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자영(尹子濚)
[문과] 문종(文宗) 1년(1451) 신미(辛未) 증광시(增廣試) 정과(丁科) 9위(19/40)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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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담수(淡叟)
호(號) 방헌(厖軒)
본인본관 무송(茂松)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직강, 장령, 진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담수(淡叟), 호는 방헌(庬軒).
고려 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낸 윤택(尹澤)의 현손이고, 윤회종(尹會宗)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윤강(尹江)이고, 아버지는 사직(司直) 윤변(尹汴)이다.
어머니는 강회순(姜淮順)의 딸이다.
1451년(문종 1) 증광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봉교·주부·직강·장령 등을 거치고, 1466년(세조 12)에 실시된 중시에 2등으로 뽑힌 뒤 벼슬은 진주목사에 이르렀다.
1455년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며, 『세종실록』과 『문종실록』 편찬시에는 춘추관기사관으로 참여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윤자영(尹子濚))]
[문과] 세조(世祖) 12년(1466) 병술(丙戌) 중시(重試) 2등(二等) 5위(08/15)
[문과] 세조(世祖) 12년(1466) 병술(丙戌) 발영시(拔英試) 3등(三等) 24위(40/40)
[이력사항]
선발인원 40명 [乙3‧丙7‧丁30]
전력 교도(敎導)
관직 직제학(直提學)
관직 한림(翰林)
문과시제 책문(策問):학사시도(學四始道)
본인문과 세조(世祖) 12년(1466) 병술(丙戌) 중시(重試) 문과(文科) 2등(二等) 5위
세조(世祖) 12년(1466) 병술(丙戌) 발영시(拔英試) 문과(文科) 3등(三等) 24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윤변(尹汴)
[조부(祖父)]
성명 : 윤강(尹江)
[증조부(曾祖父)]
성명 : 윤회종(尹會宗)[麗文]
[외조부(外祖父)]
성명 : 강회순(姜淮順)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윤계겸(尹繼謙)
본관 : 파평(坡平)【補】
[처부(妻父)2]
성명 : 윤표(尹彪)
본관 : 미상(未詳)
[출전]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윤회종(尹會宗)
[고려문과] 우왕(禑王) 3년(1377) 정사(丁巳) 정사방(丁巳榜) 동진사(同進士) 17위(27/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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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初名) 윤효종(尹孝宗)【補】(주1)
자(字) 청숙(淸叔)
본인본관 무송(茂松)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조선전기 사간원우사간, 변정도감사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할아버지는 찬성사 윤택(尹澤)이며, 아버지는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윤구생(尹龜生)이다. 동지춘추관사 윤소종(尹紹宗)의 아우이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389년(공양왕 1) 사재부령(司宰副令)으로 우왕·창왕의 주살(誅殺)을 상소, 실행에 옮기도록 하였다.
1390년 세자시학(世子侍學)·형조총랑을 역임하였다.
1392년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왕조 개창에 기여하였으나, 1395년(태조4) 의랑(議郎)으로서 급전(給田)을 잘못하여 삭직, 유배되었다.
1407년(태종 7) 사예로서 문과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성이 되고,
문신에게 매달 시부(詩賦)를 지어바치게 한 중월부시법(仲月賦詩法)을 이 해에 처음으로 시행했는데, 거기서 2등으로 합격, 1414년 사간원우사간·좌사간, 변정도감사(辨正都監使)를 지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윤회종(尹會宗))]
[문과] 태종(太宗) 7년(1407) 정해(丁亥) 중시(重試) 병과(丙科) 6위(09/10)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乙3‧丙7‧同進23]
전력 생원(生員)
관직 대사성(大司成)
본인문과 태종(太宗) 7년(1407) 정해(丁亥) 중시(重試) 문과(文科) 병과(丙科) 6위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윤귀생(尹龜生)
[조부(祖父)]
성명 : 윤택(尹澤)[麗文]
[증조부(曾祖父)]
성명 : 윤수평(尹守平)
[외조부(外祖父)]
성명 : 최영수(崔英粹)
[처부(妻父)]
성명 : 정인언(鄭仁彦)
[가족과거]
형(兄) : 윤소종(尹紹宗)[麗文]
[주 1] 초명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내의 급제 기록을 참고하여 초명을 추가. 「『태종실록』 13권, 태종 7년(1407) 4월 22일」 중시 급제 기사에도 “윤회종(尹會宗)”으로 출현함.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윤택(尹澤)
[고려문과] 충숙왕(忠肅王) 7년(1320) 경신(庚申) 경신방(庚申榜) 병과(丙科) 1위(4/33)
[인물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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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 중덕(仲德)
호(號) 율정(栗亭)
시호(諡號) 문정(文貞)
생년 무자(戊子) 1288년 (충렬왕 14)
졸년 기유(己酉) 1369년 (공민왕 18)
향년 82세
합격연령 33세
본인본관 무송(茂松)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광양감무, 밀직제학, 첨의찬성사 등을 역임한 관리.문신.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중덕(仲德)이며, 호는 율정(栗亭)이다. 국학대사성 문한사학(國學大司成文翰司學)을 지낸 윤해(尹諧)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윤수평(尹守平)이다.
일찍부터 글을 잘해 고모부 윤선좌(尹宣佐)를 따라 공부했고, 특히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능통하였다.
