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03. 수분자(受粉子), 동물들
린네는 위대한 식물학자였다. 그는 곤충이 꽃 위로 날아다니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러나 그는 곤충들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는 간과했다. 곤충의 욕망, 이리저리 빙빙 기어 다니는 그것들이 안으로 뚫고 들어옴으로써 식물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그에게 분명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는 물론 알고 있다. 많은 벌과 나비, 그리고 다른 곤충들이 식물과 공생관계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식물은 곤충에게 자신의 꽃가루를 붙여준다. 곤충은 그 꽃가루를 어느 정도는 우연히 같은 종류의 다른 식물에 옮겨준다. 그 대가로 곤충은 맛 좋은 꿀과 넥타(nectar, 과일 액즙) 그리고 꽃가루 일부를 얻는다. 그런데 식물이 곤충을 유인하는 수단은 넥타와 꽃가루만은 아니다. 식물은 참으로 세련된 전략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미 2백 50여 년 전부터 꽃가루가 어떻게 암술머리에 도달하는지만을 연구하는 식물학의 하위 분야, 즉 꽃 생태학까지 생겨났을 정도이다.
그런데 꽃받침과 암술, 그리고 수술을 다 갖춘 ‘제대로 된’ 꽃은 오직 종자식물에만 나타난다. 꽃 생태학자들은 양치류, 이끼류, 조류(藻類)같이 원시적으로 구성된 생식기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 말고도 그들에게는 연구해야 할 것이 매우 많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향기와 모든 가능한 색과 형태와 크기를 가진 수만 가지 꽃들이 그들의 연구대상이라는 말이다.
가장 작은 형태로 꽃피는 것은 분개구리밥 속의 두 종류이다. 하나는 아시아 종류이고 또 하나는 호주산이다. 이들은 독일의 개구리밥이나 좀개구리밥과 친척이다. 이 두 미니식물은 윗면이 평평한 아주 작은 녹색 공처럼 보인다. 이들은 대략 소금 두 알의 무게를 갖고 있으며 크기는 약 0.6×0.3mm이다. 말할 것 없이 바늘구멍에도 들어갈 만큼 작다는 말이다. 꼭 미니어처(miniature) 같은 이들의 꽃은 하나의 암술과 단 하나의 수술로 구성되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바, 단독으로 가장 큰 꽃을 피우는 것은 보르네오와 수마트라를 고향으로 하는 거대한 꽃 라플레시아이다. 라플레시아 기생식물이다. 다시 말해 독자적으로는 광합성을 하지 못하고 다른 식물에 기생한다. 이 식물은 원시림에 사는 어떤 덩굴식물의 조직 속에 숨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이 꽃을 직접 볼 수 없다.
그러나 때로 이 덩굴식물이 축 늘어져 정글의 땅바닥을 건드리는 곳에서는 그 식물의 겉껍질 위에 혹이 하나 생겨난다. 그 혹은 몇 주간 부풀어 오르다가 마침내 터진다. 그러고 나면 이 덩굴식물 나무에서 나온 받침 속에 작은 양배추의 알 속처럼 보이는 물체가 놓여있다. 이것이 세포 실로만 형성된 숨겨진 존재, 즉 라플레시아가 토해낸 꽃봉오리이다.
며칠이 지나면 이 봉오리는 양배추 알 만큼 부풀어 오르고 뒤이어 어느 날 밤 강력한 가죽 같은 꽃잎을 다섯 개 펼치기 시작한다. 그 꽃의 지름은 90cm까지 이른다. 언젠가 어떤 사람은 1m 70cm에 이르는 꽃을 발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꽃은 버섯 같기도 하고 생선 같기도 한 냄새를 풍긴다. 이 꽃은 색깔을 갖고 있으며 무늬도 들어있는데, 파리들이 좋아하는 밝은 반점의 오렌지 갈색이다. 덕분에 이 꽃은 윙윙거리는 파리들을 쉴새 없이 끌어들인다. 수꽃의 내부에서는 수술 아래 파리들이 이리저리 기어 다니면서 끈적거리는 꽃가루를 묻힌다. 때가 되면 파리들은 다시 일을 시작하여 그사이 벌어진 라플레시아 암꽃을 향해 방향을 틀 것이다.
