 7만원 정도하는 중고 닉샤(인력거)를 한 대 사주었다. 동네에서 찢어지게 가난했던 롯나가 예수 믿고 환경이 확 달라지는 것을 보며 사람들이 교회 나오는 것에 대한 인식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사랑하고 베푸는 종교인 기독교가 자신들의 삶을 바꾸어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저런 상황 속에 교회성도는 점점 늘어났고 지역민의 반대 속에서도 교회는 굳건히 지켜졌다. 하나님께서 내게 힘을 주시고 영권을 주신 결과였다. 누가와도 움츠리지 않고 당당히 맞서면 주님이 지켜주시는 내가 항상 승리했다.
한번은 지역구의 의장이라는 사람이 이슬람권 대표들과 의기양양하게 학교 사무실로 들어왔다. 구의장은 한껏 무게를 잡으며 학교운영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어보더니 왜 학교만 하지 교회를 열어 어린이들과 주민들을 개종시키느냐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학교는 놔두고 교회는 문을 닫으라고 명령하듯 지시했다.
"좋습니다. 구의장께서 그러시면 교회 문을 닫겠는데 학교도 같이 닫아야 합니다. 이곳 운영비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보내오는데 학교만 운영하도록 후원하지 않습니다."
학교 문을 닫으면 300명의 어린이가 갈 곳이 없게 되고 자칫 원망을 듣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구의장은 무슬림을 개종시키지 말라는 말만 반복하다 돌아갔다. 이렇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우리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이슬람 지도자들은 엉뚱한 유언비어를 만들어 냈다. 내가 몰라떽교회를 통해 무슬림 2만명을 개종시켰다고 소문을 낸 것이다.
거짓소문이지만 난 이것을 역으로 하나님이 내게 최소 2만명은 전도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이 때부터 나는 "주님. 방글라데시에서 2만명을 전도하게 해 주옵소서"라고 기도의 포문을 열었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12) "전도 훼방하던 폭력배들, 나에 대해 암살 시도"
학부형 신고로 17명 현장서 체포… 권총과 도끼, 칼 3자루 압수
몰라떽교회 추수감사주일 예배에서 설교하는 박천록 선교사.교회와 지역 내 이슬람 지도자들과의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교회 성도가 점점 늘어날수록 핍박의 강도가 높아졌다. 그들은 사사건건 발목을 잡고 문제가 생기면 돈을 요구했다. 특히 할 일 없는 불량배들이 교회 주위를 맴돌며 고통을 주었다. 나는 이 사건을 악한 영과의 싸움으로 생각하고 매일 대적기도를 드리며 교회를 훼방하는 세력들을 물리쳐 달라고 뜨겁게 기도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에 몇 백명의 방글라데시 군인들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길에서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이들을 무조건 잡아가기 시작했다. 정부가 사회정화 차원에서 폭력배들을 데려가 엄청난 기합을 주고 정신개조를 시켜 내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이것이 하나님의 기도응답임을 알 수 있었다. 동네엔 할 일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고, 그동안 우리를 괴롭히던 이들은 잡혀갈까봐 두려워했다. 혹시 우리가 자신들을 신고할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일부는 나를 찾아와 자신들이 개종자들을 때리지 않았다고 말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난 성도들에게 큰소리를 쳤다.
"이것 보십시오. 우리가 손을 안 대고 기도만 해도 하나님이 움직이시며 눈엣가시들을 혼내주시잖아요. 주님의 역사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두려워 말고 전도에 최선을 다합시다."
이 사건은 그동안 움츠려 있던 성도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이들도 이제 자신이 기독교인임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교회가 어려움을 이겨내고 계속 성장하는 가운데 나를 향한 암살계획이 시도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리 발각되도록 해주셔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슬람 청년 17명이 작당한 나의 암살계획은 이랬다. 이들이 우리 교회 성도 한 명을 매수했다. 그 성도는 한밤중에 전화로 "시골에 다녀오다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으니 와 달라"고 했다. 내가 병원을 가기 위해 으슥한 골목길을 지날 때 칼로 나를 찌르고 도망가려는 시나리오를 짜둔 상태였다.
이들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현장에서 쓸 큰 칼을 한 시람의 집에 맡기려 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우리 학교 학부형이었다. 이들이 그에게 칼을 사용할 용도를 말해주는 바람에 학부형이 경찰에 신고를 해 버린 것이다.
