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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속에서 찾아보는 21세기 고뇌와 사유 2
황외순(시조시인)
국지성 폭우를 동반한 장마가 끝났다. 태풍 쁘라삐룬도 지나갔다. 다행히 우리나라에 남긴 상흔은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1m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는 이웃 나라 일본에 200여 명 이상의 인명피해를 냈다. 재산 피해를 언급하기에는 인명 피해가 너무 크다. 그런데 이번엔 또 폭염이다. 연일 경보가 울리지만 자연에 맞서 인간이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마음을 채 추스르기도 전이라 힘겨움이 더하다. 그럼에도 삶은 지속된다. 손에 손 맞잡고 한 걸음씩 나아간다. 시조는 그 자취며 시인은 앞으로 내닫는 힘이다. 공룡보다도 더 오래된 육기어류 실러캔스는 지느러미에 뼈가 있으며 폐와 비슷한 기관이 존재하는 원시 어류의 특성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원래 절멸한 줄 알고 있다가 1938년 남아프리카의 심해에서 살아있는 녀석이 잡히면서 고생물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이후 인도양에서도 추가 개체가 포획되면서 현재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린다. 시조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같은 듯 다른 모습으로 지금, 여기, 살아서 진화를 거듭한다.
벚꽃 아래 모여 앉아 사진을 박는다
스무 살이 스무 명쯤 좌우로 둘러앉아
만면에 웃음 가득한 사진을 박는다
세 배 넘는 나이인데 한가운데 앉아
벚꽃인 양 함박웃음 지을 수 있으니
낌세를 내야 한다고 누군가가 외친다
-이정환 「낌세를 내야 한다고?」전문, 《좋은시조》 2018 여름호
동기들 모임이 아닌 이상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 가면 흔히 연장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때 간혹 ‘늙은 나도 끼워줘서 고마워’라며 귀여운 인사치레를 하는 사람이 있다. 세대 차니 뒷방 늙은이니 하는 말들이 나이 든 사람들을 어지간히 주눅 들게 한 모양이다. 게다가 그들은 고령에 따르는 질병과 빈곤, 고독, 무직업 등 여러 가지 사회문제에서도 그다지 자유롭지 못하다. 한때는 늙은 사람이 존경과 존중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이렇게 불편한 사람이 되어 스스로 눈치를 살펴야 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듯하다. “세 배 넘는 나이인” 사람에게 “낌세를 내야 한다”고 외치는 스무 살 청춘의 농담이 웃프다. 그들이 연륜이란 말 속에 배어있는 편안함과 따뜻함을 온전히 읽어낼 수만 있다면 낌세는 오히려 그들의 몫이 아닐는지······.
세상에, 모가지가 저토록 하얀 새가
돌연 황톳물에 대가리를 처박더니
피리를 꿀꺽 삼키네, 그 비린내 나는 것을!
-이종문 「백로」전문, 《좋은시조》 2018 여름호
간혹 남자들은 여리여리한 몸에 청순해 보이는 얼굴의 여성에게 이슬만 먹고 살 것 같다는 표현을 쓴다. 이는 겉모습에 먼저 마음이 쏠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느 여성들과 다를 바 없이 트림하거나 방귀를 뀌거나 악다구니를 쓰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쯤이면 자연 신비감은 사라지고 시선은 이내 다른 곳을 향하게 된다. 이 시의 화자 역시 백로의 “하얀 모가지”를 통해 고결한 성품이나 품격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런데 “돌연 황톳물에 대가리를 처박는” 것으로도 모자라 “비린내 나는 / 피리를 꿀꺽 삼”켰으니 그 실망감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는다. 감탄과 동시에 탄식인 “세상에”라는 단어는 그 증거다. 관계 속에서의 우리는 대체로 체면을 지키는 일을 미덕으로 여겨 겉치레에 치중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겉모습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많은 것들이 있다. 드러나지 않는 속마음이나 처하여 있는 상황, 혹은 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다를 수 있음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다.
