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절
1930년대 중반(中般)이 되자 암울(暗鬱)한 기운(氣運)이 세계(世界)를 덮쳐왔습니다.
사상 초유(史上初有)의 제1차 대전을 겪고 난 후 국제 사회(國制事會)는 전쟁(戰爭)의 재발(再發)을 막기 위해 꾸준히 노력(勞力)해 왔으나 독일(獨逸), 일본(日本), 이탈리아(伊太利共和國, Italiana), 소련(蘇聯)처럼 호전적(好戰的)인 전체주의 세력(全體主義勢力)이 득세(得勢)하며 새로운 전쟁이 가시화(可視化)된 것이었습니다.
대서양(大西洋)과 태평양(太平洋)에 의해 이들과 멀리 떨어진 미국(美國)도 위기감(危機感)을 느꼈습니다.
외교적 중립(外交的中立)과 별개(別個)로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대비(對備)는 해야 했습니다.
↑서서히 전쟁의 기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국방 정책(國防政策)은 본토(本土) 밖에서 적(敵)의 접근(接近)을 거부(拒否)시키는 것이니 해군(海軍)이 중시(重視)되었습니다.
이에 1936년 해군법 제정(海軍法制定)을 시작(始作)으로 차근차근 대비(對備)해 나갔습니다.
육군(陸軍)은 상대적(相對的)으로 역할(役割)이 덜 했지만 의지(意志)만큼은 대동소이(大同小異)했습니다.
때문에 항공 전력(航空戰力)을 확충(擴充)하는 방식(方式)으로 대비했는데,
그중 핵심(核心)은 폭격기(爆擊機)였습니다.
당시 미국이 운용(運用) 중인 폭격기는 전간기(戰間期, Interwar period)에 제작(製作)된 소형 공격기(小形攻擊機)뿐이어서 제한적(制限的)인 작전(作戰)만 가능(可能)했습니다.
↑1930년대 초에 미 육군이 사용한 A-17 공격기 조종실
의회(議會)의 동의(同意)를 얻어 전력 증강(戰力增强)의 기회(幾回)를 확보(確保)한 USAAC(미 육군항공대)는 폭격기 전력(爆擊機戰力)을 대대적(大大的)으로 개편(改編)하기로 결정(決定)했습니다.
핵심(核心)은 기존 공격기(旣存攻擊機)와 달리 많은 폭탄(爆彈)을 장착(裝着)하고 좀 더 멀리 위치(位置)한 적진(敵陣)을 맹타(猛打)할 수 있는 중(重)폭격기였습니다.
제1차 대전 당시에 유럽 원정군 항공단장(遠征軍航空團長)으로 복무(服務)했던 윌리엄 미첼(William Mitchell, 1879년 12월 29일~1936년 2월 19일) 등이 주장(主張)하던,
이른바 전략폭격(戰略爆擊)의 구현(具現)에 나선 것이었습니다.
↑미국의 전략폭격 전략을 구상한 윌리엄 미첼
그렇게 탄생(誕生)해 1938년부터 배치(排置)된 중(重)폭격기가 제2차 대전 당시에 유럽 하늘의 맹주(盟主)로 군림(君臨)했던 너무나 유명(有名)한 B-17입니다.
그래도 하나의 기종(機種)으로 모든 임무(任務)를 수행(遂行)하기는 불가능(不可能)했기에 중폭격기와 공격기의 중간 정도 능력(中間定度能力)을 보유(保有)한 중형(中型)폭격기 소요(所要)도 함께 제기(提起)되었습니다.
1936년부터 배치가 시작된 B-18은 폭장량(暴裝量)과 작전 반경(作戰半徑)이 해당 조건(該當條件)에 부합(附合)되었으나 속도(速度)가 느렸습니다.
↑느린 속도로 B-18 중형폭격기의 생존성이 의문 시 되자 후속기 개발에 나섰습니다
구조적(構造的)으로 기동력(機動力)이 뒤질 수밖에 없는 폭격기(爆擊機)가 속도(速度)마저 느리면 작전 중 생존(生存)이 어렵습니다.
B-18의 속도(速度)는 개발(開發) 당시에는 무난(無難)한 편(便)이었지만 배치(排置)가 시작되었을 때는 상황(狀況)이 바뀌었습니다.
이에 USAAC는 1938년 3월,
시속 200마일(320km)로 비행(飛行)해야 한다는 98-102 조건(條件)을 내세운 폭격기 사업(事業)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노스아메리칸은 B-18과 경쟁(競爭)을 벌였으나 탈락(脫落)했던 XB-21을 기반(基盤)으로 하는 NA-40을 제출(提出)했습니다.
↑NA-40의 기반이 되었던 XB-21, 유지관리 중인 XB-21 프로토타입
그러나 바로 그 무렵 실전 배치(實戰排置)가 시작된 독일의 Bf 109, 영국의 스피트파이어가 시속 450km가 넘는 속도로 비행할 수 있음이 밝혀지자 USAAC는 1,100kg의 폭탄을 탑재(搭載)하고 최고 시속 480km의 속도로 최대 1,900km까지 작전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는 강화(强化)된 조건을 내세우며 사업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이에 노스아메리칸은 NA-40을 전면적(全面的)으로 손 본 NA-40-1을 제출했습니다.
↑B-25의 프로토타입인 NA-40, NA-40(위)과 NA-40B(아래)
경쟁(競爭)에서 NA-40-1이 좋은 평가(平價)를 받아 계약(契約)이 이루어졌고 속전속결(速戰速決)로 시제기(試製機)가 제작(製作)되었습니다.
그러나 1939년 1월의 시험 비행(試驗飛行)에서 기대(企待)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決科)가 나왔습니다.
노스아메리칸은 좀 더 강력(强力)한 엔진으로 환장(換腸)하고 기체 상부(機體上部), 미익(尾翼), 주익 결합 부위(主翼結合部位) 등의 개선(改選)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제작된 NA-40B는 이후 각종 시험(試驗)을 통과(通過)했고 그해 9월,
B-25 미첼이라는 이름을 부여(附與)받고 도입(導入)이 결정(決定)되었습니다.
↑R-2600-A71-3 엔진을 탑재한 NA-40B 시제기
앞에 소개한 윌리엄 미첼(William Lendrum Mitchell, 1879년 12월 29일~1936년 2월 19일(향년 56세)을 기리기 위한 것인데, 현재(現在)까지 미국의 군용기(軍用機) 중에서 인명(人名)으로 이름이 부여(附與)된 것은 B-25가 유일(有一)합니다.
선행 양산형(先行量産形)이 1940년 8월 19일에 비행(飛行)에 성공(成公)했고 드러난 문제점(問題點)을 추가 보완(追加補完)한 후 이듬해부터 일선 배치(一線排置)가 시작(始作)되었습니다.
이때는 미국이 참전(參戰)하기 전이었으나 제2차 대전이 발발(勃發)한 후였기에 만일을 대비(對備)해 마틴에서 개발한 B-26 중형 폭격기(重型爆擊機)도 함께 양산과 배치에 들어갔습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