이 정보를 받은 경찰은 사건이 일어날 시간까지 기다렸다 작당한 17명을 현장에서 붙잡았다. 이 사건은 지역에서도 큰 뉴스가 되었다. 증거물로 권총과 도끼, 칼 3자루가 압수됐다고 한다. 난 등골이 서늘했다. 그 칼을 학부모집에 맡겨 암살계획이 무위로 돌아간 것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어떤 상황이 되었을지 모른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더욱 힘을 다해 복음전파에 나섰다.
교회에 나오는 개종자가 드디어 150여명이 되었고 어린이는 그 사이 더 늘어 600여명이 모였다. 주일엔 학교 전체가 사람들과 아이들로 복작거렸다. 나는 이 열기를 모아 다시 한번 전도집회를 열어 보기로 했다. 한번 실패했던 전도집회를 다시 만회하고 싶었다. 성도들은 여전히 반대했지만 우선 100일 작정기도로 준비했다.
"주님 이슬람이 대부분인 이곳 몰라떽이 복음의 전진기지가 되게 하옵소서. 다시 한번 전도집회를 열어 주민 3000명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기도 결과 미국 LA한인교회에서 35명의 지원선교팀이 오기로 했고 이번에는 우리 학교 학생들도 찬양과 연극을 준비했다. 부모들이 아이들의 재롱을 보고 마음이 누그러지길 바랐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13) 마을 전도집회 3일간 6500명 참석 '영적 바람'
무슬림, 헛소문으로 교회 음해 계속… 학교에 폭탄 테러·사역자 공격까지
수많은 어린이와 지역주민이 참여해 성공적으로 치러진 몰라떽교회의 전도집회. 교회부흥의 큰 계기가 되었다.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준비한 마을 전도집회는 준비기도로 영적무장을 한 탓인지 지역사회에 엄청난 영적 바람을 일으켰다.
미국에서 온 35명의 성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오전엔 어린이 집회, 오후엔 장년 집회를 열었다. 마을 중앙 공터에 대형 천막을 치고 집회를 열었는데 어린이 집회엔 2500여명, 장년 집회엔 4000여명이 모이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기도할 때 병자가 치유되고 회개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마을을 흔들어 놓았다. 하나님께서 이 마을에 영권을 부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실현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3일간 수많은 무슬림에게 예수를 소개했다. 마지막 날에는 '예수'란 영화를 상영하기도 했다.
이번 집회에는 무슬림의 공격이나 방해도 없었다. 자극하지 않으려고 유의도 했지만 군부대가 주도한 불량배 소탕작전의 여파가 큰 듯했다. 이렇게 전도집회를 은혜롭게 잘 끝내고 나니 교회부흥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고 변화된 이들이 성도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 마을에서만큼은 교회에 나가는 것을 숨기지 않는 분위기가 됐다.
그러나 이슬람 지도자들은 이 모습을 주시하며 조용히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교회에 대한 헛소문을 지어내는 것으로 시작됐다. 예배 중에 갖는 성찬식을 보고 성도들에게 돼지피를 마시게 한다고 하거나 코란을 밟고 저주를 하게 한 다음에 세례를 준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또 저녁에 철야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몰라떽교회는 밤마다 남녀가 모여 혼음을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냈다.
소문은 점점 퍼져 나갔고 이로 인해 교회가 받는 핍박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성도들이 친척과 주민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가는 일들이 또 일어났다. 언제까지 같은 일이 반복돼야 하는지 "오! 주여!"를 외치지만 해결책은 없었다.
학교운영비 조달이 안 되면 난 미국을 방문해 교회순방을 하며 후원을 받았다. 여러 차례 와 준 미국 교포 선교팀이 우리 사역의 중요성을 보고 소문을 내주어 교포교회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LA교회를 순회하고 있을 때였다. 방글라데시에 있는 아내에게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는데 교회에 폭탄이 터졌다고 했다.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며 학생들이 얼마나 다쳤을지가 제일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 학교 건물이 아니라 화장실 옥상에 폭탄이 떨어져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동시에 교회 사역자들이 마을 청년들의 공격을 받아 크게 다치고 성도들도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아내는 모금을 중단하고 무조건 들어오라고 했다. 아내는 혼자 무서워 너무 힘들다며 거의 울먹였다.
