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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 / 伝道のために出て来られたイエス様。 ( 2024년 2월 18일 주일예배)
본문; 마가복음 1:35-39
막 1:35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36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37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8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39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35. 朝早くまだ暗いうちに、イエスは起きて、人里離れた所へ出て行き、そこで祈っておられた。36. シモンとその仲間はイエスの後を追い、37. 見つけると、「みんなが捜しています」と言った。38. イエスは言われた。「近くのほかの町や村へ行こう。そこでも、わたしは宣教する。そのためにわたしは出て来たのである。」 39. そして、ガリラヤ中の会堂に行き、宣教し、悪霊を追い出された。
지난 주일까지 두 주간에 걸쳐 영적전쟁의 필승전략 일곱 가지에 대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이미 사탄은 패배하였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이 결정된 운명이라는 것이지요. 일곱가지의 전략을 말씀드렸지만, 실은 그 모든 전략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순종할 가장 근본적인 전략은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임재하고 계신 주님과 동행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이 이미 승리한 영적전쟁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일상의 복을 마음껏 누리실 수 있기를 다시금 축복합니다.
오늘부터 전도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데요. 많은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퍽이나 부담스러워 하는 것이 전도하는 일입니다. 자신도 누군가의 전도를 듣고 교회로 인도함을 받아서 구원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도 ‘전도’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의 할 일이 아니라고 여기거나, 혹은 자신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기에 부담스럽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교인들이 이렇게 전도를 어려워하거나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전도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는 전도와 관련된 좋지 않은 경험이나 기억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누군가의 전도와 인도함으로 인해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또한 구원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전해지고 구원의 소식이 확장되는 것은 이미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바입니다.
...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롬 10:14b-15)
그리고 전도하는 사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처음부터, 즐거워하시며 사용하셨던 방법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1)
이렇게 전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일에 사용하신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그 어떤 모습이나 방법도 모두 전도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오해를 받고 심지어 괴로움을 당하면서까지도 기뻐하며 복음전도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있지요.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빌 1:17-18)
그렇다면 과연 전도다운 전도, 성경이 말씀하시는 전도란 무엇일까요?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전도는 기업의 홍보나 혹은 종교단체의 포교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도를 당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다를 바가 없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가 영업사원이 물건을 팔기 위해서 이런저런 마케팅 방법을 활용하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지요. 일종의 홍보나 판촉을 하는 것으로 아는 오해인 것이지요.
그래서 만일에 전도가 기독교라는 종교를 홍보하는 것, 혹은 영업사원의 판촉활동과 같은 것이라면 전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재능과 실력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또한 전도를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며 포교하는 것으로만 알게 된다면, 수려한 언변을 갖춘 교리의 전문가들만이 상대를 설득하고 설복시키는 어렵고 힘든 과정으로 여길 수도 있지요.
하지만,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전도는 홍보나 영업사원의 마케팅, 혹은 교리 전문가의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상대를 설득하거나 굴복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전도는 말 그대로 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원어를 보면 (케뤼쏘)라고 말하는데요. 이는 선포하다, 전파하다, 외치다.. 등으로 번역이 되었구요. 특히 설교를 뜻하는 “케리그마”라는 말이 바로 이 케뤼쏘와 같은 어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전도란... 누군가를 설득하여 설복시키거나,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귀에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는 어떤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나, 혹은 재능과 실력을 갖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명을 가진 사람만 해야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복음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냥 전하고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의 반응이나, 혹은 전한 것이 잘 받아들여졌는지의 여부를 나는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나머지는 주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 사람을 내가 설득하거나, 혹은 좋은 말로 잘 포장하여 믿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거나 고민하거나 부담스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내가 전한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 들이면 그 사람에게 영생을 얻는 엄청난 복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주눅이 들거나, 위축될 필요는 없습니다. 복을 전해주는 우리의 행위를 거절하면 그 복은 다시 우리에게 채워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제가 개척 초기에 역앞에서 전도를 매일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참 많은 거절을 당하였습니다. 저도 전도에 대해서 마음과 눈이 온전히 열리지 않았을 때 사람들 앞에서 전도지를 나눠 주는 것을 무척이나 어려워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개척 초기에는 전도하는 것 밖에는 저의 사역이 없었기 때문에 매일 부지런히 아내와 함께 큰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역 앞에 나가서 전도지를 나눠주었습니다. 마음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았지요.