그녀가 이렇게 나를 버릴 수 있는가
웅크린 무릎 사이 한숨들을 버리고 뼈 시린 바람의 생채기를 버리고 쇠똥구리처럼 밤새 굴린 내 말들을 버리고 실핏줄 다 터진 내 새벽을 버리고 내릴 역을 지나서 잠을 깬 당혹 같은······. 라면 받침대로 쓰다 버렸나 헌책방의 시집 한 권
-가을 날 최미진님께 좋은 인연, 박성민 드림
-박성민 「최미진은 왜 나를」전문, 《정형시학》 2018 여름호
우리는 굳이 불교의 인연설을 언급하지 않아도 불쑥불쑥 마주치는 인연 앞에 놀라곤 한다. 얼마 전 뉴스를 통해 전해 들은 미국 위스콘신주 오클레어시에 사는 힐러리 해리스 자매의 이야기도 그렇다. 젖먹이 때 헤어지게 된 언니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던 중 기적처럼 언니가 힐러리의 옆집으로 이사를 왔고 둘의 재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필 그때, 하필 옆집으로 이사를 온 것인데 거기에 인연이란 말 이외에 다른 무슨 말을 덧붙일 수가 있을까. 필자는 박성민의 시 「최미진은 왜 나를」을 읽으며 또 한 번 소스라치게 놀랐다. 화자와 입장만 바뀌었을 뿐 아찔한 내 얘기였기 때문이다. 버려지는 폐지 속에 딸려간 책 한 권이 하필이면 저자의 친구 손에 닿았던 일이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헌책방도 인기가 좋았다. 손때 묻은 낡은 책이라도 가질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으니까. 하지만 요즘은 그야말로 책의 홍수다. 그래서인지 귀히 여기는 마음이 적고, 저자의 “한숨” 같고 “뼈 시린 바람의 생채기” 같고 “실핏줄 다 터진 새벽” 같은 시집을 기껏해야 “라면 받침대”로 쓰거나 폐지 속에 끼워 넣기 일쑤다. 그러므로 “최미진”이 저자의 시집을 헌책방에 내다 팔았든 기부를 했든 그나마 의미가 있는 일인 셈이다. 그러니 저자여, 너무 서운해하지는 마시라.
꼰대도 다 버리고 줏대도 발로 찼다
찢는 대로 자르는 대로 쏠리고 기울다가
예저기 기웃거리던 눈빛마저 지웠다
묽어지거나 흐려지거나 저를 녹여 저를 만드는
건더기도 알맹이도 체에 거르듯 치대면서
쫀득한 묵의 이미지, 그 맛이면 좋겠다
-박희정 「묵이 되라」전문, 《나래시조》 2018 여름호
내 머릿속 비우기, 마음 비우기, 버리고 비우기 등 비움에 관한 책들은 많다. 이들 대부분은 비움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설파하고 있다. 그럼에도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비움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우위에 서고 싶은 마음, 바로 그 욕심 때문이다. 박희정 시인의 묵 이미지는 “꼰대도 다 버리고 / 줏대도 발로 찼다”에서 보듯이 내려놓기의 의미다. “찢는 대로 자르는 대로” 제 가진 기득권과 오기, 자존심도 접는다. 그저 “묽어지거나 흐려지거나 / 저를 녹여 저를 만”들 뿐이다. 그렇다고 맹추를 주문하는 게 아니다. 본연의 “쫀득”한 성질은 지니길 바란다.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숙제다. 명예나 권력 앞에서는 더하다. 선거판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오히려 움켜쥐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묵이 되라」는 준엄한 자기반성을 요구한다.