서둘러 돌아와 보니 학교는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학교를 무장경찰이 지키고 있었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총선이 끝나 정권이 바뀌어 어수선했는데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이곳저곳에서 테러를 자행하고 있었다. 우리 학교도 여기에 타깃이 된 것 같았다. 이들은 3일 내로 학교와 교회 문을 닫지 않으면 2차 테러를 감행, 사람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모두들 학교와 교회 문을 닫자고 했지만 우리는 금식하며 하나님의 인도를 간구했다. 그런데 금식 3일째 되던 날 테러범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학교와 교회가 우리 방글라데시 빈민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더 이상 테러는 안 할 테니 대신 이슬람 신자들을 개종시키는 일은 그만두시오."
우리는 이 전화가 기도의 응답이라 확신하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교회와 학교 문을 다시 활짝 열었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14) 대통령과 악수 모습 TV 방송 뒤 동네가 발칵
학교 테러 후 교사 사직·학생들 줄어… 방송 이후 주민들 다시 관심 몰려
선교비 모금을 위해 미국에 갔다가 찍은 사진. 집사님 한 분이 여행을 시켜 주셨는데 여기서 만난 분의 교회에서 2만5000달러를 모았다.방글라데시 몰라떽 마을에서의 사역은 영적전쟁의 연속이었다. 좀 조용하게 사역한다 싶으면 새로운 문제가 불거져 기도로 부르짖어야 했다. 악한 영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교회가 훼파되길 바라며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학교에 폭탄이 떨어진 테러사건은 교사와 직원, 학생들까지 공포로 몰아 넣어 학생도 줄고 사표를 쓴 교직원도 많았다. 생명까지 걸고 일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은 당연했다.
"주님. 폭탄테러는 너무나 충격이 큽니다. 숱한 고생으로 이제 학교와 교회를 키워 놓았는데 한 순간에 허물어졌습니다. 회복할 길을 알려주세요."
기도하는 중에 편지가 한통이 날아 왔다. 방글라데시 대통령궁에서 온 편지였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대통령궁에서 지도자들을 초청해 오찬을 하는데 참석해 달라는 통보였다. 내가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부분이 알려져 초청인사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날은 교회도 행사가 많아 갈 수 없다고 전하려는데 직원들은 한사코 가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브라더가 대통령과 친한 사람이라는 것을 동네 무슬림들이 알고 괴롭히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결국 대통령궁으로 가기로 하고 정장을 차려 입어야 하는데 지난번 미국방문에서 L집사가 사준 양복이 생각났다. 난 선교지에서 양복을 입지 않으니 대신 선교비를 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했는데 부득불 L집사는 "하나님이 양복을 해주라고 했다"며 고집을 꺽지 않았다.
그때 최고급 이태리제 양복에 셔츠와 넥타이까지 한꺼번에 선물 받으면서 속이 쓰렸던 나였다. 이 돈이면 애들 몇달치 점심값인데 하고 속으로 애를 태웠는데 이때 입으라고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주신 것이 분명했다.
오찬 날, 멋있게 양복을 빼입은 나는 대통령궁으로 향했다. 막상 가보니 각계 종교지도자 70여명이 오찬을 하는 자리였다. 이날 내 양복과 넥타이가 최고급이라 그런지 참석자 중에서 가장 돋보였다. 대통령과 일일이 악수를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내가 악수할 때 TV카메라맨이 더 열심히 찍는 것 같았다.
그날 저녁,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거의 다 보는 국영방송 7시 뉴스시간에 나와 대통령이 힘차게 악수하는 모습이 방영됐다. 그리고 이 모습은 밤 8시 뉴스, 10시뉴스까지 계속 나와 안 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가난한 촌동네인 우리 몰라떽이 발칵 뒤집어졌다. 브라더가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악수하는 모습은 이곳 주민들이 보기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브라더가 대통령을 만날 정도로 유명하고 대단한 사람인지 몰랐다며 어쩔줄 몰라했다.
대통령과 악수한 TV방영 이후 말 그대로 전세가 확 바뀌었다. 도망갔던 직원이 돌아오고 안나오던 학생들도 다시 등교했다. 성도들도 "우리 브라더 TV뉴스 나온 것 봤냐?"며 기세등등하게 동네를 돌아다녔다. 하나님이 폭탄테러 이후 낙망에 빠진 우리의 안타까운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 것이 분명했다.
