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라는 "테두리"가 참 어려운 난제가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한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는 해체주의자가 아닌 것 같네요.
Derrida의 deconstruction은 metaphysics of presence 현존의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입니다. supreme being 에 대한 객관적 현존의 종교적 체험, 이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이데거의 ontotheology요 데리다의 현존의 형이상학입니다. 객관적 현존의 가능성을 실재화된다는 강한 믿음, 이것이 종교의 영역이라면, 당연히 해체의 대상이 되겠죠. 예수의 고백과 행적은 해체주의일 가능성은 있어도, 그를 해석한 제자들의 어록은 해체주의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듯 합니다.
그러나 몇가지 가능성을 찾는다면,
1. 데리다는 그의 종교에 대한 논문에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이렇게 서술합니다. 두가지 역설적 모순이 공존하는 종교라는 것이죠. 1. Absolute respect for life 2. sacrifice입니다. 그의 생애가운데서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것은 생명에 대한 절대적 존중과 자기 희생입니다. 있음과 없음의 교차가 교모하게 얽혀있는 예수의 생애를 보면, 해체주의적 입장에서 본 예수의 흔적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 그리고 빌라도 법정에서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예수는 침묵이었습니다. 어떤 역사적 정황인지 상상해볼 뿐이지만, 그의 침묵은 해체를 능가하는 수준입니다. 우리는 이미 형이상학적 혼동으로 진리아닌 진리에 사로잡혀 살아왔습니다. 진리란 aletheia (unconcealment), 즉 스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나 푸코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현존의 형이상학이라는 테두리에서 이미 망각해버린 "진리"를 찾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예수의 침묵입니다. 이는 Differance의 a가 가르키는 infinite cracking against crack이요 무한한 간격입니다. 이 간격이 바로 예수의 침묵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침묵만이 앞에서 말한 두가지 역설적 모순이 한데 어우러지게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예수가 해체주의자인가라는 질문에 답변을 주저하는 것은 예수의 해석이 너무 다양하기때문입니다. Yes and No...
첫댓글 당시 진리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신화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터툴리안은 그의 apology를 '진리'가 어디 있는가에서부터 시작하죠. 그리스신화에서 진리는 여신입니다. 디케 나이키 등과 함께 제우스 주변에 있는 세 자매. 이 세 자매와 제우스는 Divine Council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 Divine Council이야말로 심판의 정확성, 착오없는 심판을 담보하죠. 그러나 빌라도 법정은 빌라도가 베마(심판석)에 앉아있고 그 주변에 유대인들이 둘러서 있습니다. 인간의 심판대, 오판이 자행되는 심판대죠. 두 가지 종류의 베마의 메타포로 기독인들은 로마 권력을 은근히 비판하곤 합니다.
터툴리안도 두 베마를 얘기하는데 하나는 진리와 정의가 담보되는 신성한 법정,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밖에 없는 법정, 다른 하나는 진리도 정의도 없어서 패배할 법정, 바로 로마 황제의 법정입니다. 당시에는 곳곳에 베마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 베마에서 억울하게 죽은 의인들은 진정한 법정에서 복권된답니다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하나봅니다. khora님이 상대안해주기전 데리다책좀 사다 봐야겠습니다. 근데요, ontotheology나 metaphysics of presence를 떠나 기독교를 말하는것은 불가능해보이는데.. 다시말해 데리다나 Heidegger의 입장에서는 기독교를 재구성하고 새롭게 이해할 여지가 없어보이는데요.
khora님은 교회에서 가르치실때 어떻게 이렇한 난제를 풀기위해 노력하시는지요?
터툴리안은 법률가였죠. 그래서 법률적인 용어로 신학적 논리가 펴가는 분인 것 같은데... 필레님이 언급하신 "신화적인 요소"라는 말을 좀더 설명해주시면 어떨런지요?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divine council 이라는 신화적 설화와의 연결점을 찾기가 대단히 어려워보입니다.
한나님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 비판적이서 그렇습니다. 저의 무례함을 너그러이 용서하세요. 뭐 저런 녀석도 있다 생각하시고... 교회에서는 가르치기가 어렵죠. 그러나 저는 궁극적인 질문에는 답이 없습니다라는 솔직한 답변을 합니다. 아니, 답을 모르는 것이 오히려 맞는 말이겠죠. 필레님이 신약방에서 신약학은 "
try to prove"라고 말씀하신 것에 어느 정도 동감합니다.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안다고 단정짓는 것은 아니죠. 교회의 설교가 단정내지는 선포인데 엄격한 의미에서는 인간이해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라 생각이 드네요. 철학자마다 다르니 예를 들기는 힘들어도, 니이체의 말대로, "there is no originary fact,
but just interpretation." "subject is not given, but fabricated" 라면 하이데거의 말대로 우리는 questioning being입니다. Question을 통해서 Dasein은 Proximity to Being itself에 도달하는 것이라 말하는데 (데리다의 입장은 다르지만)
아무튼 이런 난제는 open question without answer임을 알때 우리의 사유도 더 깊어질 수 있다고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터툴리안은 법률가였지만 신화에 정통했습니다. 온갖 신화를 언급하며 두 세상 이야기를 펼칩니다. 한 세상은 인간적 세상, 저 세상은 신의 세상. 제우스의 디바인카운실 얘기는 헤시오드, 호머 등에 나오는데 터툴리안은 그 신화를 운운하며 기독인들이 속한 세상은 신적 세상으로서 로마 황제의 세상 위에 있다고 주장.
터툴리안의 아폴로지 전체가 두 세상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일리아드 18권 아킬레스 방패 참조하세요. 요한복음에 이미 이 모티프가 등장합니다. 예수가 속한 세상은 모나드 세상,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세상인데, 빌라도는 그 진리를 모를 뿐더러 예수는 빌라도에게는 진리를 계시하지도 않습니다.
법정에서 진리 운운하는 것은 바로 그 신화적 모티프를 등장시키는 것인데 이 장면에서 예수는 철저하게 진리 영역에서 빌라도를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빌라도 법정에 진리가 없으며 그 판단은 오류라는 것, 소크라테스의 법정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는 의인임에도 잘못된 심판을 받아 죽는 것으로 처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