그러던 어느 날은 내가 들고 나가서 사람들에게 나누는 것은 전단지가 아니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게다가 이 복음지를 단지 사람들에게 배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선물하러 간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래도 복음지 선물을 거절하는 모습을 보면 물론 마음이 그다지 편하지 않았지요. 그러던 중 새벽에 전도를 위해서 기도하는데 주님께서 생각나게 하신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의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눅 10:6)
아멘. 그렇습니다. 나의 복음 전도는 교회를 홍보하는 것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사람을 붙들어 놓고 설득하는 일도 아닙니다. 내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평화)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평안을... 이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은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거절하는 사람의 몫은 다시 나의 것이 된다는 말씀으로 제 마음에 감동하여 주셨던 것이지요.
그리고 나서는 복음 전도지를 선물하다가 거절당하는 것은 곧 나에게 복이 쌓이는 것임을 깨우쳤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거절당하고 무시당하고 심지어 박해를 받으면 오히려 하늘의 상급이 크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복이 더욱 알차게 영글어 가는 것임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전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늘의 복을 주시려는 주님의 놀라운 계획인 것을 믿습니다. 영적인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복이 현실의 영역에서 눈에 드러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맡기신 능력의 사명인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란 교회만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도 듣고 받은 그 복음을 다른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전달하기 위한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이름은 바로 전도자인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전도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순조롭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걸림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걸림돌은 무엇일까요? 어떤 이들은 시대정신이 이기적이라서 전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개인주의가 팽배한 것이 전도의 걸림돌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풍족한 사회가 되어서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에 전도가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모두 다 일리있는 이야기이고 설득력있는 분석입니다. 이런 주장들이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지요. 사도 바울도 이런 시대가 올 것이라고 이미 예언한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딤후 4:3-4)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이야기들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올바른 생각을 추구하려고 하기보다 보다 경제적인 이윤을 추구하기 위해서 애를 쓰지요. 힘들지만 보람이 있고, 경건한 일상을 살며 사람답게 사는 것보다는 몸은 편하게 지내면서도 돈은 많이 벌고 재미있고 즐거운 일을 만끽하는 삶이 더 좋다고 여기며... 게으른 금수저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상식이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크게 대박을 터뜨려서 사람답게 사는 것보다 좀 고생하지 않고 살아볼까 이리저리 눈치만 살피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교인들 중에도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런 추악하고 사악한 세대에서 과연 복음에 귀를 기울일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과연 복음을 전하는 전도라는 방법은 상식적으로 볼 때 그다지 인기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무모하고 미련한 일로 보이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영적인 암흑시대가 되더라도 환경과 여건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복음을 전파하라고 디모데를 권면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2)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딤후 4:5)
특히 골로새의 교인들에게는 자신을 위해 이렇게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골 4:3)
그 위대한 전도자요 사도였던 바울에게도 복음을 전도하는 일에 방해와 걸림돌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도하는 일에 걸림돌은 외부적인 요인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이 말했던 전도할 문이란 어쩌면 주변 환경과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전도자들의 마음에 닫혀 있는 문을 열어 주시도록 기도하라는 권면이었던 것이지요.
아무리 전도하기 어려운 형편에 있더라도 전도자의 마음의 문이 언제나 전도하기로 결단하고 열려 있으면 기회는 반드시 주님께서 맡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전도와 같이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미련하게 보이는 방법으로 복음 전하기를 기뻐하셨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역사가 불같이 일어났던 교회사의 기록들을 보면, 전도자인 성도들이 구령열에 불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하려는 자가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면 전도의 길을 언제나 열리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주님께서 열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인 우리가 전도를 홍보나 설득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마음의 문을 닫거나, 혹은 전도는 특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전문적인 것이라는 착각으로 마음의 문을 닫으면 결코 전도의 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도 우리가 스스로 눈과 귀를 막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의 전도하고자 하는 마음의 문이 열려야 할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전도는 말 그대로 진정 사람답고 아름답게 살 길인 복음을 그저 담백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음에 강한 감동이 일어나면 강하게 선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복음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 안에 그런 감동이 없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 자리를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 자리를 지켜야 하겠다는 부담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지요.