나중에 미국에 가서 L집사님을 만나 양복간증을 하며 감사를 표시했다. 그런데 그 사이 L집사님은 사업이 더욱 번창해져 있었다. 하나님 앞에 올려 드린 것에 결코 그냥은 없다는 것이 내 오랜 사역의 결론이다.
나는 이번 역전극을 그냥 넘기고 싶지 않았다. 또 다시 전도집회를 계획했다. 이번에는 '밀레니엄 페스티벌'이란 이름을 걸고 매일 5000명이 모이는 전도집회를 갖게 해달라고 100일 작정기도를 시작했다. 호기를 잡았을 때 또 한번 영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15) 전도집회 성공 후 개종 잇따르자 정부서 압력
'밀레니엄 페스티벌' 수천명 참석… 이슬람 지도자들 투서로 추방 당해
전도집회 후 박천록 선교사(맨 뒷줄 가운데)가 현지 사역자들과 함께 개종자들에게 침례를 베풀고 있다.'밀레니엄 페스티벌'이란 이름을 붙인 전도 집회에 LA 단기선교팀이 와주셨다. 이번엔 내과 외과 소아과 한방 등으로 나누어 의료봉사를 펼쳤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3일간 집회 중 오전 어린이 집회엔 매일 3000여명이 모였고, 저녁 어른 집회에는 5000여명이 모이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몰라떽 학생과 청장년 100여명이 찬양단을 구성해 부른 '부흥'이란 찬양은 참석자 모두에게 큰 은혜를 선사했다. 신유의 기적이 일어나고 결신자가 수없이 나와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가 몰라떽에 부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해외선교를 많이 다닌 LA 단기선교팀의 K집사님이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박 선교사님. 이것은 기적입니다. 제가 해외선교 다녀보니 가장 힘든 곳이 이슬람권입니다. 보통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2∼3년이 지나야 친구가 되어 은밀하게 복음을 전해 신앙인으로 만드는데 여긴 한꺼번에 5000여명을 모이게 해 복음을 전하고 '예수' 영화도 상영하다니요.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오랫동안 눈물과 고통, 시련을 이겨내 얻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암살 위기와 폭탄이 터지는 어려움을 기도로 이겨냈어요. 이는 영적싸움에서 승리한 결과입니다."
밀레니엄 페스티벌의 성공은 방글라데시 곳곳에서 사역하고 있는 기독교 목회자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었다. 그들은 이슬람성도가 90%인 나라에서 조심스럽게 숨죽이며 사역을 해왔다. 그런데 몰라떽교회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한 후 자신들도 겁내지 말고 복음을 전하자고 다짐했다는 것이다.
3일간의 대집회를 끝내고 선교팀은 미국으로 돌아갔고 몰라떽교회는 성령의 불길이 훨훨 타올랐다. 길에서 성도나 어린이들을 만나면 서로 "할렐루야!"를 외치며 인사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움츠렸던 교회가 활기를 찾고 개종자들이 더 이상 주변의 공격이나 왕따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여세를 몰아 전도를 더 거세게 해 나갔고 이 때문에 개종자가 점점 늘어났다. 이 사이 이슬람 지도자들은 조용히 우리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어떤 방법도 안 통하자 이번에 지역유지와 동네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진정서를 만들어 정보부와 대통령궁 등 정부부처에 보내는 일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정보부에서 호출이 왔다. 관계자는 내게 바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브라더가 맞으시죠. 당신에 대한 고소장과 진정서가 얼마나 많이 오는 줄 아세요? 종교 활동을 하시려거든 조용히 하시지 왜 그렇게 요란하게 하나요. 이번에는 그냥 넘어 가지만 또 개종시킨다는 진정이 들어오면 그 땐 어쩔 수 없으니 각오하세요."