꽃들이 그토록 다양한 크기와 색깔과 형태로, 그리고 그토록 갖가지 향기를 가진 것은 우리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곤충 등 동물 수분자(受粉子)를 유혹하기 위해 그런 것이다. 단지 홀로 서 있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혹은 홀로 늘어져 있는 작은 꽃들, 예를 들어 개암나무와 자작나무의 꽃이나 혹은 작은 풀꽃들만이 자신을 바람에 맡긴다.
반점이 있는 오렌지 갈색의 라플레시아꽃이 풍기는, 우리 인간들에게는 오히려 불쾌한 냄새는 파리의 입맛에 맞는 것이다. 보라색이나 녹색도 파리들이 좋아하는 색이다. 가끔 이런 색깔의 꽃은 딱정벌레들을 노린 것이기도 하다. 딱정벌레들이 색을 잘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이 곤충은 어두운 빛의 크림색과 녹색 톤을 선호한다. 만약 어떤 꽃이 회색을 띠며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긴다면, 아마도 송장벌레나 말똥가리들이 덤벼들 것이다.
식물이 어떻게 수분(受粉)하는지는 자연을 엄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분명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꽃피고 있는 초원 ‘곰발톱’이나 악취 ‘미나리아재비’, 혹은 점박이 ‘천남성’에게 코를 가까이 대본 사람이라면 최소한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 것이다. 그런 것은 벌들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 꽃의 향기에 관한 한 벌들은 우리 인간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천남성(天南星)과 식물이 분뇨 같은 냄새를 아주 의도적으로 멀리 퍼뜨리는 사실에 대해서도 벌들 역시 우리 인간과 같은 기분일까? 이 식물은 꽃을 피울 때 아주 많은 에너지를 써가며 꽃에 30도의 고온까지 열을 준다. 따듯한 열 속에서 이 식물의 냄새를 만드는 질소화합물, 즉 썩은 고기를 특히 좋아하는 똥파리를 끌어들이는 질소화합물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추측하건대 몇몇 나비 종류는 이런 냄새를 좋아하는 것 같다. 어쨌든 전문가들의 보고에 따르면 어떤 종류의 나비들은 강한 냄새가 나며 썩어가는 동물의 대변과 시체를 빨아먹는다고 한다. 강한 냄새를 풍긴다는 것은 질소가 들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비들은 체내에 부족한 질소가 필요하여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비들은 단 하나의 빠는 주둥이만 갖고 있을 뿐 입이 없는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질소가 거의 함유 안 된 꿀과 넥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나비들의 색채 취향, 특히 공작나비의 색 취향은 분명 사람과 같다. 특히 공작나비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색을 좋아하며, 붉은색과 자주색을 포함하여 반짝이는 색을 특히 좋아한다. 또 나방은 흰색, 담홍색, 붉은색을 좋아한다. 반면 나비와 똑같이 부지런한 꽃가루 운반부인 벌은 긴 파장의 붉은 빛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벌이 가장 좋아하는 색은 짙은 노랑과 진한 파랑이다. 그다음으로는 흰색을 좋아한다.
많은 지역에서는 곤충이 좋아하는 색이 그 지방 경치의 색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북부 지역 초원의 잡초는 거의 모두 노란색으로 꽃핀다. 이 지역 초원은 벌들의 땅이다. 그곳에서 가까운 미국삼나무의 숲으로 들어가면 풍경은 또 달라진다. 이곳은 나방에 의해 수정되는 흰색 꽃과 담홍색 꽃들의 천지이다.
곤충은 중요한 수분자(受粉子) 들이다. 춥거나 온건한 지방에서는 가장 중요한 수분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열대지방이나 아열대 지방에는 많은 수의 다른 동물들이 ‘운반작업에 대한 대가로 넥타’를 받는 교역에 종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벌새는 아주 적합한 수분자들이다. 이 새는, 아욱꽃 같은 냄새 없이 빛나는 억센 꽃을 좋아한다. 쥐, 파충류, 그리고 호주산 유대류 일종, 큰 박쥐 속 등도 유용한 수분자(受粉子)이다.
수잔네 파울젠(지음), 김숙희(옮김), 이은주(감수). 식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풀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