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서리가 없어서 / 최하연
1.
반쯤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식탁에 올려놓고
얼음물을 붓는다
산봉우리에서 구름이 사라지고
가문비나무와 졸참나무 사이에
바람이 머무는 동안
한 모금 마시고
또 물을 붓는다
오후의 햇살이 식탁을 가로지르자
갈색도 아니고 분홍은 더욱더 아닌
서재가 가라앉는다
달력의 숫자 하나가
머리부터 흠뻑 젖는다
폴리에틸렌 프탈레이트 투명 컵 안으로
前.後.左.右.上.下.어제.그제.그리고.太初가
수면 아래
꼭꼭 숨어 있다
이제 또 물을 부으면
2.
흰 구름 아래, 하얀 날개
백로 한 쌍이 무논 위를 저벅저벅 걷다가
아가의 속살처럼 날아오른다
봄 가고 여름이면
언제까지가 꽃이고
어디서부터가 열매일까
그 경계로 물이 차오르고
그 다음은 푸른 적막이어서
벼는 여름 햇살에 익고
소금쟁이는
네 발로 수면에서 버티는 중
논이 하늘에 빠지지 않게
하늘이 논에 젖지 않게
*大方無隅(대방무우), ‘극한의 네모는 모서리가 없다’는 『노자』의 한 구절.
<해설>
최하연의 「모서리가 없어서」를 불교의 화엄사상, 특히 인드라망, 일즉다 다즉일, 사법계(四法界) 개념을 바탕으로 분석
1. 제목의 의미: 「모서리가 없어서」
제목은 노자의 *대방무우(大方無隅)*에서 비롯되며, 이는 “크게 완성된 네모는 모서리가 없다”는 뜻.
화엄사상에서 ‘모서리가 없다’는 것은 곧 경계가 없고, 분리된 실체가 없으며, 모든 존재가 서로 포섭되는 상태를 의미함.
**인드라망(因陀羅網)**의 세계처럼, 모든 존재는 하나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각 존재는 전체를 비추고 전체는 각 존재 안에 깃들어 있음.
따라서 제목은 존재 간의 경계가 무화(無化)되고, 존재 전체가 서로 스며드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세계, 즉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를 은유함.
2. 주제: 세계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경계는 실체가 아니다
시는 **일상적인 행위(물 붓기, 백로가 날기, 벼가 익기)**를 통해, 시간·공간·존재가 실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줌.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하나의 존재가 전체를 포함하고, 전체가 하나 안에 깃들 수 있다는 화엄의 핵심 사유가 시 전반에 깔려 있음.
이 시는 사물 간의 구분과 경계가 사라진 무애(無礙)의 세계, 즉 사사무애와 이사무애가 구현된 우주관을 시적으로 표현한 작품임.
3. 상징 분석
1) 아이스 아메리카노 / 투명 컵 / 얼음물
컵은 소우주: 물 속에 ‘前.後.左.右.上.下.태초’가 담겨 있음은 시간과 공간이 모두 하나 안에 공존함을 의미.
이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본질(시간, 원리)과 현상(음료, 컵)이 충돌 없이 스며듬.
물은 **형태가 없고 모든 것을 담아내는 공(空)**의 상징으로, 경계를 해체하고 존재 간 무차별성을 구현함.
2) 서재 / 달력의 숫자 / 햇살
인위적 시간의 상징인 달력과 서재가 햇살에 젖고 해체됨.
이는 시간과 질서에 대한 집착이 허상임을 드러냄.
이이무애법계(理理無礙法界): 다양한 진리와 관념들이 상충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상태.
3) 백로 / 무논 / 소금쟁이 / 벼
모두 **현상계의 구체적 존재(事)**들이며, 각기 다른 존재지만 시 속에서 서로 완벽히 연결되어 있음.
‘논이 하늘에 빠지지 않게 / 하늘이 논에 젖지 않게’라는 구절은 존재 간 경계가 사라진 상즉상입의 상태를 보여줌.
이는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 모든 현상이 걸림 없이 스며들며 전체 생태계를 구성함.
4) 1연 – 식탁의 우주화
컵 속 물에 전후좌우상하와 과거·태초까지 응축됨.
한 티끌에 삼천대천세계가 들어 있다는 화엄경의 사유를 시적으로 구현함.
부분이 전체를 품고, 전체가 부분 안에 깃든 일즉다 다즉일의 직접적인 시적 표현.
5) 2연 – 자연의 상호의존성
백로, 벼, 소금쟁이, 무논, 햇살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통해 존재하고 서로를 반영함.
이 상호의존성은 인드라망의 구조, 사사무애의 생태계적 구현으로 해석됨.
소금쟁이는 경계 위에 떠 있는 존재로 중도적 깨달음의 상징이기도 함.
이 시는 화엄사상의 철학을 매우 감각적이고 시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물, 시간, 존재, 하늘, 논 등 모든 이미지가 경계를 해체하며 서로를 포섭하는 사유로 연결되어 있으며, 화엄의 궁극적 깨달음인 사사무애의 경지를 제목과 구조, 이미지 전반에 걸쳐 구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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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상에서 말하는 네 가지 ‘무애법계(無礙法界)’, 즉 *사법계(四法界)*의 최종 단계는 다음의 네 가지 **‘무애(無礙)’**로 구성됩니다. 이들은 모두 존재와 존재, 현상과 본질이 걸림 없이 상호작용하고 스며드는 경지를 나타냅니다.
화엄사상의 사무애법계(四無礙法界)
1. 이이무애(理理無礙)
본질(理)과 본질(理) 사이의 무애
모든 진리는 서로 충돌하지 않고 자유롭게 통한다는 뜻입니다.
진리 A와 진리 B가 서로 배척되지 않고 조화롭게 성립합니다.
2. 이사무애(理事無礙)
본질(理)과 현상(事) 사이의 무애
추상적인 진리와 구체적인 현상이 충돌 없이 함께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예: ‘모든 것은 공(空)이다’라는 진리가, 동시에 이 컵 안의 물, 무논의 백로 같은 구체적 현상과 모순 없이 성립함.
3. 사이무애(事理無礙)
현상(事)과 본질(理)과 사이의 무애
구체적인 현상이 추상적인 진리와 충돌 없이 함께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4. 사사무애(事事無礙)
현상(事)과 현상(事) 사이의 무애
각각의 구체적인 존재들, 즉 모든 만물이 서로 충돌 없이 상호 의존하고 스며든다는 의미입니다.
예: 백로와 논, 소금쟁이와 물, 벼와 햇살이 따로가 아니라 함께 흐르며 존재.
이사무애: 투명한 컵 안에 우주적 시간(前.後.左.右.上.下.태초)을 담아내며, 추상적 개념(본질, 진리,질서,원리)과 구체적 사물(아이스 아메리카노)이 충돌 없이 공존함.
사사무애: 무논, 백로, 햇살, 벼, 소금쟁이 등 서로 다른 현상들이 하나의 생태계 속에서 조화를 이룸. 하늘과 논이 동시에 존재하고 스며드는 구조.
모서리가 없다는 개념은 곧 **걸림 없음(無礙)**을 말해주는 은유이며, 이는 곧 화엄의 가장 높은 깨달음의 경지를 시적으로 표현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