그러나 전도는 절제한다고 절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복음을 영접하면 성령이 충만해져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된다. 우리 교회 성도들 중 이미 이런 '은혜파'가 많은데 내가 말린다고 되는 부분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는 방글라데시에 온 이후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무식하리만치 공격적인 선교를 펼쳤다. 그런데 9년여 동안 나의 이런 선교가 갖은 위협과 위험 속에서 지탱되어 왔는데 한계점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방글라데시 사역 9년이 넘어선 2003년 8월 11일, 현지 정보부에 바로 체포돼 강제로 추방되었다. 죄목은 '주민들을 강제로 개종시켰다'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이 추방작전은 나의 완강한 저항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몰라떽을 관장하는 경찰서에서 내 추방을 합법화하기 위해 함께 사역하던 14명도 함께 경찰에 고발했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16) 사역자들 "자발적 개종" 증언으로 재판서 '무죄'
추방 기간 회개의 기도로 재충전… 재입국 뒤 주변까지 전도 범위 확대
미국에서 보내온 구제용 쌀을 나누는 사모 이정숙 선교사와 기뻐하는 아이들.강제 연행된 뒤 여권도 없이 말레이시아로 추방된 나는 말레이시아 한국대사관으로부터 임시 여권을 받아 한국으로 들어왔다. 맥이 빠진 나는 하나님께 원망의 기도를 드렸다.
"주님, 제가 방글라데시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선교를 했는데 저를 왜 이렇게 만드셨나요. 다시 돌아갈 길을 열어 주세요."
한국서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추방당한 나를 반겨줄 안식처가 한 곳도 없는 것이 서글펐다. 아는 교회 선교관에 며칠 머물다 양평의 한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금식하며 깊이 기도하는데 그동안 선교를 한답시고 현지에서 다듬어지지 않은 모습을 보인 나의 여러 부분들이 기억나 회개의 눈물을 흘렸다. 현지인을 무시하고 상처를 주기도 했고 혈기를 참지 못한 적도 많았다. 깊은 회개 가운데 주님이 "내가 너와 함께한다. 내가 너를 지킨다"는 응답을 주셔서 일주일 만에 기도원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이후 은혜의 섭리로 희망적인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 교회 스태프 14명이 법정에 서서 "브러더가 자신들을 강제로 개종시켰다"고 말만 하면 자신들은 풀려나고 내 죄가 인정돼 추방을 합법화되는 것이 일의 순서였다. 그런데 우리 스태프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고 "우리는 자발적으로 개종했지 브러더가 강제로 개종하라고 하지 않았다"고 일관되게 주장해 주었다.
이 때문에 재판이 2년여 동안 지루하게 이어졌지만 결국 우리가 이기고 나도 무죄가 되어 재입국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할렐루야!
다행히 아내는 추방되지 않았기 때문에 방글라데시 학교와 교회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아내는 운영비 마련과 함께 모든 결정을 혼자 내려야 해 무척 힘들어했다.
사역자들과 성도들, 주민들과 나는 2년 만에 재회를 한 뒤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었다. 2년여 한국에서 안식하며 재정비의 시간을 가진 나는 이제 새로운 마음의 자세로 방글라데시 선교에 임하기로 했다. 이곳에서 너무 적극적인 선교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 있기에 신중하게 하기로 했다. 대신 몰라떽이 아닌 다른 곳으로도 전도의 범위를 넓혔다.
교회와 떨어진 '통기'란 지역에서 오는 성도들이 너무 멀어 교회 건립을 계속 요청했었다. 나는 중심부 한 허름한 건물을 임차해 수리를 끝내고 초등학교부터 개교했다. 어린이들이 몰려왔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문도 열었다. 이곳 아이들에게도 책과 공책, 교복을 제공하고 점심급식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면서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또 한바탕 영적 전쟁이 시작될 것을 예상하고 성도들과 기도에 집중했다.
아니나 다를까 무슬림들의 항의와 공격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 이미 몰라떽에서 전투(?)경험이 많은 사역자들을 통기로 발령을 냈기에 웬만한 공격은 쉽게 이겨낼 수 있었다.
통기교회가 개척되고 나니 이번엔 도킨칸 지역도 교회를 세워 달라고 요청했다. 이곳 성도들이 열심히 기도한 결과 도킨칸에도 십자가를 단 교회가 시작됐고 이 여세를 몰아 나의 오랜 기도제목이었던 평강양로원이 문을 열었다.
갈 곳 없는 병든 무의탁 노인들은 거리에서 구걸하다 굶어 죽는 분들이 많아 이분들을 모아 양로원을 열었으면 했는데 독지가가 나타난 것이다. 양로원에 온 노인들은 세 끼 걱정 안하고 편안한 잠자리가 제공되니 "이렇게 행복하게 살아본 적이 없다"며 쉽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천국에 가셨다.
