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 장군
[남이(南怡)장군의 북정가(北征歌)]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波飮馬無
백두산석마도진 두만강파음마무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남아이십미평국 후세수칭대장부
백두산의 돌은 칼로 갈아 다하고,
두만강의 물은 말이 마셔 없애네.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평정치 못한다면,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하리오
남이南怡(세종23년~예종1년), 1441-1468) 장군은 태종의(이방원)의 넷째 딸 정선공주의 손자이며, 정선공주와 의령남씨 의령부원군 남경문의 3남인 의산위 南暉, 아들은 南份이고 손자는 유명한 南怡장군이다.
서울시 용산구(문화재 관리과) 용문동 106번지에 남이장군 사당이 있는데 남이 장군의 전설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남이장군은 여주에서 무술 연마 하였는데 현 대성리 남이터
앞산의 도적이 여주까지 와서 남씨에게는 물론 부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탈취하였다.
장군은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남이터로 이사와서 도적들의 동정을
살피니 도둑들이 나갈 때마다 앞산 산정에 있는 바위를 들췄고
샘물을 마시고 따나는 것이었다.
장군은 도적들의 눈을 피해 긴 갈대를 바위 틈에 넣어 물을 빨아 마신 지
10여 일 만에 능히 바위를 들만한 원기가 생기고 30일 후에는
바위를 공깃돌 다를 듯한 힘이 생겨 무적장군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당 8명을 토벌하니 경내가 평원하고 부민이 안심하고
생업에 열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충북 음성 출생이라고도 함.1457년(세조3) 17세의 나이로 무과(武科)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27세 되던 1467(세조13)년에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북관(北關)에서 일아나자, 우대장(右大將)으로 이를 토벌하여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으며, 같은 해에 서북변(西北邊)의 여진족을 물리치는 공을 세우고,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또한, 북방의 여진족을 물리치는 공을 세우고, 세조의 총애를 받아
27세에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예종원년(1468) 역모로 몰려 죽었습니다.
북정가는 남이장군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백두산에 평정비를 세우고 비문에 새긴 시로 그 천재성과 기개를 볼 수 있다.
인재박명이라고 했던가. 재능있는 자는 적도 많기 마련, 세조는 공신 권람의 사위인 남이를 총애하였습니다. 세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던 젊은 실력자 남이를 시기하던 원로 공신들 중 강희맹,한계희,한명회,신숙주,등의 노골적인 견제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 남이의 북정가가 모반의
내용을 담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자, 세조는 남이를 병판에서
물려나게 하였습니다.(1468년9월에)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게 되니,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직에 임명했다.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겸사복장직으로 물러났을 때 대궐에서
숙직하던 중, 그해에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습니다.
남이는 혜성을 바라보며
"옛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이 날 기상이로구나"
하고 한마디 하였는데, 이를 듣고 있던 유자광(柳子光)이 남이가
역모한다고 무고하였습니다.
20세의 젊은 왕 예종은 선왕 때 부터 성격이 급한 젊은 실력자 남이를
불안하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친국을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19세의 나이로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예종은 원래부터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그에 비하면, 예종은 유약하고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으며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다. 예종은 그 때문에 촌수로
당숙뻘이나 되는 남이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그래서 훈구
대신들이 그를 비판하고 나오자 즉시 병조판서 직위에서
해임시켜버렸던 것이다. 예종은 나약한 몸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춘 남이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고 남이를
제거하고자 했다. 예종은 아버지 세조가 자신을 위해
키워놓은 신진세력을 제거한 셈이다.
이후 신진세력들은 사라지고, 훈구세력들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남이를 전격 처형한 예종은 재위 1년 2개월 만에
약관(弱冠.2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만다.
아무리 고문하여도 자백이 나오지 않자, 남이가 역모를 품고
男兒二十未得國 (남아이십미득국 이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리요?)
남아 이십세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고 부르겠는가?
라는 시를 남겼다고 북정가가 그 증거로 제시되었습니다.
몇번인가나 비문을 조사하는 사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한결같이
득(得)자가 틀림없다고 하였답니다.
고문 끝에 남이의 발이 부러지고 고통을 못이긴 남이가 이시애
난 평정 때의 대장이자 당시의 영의정인 강순(康純)을
공범으로 지목했습니다.
강순은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남문 사형장 (南門外刑場) 으로 가는 수레에서 강순이 남이에게
"왜 나를 억울하게 죽게 하느냐" 고 묻자, 영의정 자리에 있고
나이 80으로 살만큼 산 사람이, 함께 평정을 간 부하의 억울함을
보고도 몸을 사려 한마디 변호도 하지 않은 불의는
죽어 마땅하다 하였답니다.
예종원년(1468) 남이28세 역모로 요절 (끝내 죽음)
그와 관련된 설화뿐 아니라 유적들도 상당히 많은데,
경기도 화성의 비봉리와 남이섬에 있는 묘소를 비롯하여,
서울 용산에 있는 사당, 남이가 무공을 닦았다는
축령산의 남이바위, 여주에 남이고개, 등이 있다.
전국에 분포한 남이의 이야기와 유적들은 억울하게 죽은
주검이 어떤 경로를 통해 민중 속에 살아남게 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