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화장실에서 쓰러지셨다. 갈비뼈 4개에 실금이 갔다고 한다. 병원을 거쳐 요양원으로 직행하셨다. 내게는 아주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날로 지금까지 아버지는 집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계신다.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이번에는 어머니가 쓰러지셨다.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좌변기에 앉으시려다 넘어지셨다. 동네의원을 찾았다. 큰 병원으로 가서 입원을 하란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고관절에 이상이 있다면 어머니와도 작별이다. 불안감이 밀려온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함께 ‘큰’ 병원을 찾았다. 몇 달 전에도 병원 신세를 지며 큰 고통을 받으셨는데 또다시! 앞이 캄캄하다.
어머니 상태를 가족 단톡방에 알린다. 정보의 공유다. 같이 마음을 모으자는 뜻이다. 어쩌면 공감 받기를 더 크게 바랐을지 모른다. 아니 바랐다. ‘얼마나 놀랬느냐고? 너무 수고가 많아 미안하다’고. 그런데 가족들은 꿀 먹은 벙어리다. 어머니한테 전화를 해서 안부를 묻는다. 정작 부양가족에게는 말 한마디 없다.
늘 조용하게 어머니를 위한 온갖 뒷바라지를 하는 아내도 많이 서운한가 보다. 당연하다. 나도 화가 나는데... 침묵의 의미가 뭘까? ‘정서적 둔감’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전화 하기조차 미안한 마음을 이해한다. 언제부터인가 그런 공치사도 기대하지 않고 ‘無서운’ 사람이 되기로 했다. 하지만 불쑥불쑥 괘씸할 때가 있다. 심하게는 사람의 도리가 맞는가를 묻게 된다.
요즘 나를 괴롭히는(?) 성경구절이 하나 생겼다.
“사랑이 언제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 친구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혈육이다.”(잠 17:17,새번역)
솔로몬이 부모 부양도 못 해 보고 쓴 잠언이 틀림없다. 나는 솔로몬을 용서(?)하기로 했다.
나의 ‘글멍’이다.
“너의 침묵조차 나에게는 ‘말’이다. 너의 서투름조차 나에게는 ‘위로’다. 너를 완벽하게 바라보지 않기에 내가 너를 더 ‘사랑’할 수 있다.”
정작 혈육도 아닌 지인들과 교인들이 더 많이 걱정해 준다. 기도로 응원한다. 필요한 물건들을 사다 나른다. 용돈까지 챙겨준다. 만나면 늘 위로를 건네준다. ‘여름날 시원한 냉수’ 같다. 나는 성경구절을 바꿔 이해하기로 했다.
“끝까지 사랑으로 보듬어 주어야 하는 것이 가족이고, 고난을 함께 나누도록 태어난 것이 가까이 있는 지인과 성도들이다.”(사역)
※ 식탁에 앉을 수도 없다. 응접실 탁자도 높다. 반 깁스를 한 채 방바닥 피난민(?) 식사를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