복음은 사랑이다. 왜 저 사람들이 못사는 나라, 그중에서도 이런 촌동네에 와서 학교를 세우고 우리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가? 그 이유를 따져들게 만들다 보면 그 속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몸으로 전하는 복음이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17) 16년간 1만여명 전도했지만 두 번째 추방 '시련'
한국 돌아와 간증집 집필 기회로 수익금 모두 방글라 선교에 사용
미국 스티브김 재단 지원으로 세운 암박 미션스쿨과 직접 쓴 간증집 '사명의 표지'방글라데시 선교 16년을 맞은 2007년, 그동안 몰라떽교회를 중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성도가 1만명은 될 것 같았다. 여건상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이도 많지만 몰라떽교회가 방글라데시 선교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만은 확실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다.
학교도 계속 발전을 거듭해 몰라떽의 경우 고등학교 과정까지 만들었다. 무상교육이라 예산이 많이 들지만 사회가 필요로 하는 유능한 인재를 많이 배출해 미션스쿨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신앙으로 무장된 이곳 출신 학생들이 방글라데시가 필요로 하는 목사, 변호사, 의사, 교사 등 인재들이 계속 배출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방글라데시 복지법인을 갖고 있어 1년마다 체류 연장을 받았다. 만기가 되어 관청에 갔더니 한국의 대사관에서 받으라고 했다. 그래서 한국으로 나왔는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에게 비자를 주지 말라는 정부의 특별지시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1급 비밀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1차에 이은 두 번째 추방이었다. 첫 추방 때 내가 워낙 강하게 항의하고 안 나가려 했더니 이번엔 꾀를 낸 것이다. 나의 죄명은 "교회를 세워 현지인을 강제로 개종케 했다"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이슬람이 90%인 사회에서 기독교 선교가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나마 이번에도 아내는 제외돼 학교는 계속 운영할 수 있었다. 안식년이라 생각하고 고향 포항으로 내려갔다.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너의 16년 방글라데시 사역을 글로 쓰라"는 미션을 주셨다.
공부도 많이 못했고 문장력도 없지만 시간이 남으니 간증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가물가물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은 선교일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2년여 산고 끝에 나의 간증집 '사명'이 발간됐다.
많은 분이 이 간증집을 읽고 은혜를 받고 기도로 응원해주고 후원에 참여해 주었다. 420쪽이 넘는 이 간증집은 소설처럼 구성돼 은혜롭게 읽은 분들이 전도용으로 더 구입해 주셨다. '역경의 열매' 연재에 나온 이번 간증은 책의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책의 수익금은 모두 방글라데시 선교에 사용하고 있는데 한 권(1만4000원)의 수익금이 한 학생의 한 달 점심값이 된다. 내가 대표로 있는 러브방글라데시미션(LBM·02-596-4005)에서 출간했고 주문도 받고 있다. 하나님이 문서선교도 하고 운영비도 마련하라고 글을 쓰게 하신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 책 '사명'을 읽고 감동 받은 분들이 지원을 하여 약 8년 동안 방글라데시에 교회 7개, 미션스쿨 7개를 세울 수 있었다. 책을 쓰게 하신 것이 선교엔 더 효과적이었다.
현재 아내는 3000여명이 공부하고 있는 9개 미션스쿨을 관리한다. 내가 두 번이나 추방당해도 이곳 선교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방글라데시 100년 선교 비전'이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선교는 단기 전략으로는 불가능하다. 최소한 50년, 100년 앞을 내다보고 장기 전략을 세워야 한다. 그래서 앞으로 빈민가 어린이들을 위한 미션스쿨 100개와 교회 100개, 기독교 대학교, 병원, 고아원 등을 세워 기독교 신앙과 정신을 가진 인재 양성을 하고 복음을 전함으로 100년 후 방글라데시 30% 복음화를 이루려는 꿈을 갖고 있다.
여전히 교회를 향한 현지인들의 핍박은 계속되고 있다. 2014년 암박지역에 교회가 세워질 때 지역 무슬림들이 들고 일어나 교회와 학교 건물을 부수고 성경책들을 모아 불지르고 목사 가족들을 칼로 찔러 크게 다친 적도 있다. 이처럼 사역은 여전히 힘들고 어렵다.
