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은 그 이후 남자의 환상만으로도 무섭고 싫었다.
봄꽃 지고 여름 꽃이 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잊으려하고 지우려 할수록
사랑의 열병의 자국에 낙인처럼 찍힌 바퀴소리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은진은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만 보아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미워하려한다고 미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
그 여름 장마가 시작 됐다.
연 3일 장대비가 쏟아졌다.
휴가철을 맞아
휴가를 떠난 거리가 썰렁하리만큼 조용했다.
매일같이 붐비던 미용실도 한산했다.
은진이 일하는 스와니 미용실은 미아리에선 깨 소문난 미용실이다.
은진이 퇴근하려고 가게 셔터를 내리는데
길을 지나던 비옷을 입은 낮선 남자가 은진의 엉덩이를
툭 치고 지나갔다.
은진이 놀라 뒤돌아보는 순간 남자는 저만치 멀어졌다.
은진은 우산을 쓰고 가게 문을 나섰다.
거리에 빗물 꽃이 동그랗게 피고 졌다.
높은 건물 외벽에 걸린 휘황한 네온불도 꼬꾸라져
도로바닥에 출렁거렸다.
☆☆☆
은진은 누군가 뒤따르는 발길이 있음을 예감했다.
옛 말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은진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은진은 그래 덤벼라 한번은 당했으나
두 번은 당하지 않을 것이라 속으로 다짐하며
동네 어귀 비탈길을 들어설 무렵 뒤따라오던 남자가
갑자기 은진의 손목을 잡아 체는 것이 아닌가,
은진은 그 찰나
정체불명남자의 배를 핸드백으로 돌려 친 것이다.
“윽-”
남자는 비명을 지르며 빗물 흥건한 바닥에 꼬꾸라졌다.
☆☆☆
은진이 다시 핸드백으로 머리통을 내려치려는 순간
“은진씨 저 예요. 혁제”
은진은 그 음성에 우뢰처럼 놀랐다.
은진은 어깨 위에 올려 진 핸드백을 멈추고 얼굴을 살폈다.
“은진씨 저 예요. 혁제-!!”
다시 한 번 혁제는 호소하듯 말했다.
☆☆☆
은진이 허리를 굽혀 확인한 결과 혁제가 맞았다.
“어찌 된 거예요”
“이야기가 길어요. 어디 가서 얘기해요”
장마철 늦은 밤 어디를 가야하나 은진이 생각했다.
그러나 동네부근엔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없었다.
은진은 한참을 내려가 모텔로 들어섰다.
불빛에서 보는 혁제는 예전의 혁제가 아니었다.
“어찌 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