1317년(충숙 4) 9월에 등제해 경산부사록(京山府司錄)에 선임되었다가 교감(校勘)을 거쳐 검열에 올랐다. 연경(燕京)에 머물던 충숙왕으로부터 강릉대군 왕기(江陵大君 王祺: 뒤의 공민왕)를 뒷날 후계자로 추대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1320년 우부대언에 임명되어 전선(銓選:인사행정)을 관장했고, 우대언(右代言)을 거쳐 충목왕 초에 나주목사가 되었다.
충목왕이 돌아가자 1349년 밀직이었던 이승로(李承老)와 함께 중서성에 글을 올려 강릉대군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패하고 충정왕이 즉위하자 7월 광양감무로 좌천되었다.
공민왕이 즉위하자 11월 밀직제학에 임명되고, 이듬해 4월 소를 올려 시사를 논했으나 윤허되지 않자 개성부윤으로 치사하였다.
근신 가운데 향악(鄕樂)을 원나라에 보낼 것을 청하는 자가 있었으나 상소해 중지시켰다.
또 1357년(공민왕 6) 공민왕이 중 보우(普愚)의 건의대로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하고 이제현(李齊賢)에게 궁궐 터를 축조하도록 명했으나 간하여 이를 막았다.
같은 해 6월 왕에게 『상서(尙書)』의 무일편(無逸篇), 진덕수(眞德秀)의 「대학연의(大學衍義)」, 「최승로상서문(崔承老上書文)」을 강의하고 유학에 힘쓰도록 권하였다.
1361년 정당문학(政堂文學)을 더하여 치사하였으나 은퇴한 뒤에도 항상 치국의 길을 직언하였다.
1363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더했으나 이듬해 병이 나서 치사하고 금주(錦州)로 은퇴하여 산수를 즐긴 지 7년 되던 1370년 9월 세상을 떠났다.
효성이 깊고 항상 정직하며 검소하게 지냈다. 공민왕이 손수 진용(眞容)을 그려주고 율정이라는 호 두 글자를 해서(楷書)로 크게 써주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율정집(栗亭集)』이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윤택(尹澤))]
[고려사마] 충숙왕(忠肅王) 4년(1317) 정사(丁巳) 구재삭시(九齋朔試)
[이력사항]
선발인원 33명
관직 찬성사(贊成事)
타과 충숙왕(忠肅王) 4년(1317) 정사(丁巳) 진사시(進士試) 진사(進士)
기타 팔십이(八十二)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윤해(尹諧)[麗文]
[조부(祖父)]
성명 : 윤○○(尹○○)
[증조부(曾祖父)]
성명 : 윤○○(尹○○)
[외조부(外祖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출전]
『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 卷之二(규장각한국학연구원[古4650-10])
윤해(尹諧)
[고려문과] 고종(高宗) 99년미상(未詳) 시년미상(未詳)
[인물요약]
UCI G002+AKS-KHF_12C724D574FFFFB1231X0
졸년 정미(丁未)【補】(주1) 1307년 (충렬왕 33)
본인본관 무송(茂松)
거주지 미상(未詳)
[관련정보]
[사전] 인물 생애 정보
고려후기 전중시사, 판비서시사, 전민변정도감사 등을 역임한 관리.문신.
본관은 무송(茂松)이며, 자는 강재(康哉)이다.
무송현(茂松縣) 호장 윤양비(尹良庇)의 아들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사록(尙州司錄)이 되었으며, 뒤에 내시에 입적한 뒤 충렬왕을 시종하여 원나라에 다녀왔다. 이 때 행리(行李)의 공용(供用)을 맡아 사리를 꾀하지 않고, 정확하게 일을 처리하여 남은 비용을 국고로 돌렸다.
그 뒤 통례문지후(通禮門祗候)가 되었다가, 곧 장흥부의 지사(知事)로 나아가 일본 정벌을 위한 여몽연합군의 전함건조를 감독하였다. 이 일로 순찰사 홍자번(洪子藩)이 천거하여 흥위위장사(興威衛長史)가 되고, 전중시사(殿中侍史)를 거쳐 1286년(충렬왕 12) 동계(東界)의 초군사(招軍使)로 파견되었으나, 영월수령을 살해한 적괴(賊魁) 강윤명(康允明)을 잡지 못한 책임으로 파면되었다.
뒤에 다시 복직하여 판비서시사(判祕書寺事)에 이르렀으나 면직되어 고향에 돌아갔다가,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자 곧 전민변정도감사(田民辨正都監使)에 기용되었다.
얼마 뒤 충렬왕이 복위하자 정헌대부 국학대사성 문한사학(正獻大夫國學大司成文翰司學)으로 치사하였다.
청렴결백하여 전중시사로 있을 때는 죽도 먹지 못할 만큼 가난하여 콩으로 배를 채울 정도였으나, 강직하여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에 과단성이 있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윤해(尹諧))]
[이력사항]
관직 대사성(大司成)
[가족사항]
[부(父)]
성명 : 윤양비(尹良庇)
[조부(祖父)]
성명 : 윤○○(尹○○)
[증조부(曾祖父)]
성명 : 윤○○(尹○○)
[외조부(外祖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처부(妻父)]
성명 : ▣○○(▣○○)
본관 : 미상(未詳)
[주 1]졸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을 참고하여 졸년을 추가.
[출전]
『高麗時代 蔭叙制와 科擧制 硏究』(朴龍雲, 一志社, 1990.[423_5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