***[역경의 열매] 박천록 (18·끝) '전도의 황금어장' 재정부족으로 무슬림 못 낚아
美재단 지원 끊겨 3000명 급식 중단… 현지 아동 1 대 1 결연 등 후원 절실
박천록 이정숙 선교사 부부가 20년 전 방글라데시 선교사 파송에 앞서 찍은 사진. 이들은 이 사진을 보며 사명을 재다짐하곤 한다.무슬림들은 학교와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전도가 시작되면 전쟁을 방불케 하는 훼방과 핍박을 시작했다. 그때마다 이슬람교도들에게 제일 많이 당하는 사람은 방글라데시 사역자들이었다. 가족과 친척에게 배척받는 것은 당연했다.
아내가 목뼈가 늘 아프다고 해 한국에 와 병원에 갔는데 희귀병인 '후종인대 골화'와 목 디스크 말기라 했다. 목의 인대가 서서히 굳어 져 뼈처럼 되는 병인데 방치하면 온몸을 마비시키는 무서운 병이라고 했다.
일주일 후 수술날짜를 잡았는데, 오산리 금식기도원을 먼저 찾았다. 아내는 금식 이틀째 통성기도 시간에 "목을 좀 보자"란 음성이 들리며 큰 손이 나타나 목을 어루만지는 것을 체험했다고 했다. 5일 금식을 마치고 내려온 아픈 아내에게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주셨으니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사역하면 당신에게 건강을 주실 것"이라고 믿음으로 선포했다.
이후 아내는 선포대로 점점 더 건강해졌고 현지에서 큰 프로젝트를 이끌면서 산전수전 다 겪는 사이에 배포 큰 여장부가 되었다. 누구보다 겁이 많고 세상물정도 모르고 몸도 약했던 아내는 내가 선교지에 못 들어가는 동안 거친 풍파 속에서 엄청나게 강해진 것이다.
현재 우리는 방글라데시에서 9개의 학교와 교회를 운영한다. 매달 드는 비용은 최소한 3500여만원이다. 물론 학교와 교회 설립 시 도움을 준 교회와 기관, 개인들이 일부 도움을 주고 있지만 운영비는 언제나 모자라 마음을 졸이게 된다. 언제 운영비 걱정 안하고 살날이 올지 모르겠다.
최근에는 환경이 더욱 어려워졌다. 그동안 미국의 구호재단이 사역비 감당을 많이 해 주었는데 갑자기 중단되었다. 시급한 것은 미션스쿨 학생들 3000여명에게 주던 점심급식 빵이 중단된 것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또 아슐리아에 건축 중이던 미션스쿨과 교회건축 공사도 사역비의 어려움 때문에 중단되었다. 부족한 1500만원 건축공사비 문제가 해결되도록 기도를 부탁드린다.
그래서 나는 NGO 단체처럼 학생과 성도 한 명을 후원자로 묶어주는 '일대일 결연 운동'을 펼치고 있다. 한 학생이 마음 놓고 공부하는 데 한 달간 드는 비용이 3만5000원 정도이다. 이는 학용품, 옷, 교사월급, 점심값 등을 모두 포함한 액수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지원하는 것으로 현재 3000명 중 450명이 결연돼 있다. 이 중 '본죽' 최복이 사장님께서 무려 300명을 결연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린다.
이 글을 읽는 국민일보 독자 여러분도 기도 가운데 방글라데시 어린이를 기독교 신앙으로 공부시키고 양육하는 데 1명씩만 맡아 후원해 주시길 간절히 부탁드린다. 결연 방법은 우리 러브방글라데시미션(02-596-4005·lbmission.net)으로 연락주시면 된다.
세계 인구밀도가 1위인 빈민국 방글라데시. 역으로 생각하면 전도의 황금어장이다. 이슬람선교 20년의 노하우는 현지에 잘 훈련된 사역자들이 있어서 재정 지원만 가능하면 미션스쿨과 교회를 세울 수 있다. 2년만 지나면 이슬람 어린이들이 주일학교에 300명 이상 출석하고 어른들도 10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할 수 있다.
난 2차 추방 이후 한국의 후방지원부대가 되어 방글라데시 선교사역비 마련에 매진하고 있다. 빠른 시일 내 하나님께서 재입국의 기회를 주실 것이라 믿으며 기도하고 있다. 오늘도 변함없이 각자의 사역지에서 수고하는 현지 사역자들에게 주님께서 성령과 능력을 가득 부어 주셔서 영혼구원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드린다.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 독자들에게도 감사를 전한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