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원 근처로
유월 들어 첫 주말이다. 새벽녘 일어나 약물을 달였다. 우리 집에서는 보리차 대신 음용하는 약물은 내가 산야에 채집해 온 산국이나 영지버섯과 칡뿌리와 구지뽕나무들이다. 아침밥을 들고 난 뒤 산행이 아닌 가벼운 산책 차림으로 길을 나섰다. 도시락은 챙기지 않고 집 앞 마트에서 국순당을 두 병 사 배낭에 넣었다. 아직 본격적인 더위가 오질 않아 얼음생수는 준비하지 않았다.
창원실내수영장 앞으로 나가 진해 용원으로 가는 757번 직행버스를 탔다. 주말이라 그런지 배가 간격이 뜸하고 승객이 많지 않았다. 남산동 시외버스 정류소를 거쳐 안민터널을 지났다. 진해구청 앞을 지나 대발령을 넘으니 동진해였다. 불황 여파로 지역경제가 휘청하는 stx조선소 곁을 지나 웅천 성내에서 내렸다. 예전 웅천읍성을 일부 복원해 놓았다. 성내는 초등학교가 자리했다.
성곽을 돌아가니 그 지역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기념관이 나왔다. 사도마을로 가는 진해 남문지구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신항만 배후 주택지로 개발 하는 듯했다. 자연부락인 사도마을은 예전 한적한 어촌이 아니었다. 마을 앞은 좁은 물길만 남고 신항만 배후로 거의 매립이 되고 낯선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남해고속도로가 냉정에서 분기하여 그곳까지 뻗쳐왔다.
신항만이 가까운 웅천과 웅동은 도로망의 산천 모습이 날로 달라져갔다. 해안선 따라 흰돌메공원 들머리로 갔다. 가까운 곳에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입국한 최초 서양인인 세스페대스 신부를 기리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내가 걷는 해안선 탐방로에서 멀지 않은 지점이다. 나는 해안선 따라 흰돌메공원 전망대로 갔다. 진해 신항만 웅장한 구조물과 배후 산업기지 건물들이 보였다.
공원 전망대 쉼터에서 배낭에 넣어간 국순당을 한 병 비웠다. 안주로는 지난주 고향에 일손을 도우러 갔다가 가져온 마늘이다. 햇마늘 껍질을 벗겨 먹었다. 생마늘이라 좀 아려왔지만 막걸리 안주로는 대신할 만했다. 마늘 맛이 아려 왔지만 주말 여가 산책에서 고향의 맛을 다시 음미할 수 있음만도 행복으로 받아들였다. 자전거로 해안선 탐방을 나선 중년 남녀들이 쉬었다가 떠났다.
내가 쉬었던 자리 근처는 길고양이를 위해 사료를 준 대야가 세 개 보였다. 곁에는 물도 채워져 있었다. 인가와 멀리 떨어진 곳임에도 누군가 매일 아침 길고양이를 위해 선심을 베푸는 이가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마천공단으로 향해 걸었다. 신항만 배후에 그런대로 바다를 다 매립하지 않고 남겨둔 지역이었다. 비록 좁은 바다였지만 마을 이름을 따 영길만이라 부르는 곳이었다.
영길마을 가까운 풍광 좋은 언덕에 외관이 배 모양인 찻집이 있었다. 그 앞에는 웅동 대장동 출신 이용일이 작사한 ‘황포돛대’ 노래비가 세워져 있었다. 반세기 전 그는 전방 초병으로 복무하면서 고향 마을 앞바다를 떠올려 남긴 구절이 대중가요로 애창되었다. 황포돛대는 작곡가 백용호 손끝에서 오선지 음률로 다듬어져 국민가수 이미자가 불러 중년 이후 세대 뇌리에 남은 선율이다.
황포돛대 노래비 쉼터에서 아까 남겨둔 곡차를 비우며 가요를 음미했다. 노래비는 발바닥으로 누르도록 해둔 단추가 있었다. 그 단추를 누르면 황포돛대 노래가 흘러나왔다. 곡차를 비울 때에 선율이 끝나 다시 한 번 더 눌러두고 영길마을로 향했다. 마을 뒤 산언덕으로 오르니 보리수 열매가 익어가고 있었다. 쉼터에서 남은 국순당을 마저 비우면서 보리수 열매로 안주로 삼았다.
마천공단을 지난 의곡마을에서 일일 도보 여정을 마쳤다. 날씨가 무덥고 오존 농도가 올라가는 듯했다. 버스를 탔더니 안성마을과 청안마을을 거쳐 종점 용원에 닿았다. 국숫집에서 점심요기를 하고 어시장에 들려 싱싱한 조기를 몇 마리 사 얼음을 채웠다. 가덕도로 건너가는 마을버스를 타 정년 이후 노후를 보내는 손위 형님을 뵈었다. 지난봄보다 건강을 회복해 마음이 놓였다. 18.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