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 진 우물
이달균
짐승도 산그늘도 다녀간 흔적 없는
외로운 북향의 우물이 있습니다
간간이 치열 어긋난 빗방울들만 찾아옵니다
하늘이 적막하면 별에도 녹이 습니다
곤궁한 못 자국처럼 부러지는 바람들
메마른 상상력의 샘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별신굿과 수평선
거친 아우성은 수평선에 닿는다
낙엽과 빗방울, 포말을 잠재우고
고요히 경계를 지어 오늘을 마감한다
저무는 하루가 애닯지 않다면
생의 종점에서 또 한 생이 시작된 것
황혼의 바다에 꽂은 깃발들을 거두어라
꽃 지고 섬 지는 길, 꽃상여 떠나간다
사위는 차츰 어둠, 춤사위도 사윈다
어둠은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지운다
ㅡ제8시집『열도列島의 등뼈』(작가, 2019)
두만강에서
이 준령 넘으면 또 하나의 낯선 달
월광은 무엇을 한사코 비추었나
앙상한 늑골 사이로 화물차는 떠난다
구겨진 목도리 같은 두만강 하구언
창백한 별빛은 뗏목에 실려 가고
소심한 새벽 여명이 철조망을 넘는다
모래톱엔 어지러운 밤 짐승 발자국들
탐욕의 아우성과 처절한 악다구니
맹렬한 생의 전장이 이토록 기꺼웠다니
하나 둘 불을 켜는 이른 세한의 강
더러는 쌀을 씻고 더러는 물을 긷는다
서둘러 해산을 하고 하류로 내려간다
ㅡ『제주시조』(2019, 28호)
득음(得音)
소리는 날고 싶다 들바람 둠벙 건너듯
휘몰이로 돌아서 강물의 정수리까지
아름찬 직소폭포의 북벽에 닿고 싶다
적벽강 채석강을 품어 안은 변산반도
북두성 견우성이 어우러져 통정하고
윤슬의 만경창파는 진양조로 잦아든다
결 고운 그대는 국창(國唱)이 되어라
깨진 툭바리처럼 설운 난 바람이 되어
한바탕 쑥대머리나 부르며 놀다 가리니
그날은 찾아올까 우화등선(羽化登仙)은 이뤄질까
가을빛 스러지면 어느새 입동 무렵
노래는 구만리 가고 기러기는 장천 간다
ㅡ오늘의시조시인회의『오늘의시조』(2018, 제12호)
관계
이달균
혼자 이곳까지 걸어왔다고 말하지 마라
그대보다 먼저 걸어와 길이 된 사람들
그들의 이름을 밟고 이곳까지 왔느니
별이 저 홀로 빛나는 것이 아니다
그 빛을 이토록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스스로 저물어 어두워지는 것이다
ㅡ『시조미학』(2018, 가을호)
이달균 : 1987년 시집『南海行』과 무크 [지평]으로 등단. 시집『늙은 사자』등. 영화에세이집『영화, 포장마차에서의 즐거운 수다』. 중앙시조대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