전도는 해야만 한다고 누군가 강요한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전도는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요 7:38)
그런데 여기서 생수의 강이란 성령이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계십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 7:39)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살아계실 때에는 아직 각자에게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와 여러분의 내면에는 성령님이 와 계십니다. 바로 사도행전 2장에 증언이 기록된 성령강림이 사건 이후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성령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이지요.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행 2:3-4a)
우리는 이 성령강림의 사건 이후에 성도인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성령이 아니시면 저와 여러분이 자원하여 이 자리를 지킬 수 없는 것이지요. (물론 반드시 자원하여 이 자리에 있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요. 그 분들은 꼭 성령님의 임재하심을 언젠가 체감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후에 40일간 제자들을 가르치시다가 이윽고 승천하셨는데요.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시며 승천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시간의 순서대로 말씀을 드리면, 공생에 시절에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의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간다고 예언하시며 약속하셨습니다. 부활 후에 승천하시며 성령이 임하시면 곧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고 또한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령강림의 사건이 일어나고 오늘날에 이르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의 임재하심 가운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 곧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는 삶을 살게 된다는 주님의 약속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나요? 아마 자신이 없는 분들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말씀 드리고 싶은... 생수가 흘러나오는 삶이란 곧 복음을 믿음으로 받은 구원의 기쁨과 죄사함에 대한 감사, 그리고 거듭남으로 누리게 되는 영생에 대한 소망이 곧 우리에게 생수인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한 충만함(임재하신 성령님께 신경쓰는 일에 민감해짐...)이 채워지다 못해 흘러 넘치는 것이지요.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체감하고,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며 기도의 응답을 받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실감하고 산다면... 이런 놀랍고도 신비로운 삶을 누군가에게 꼭 말하고 싶지 않을까요?
만일 저와 여러분의 가족에게 뭔가 좋은 일이 있다면 어떻게든 말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경우에 따라서 주변에서 어떻게 생각할까 망설이며 크게 떠들며 자랑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좋은 경사를 생각만해도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과를 버티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영혼만큼은 지금 영생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기뻐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전도는 이처럼 오히려 주변에서 하지 말라고 해도 어떻게든 말하게 되고 고백하게 되는 즐겁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유쾌한 활동인 것을 믿습니다.
물론 예수님도 처음 70명의 제자들을 복음전도하는데 내보내실 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눅 10:3)
전도하기가 만만치 않은 주변 형편과 영적인 현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여행 후에 돌아온 제자들의 고백은 놀라웠습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7)
전도할 때의 짜릿한 경험으로 흥분한 제자들의 이러한 고백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0)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전도에 대하여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혹은 전도할 때 얼마나 많은 성취와 열매가 있었는지의 여부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오로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맺어진 것에 감각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전도를 어렵게 생각하거나, 혹은 전도한 결과에 대해서만 따지지 말고... 오직 전도를 하는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고 계심을 실감하는 체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전도에 대한 오해를 풀고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복된 일상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란 교회를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전도는 누군가를 교리적으로 설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도는 어떤 이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가며 교회에 보다 많이 모이도록 유도해서 기부를 많이 받아내려는 세속적인 영업이나 마케팅이 절대로 아닙니다. 전도는 말 그대로 구원과 죄사함, 그리고 거듭남의 복된 소식을 선포하고, 전파하며, 기쁨과 감격의 소식을 가감없이 증언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 우리의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가듯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전도는 어렵고 괴롭고 부담스러운 짐이 아니라, 오히려 감격과 보람과 기쁨과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전도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숨결과 손길, 그리고 강력한 능력을 실감나게 체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울러 전도할 때 나의 손을 잡아 주시는 주님과의 행복한 동행을 현실적으로 체험하는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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