골마다 희끗희끗 숨을 곳 없어진 후에 거울 앞 낯선 얼굴 바라보며 마주 선다 마음을 따르지 못한 나이만 홀로 선다
알면서 모르는 척 돌아섰던 날들을 백설공주 마법인 양 말로 못한 진실을 잘 닦인 거울 안으로 접어 넣은 시간들
까맣게 새겨놓은 시절의 마디마다 공평하게 받은 세월 하얗게 지운 후에 비워야 주어지는 선 주름살을 그린다
-김계정 「거울」전문, 《시조시학》 2018 여름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누구나 한 번쯤 좌절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는 외모를 잣대로 삼아 아름다움을 논하는 세태 탓으로써 좀 더 나은 모습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성형의 대중화 현상은 그 예다. 하지만 “백설공주”의 거울이 그랬듯 「거울」은 언제나 정직하다. 융통성도 없어 그 흔한 하얀 거짓말도 통용되지 않는다. 느닷없는 기미며 처진 눈, 두둑한 뱃살까지 일일이 고자질한다. 그래서 오히려 신뢰할만하다. “알면서 모르는 척 / 돌아섰던 날들”과 “말로 못한 진실”은 “골마다 희끗희끗”한 새치로 현시顯示하고 “비워야 주어지는 선 / 주름살”도 수여한다. 그러니 우리, “마음을 따르지 못한 나이”라도 흔쾌히 받자. 그게 바로 참 나다.
제주에선 어딜가나 삼촌이 살고 있다 알녘 집 해녀삼춘 우녘 집 목수삼춘 동동네 순댁이 삼춘 섯돈에 길동이 삼춘
바람의 섬 척박한 땅 늘 허기진 삶이어도 제사 후 나눠먹던 떡 반처럼 배부른 이름 “삼추운 어디 감수광 식사는 호여수광”
‘이당 저당해도 괸당’이 최고라지만 삼촌보다 더 가깝고 사촌보다 더 친근한 삼춘은 제주의 어른 정으로 새긴 이름
-임태진 「삼춘」전문, 《다층》 2018 여름호
장사를 하다보면 가끔 손님의 호칭 문제로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단골의 경우 친밀감을 표하고 싶은 마음에 선뜻 언니 오빠 삼촌 이모 등으로 부르게 된다. 특히 연세가 지극하신 분들의 경우 이름을 부르기도 어색하여 전부 어머님 아버님으로 통일해서 부르게 된다. 그럼 대부분은 웃으며 넘기지만 간혹 거북해하시는 분들도 있다. 얼마 전 한국일보에서 이런 호칭 문제를 다룬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친근함의 표시로 가족 호칭을 남용하고 있으며 이는 혈연주의에 기댄 구시대적인 사고로 온정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우리말 예절에도 부적합하다고도 적고 있었다. 반박할 여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손님’이라든가 ‘고객님’이라든가 혹은 아주머니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도 그리 자연스러울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임태진의 “삼촌보다 더 가깝고 / 사촌보다 더 친근한” ‘삼춘’은 공감이 간다. 삶에 접근하는 한 방식으로써 음지와 양지가 있다. 대체로 양지가 주는 이미지는 밝음과 희망, 긍정과 행복이다. 하지만 음지는 어둠과 절망, 부정과 불행의 이미지다. 그렇다고 해서 양지가 더 좋다거나 옳다고 할 수도 없고 음지가 다 나쁘다거나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이는 삶의 한 형태일 뿐이며 시는 삶을 들여다보는 한 방식이다. 우리는 시인의 눈을 통하여 삶의 다른 방식을 경험하곤 한다. 그 경험은 이해의 바탕이 되고 신뢰의 바탕이 되어 서로를 아우르게 한다. 특히 시 속에 담긴 그늘은 성찰의 의미일 공산이 크며 미래지향적이다. 또한 그늘은 한 옥타브 낮은 목소리다. 대부분 혼잣말이지만 귀 기울이면 분명 들리는 말이다. 그러므로 빛을 향해 발돋움하는 그늘이야말로 삶의 바탕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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