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천하제일군 동북으로 출동하다
그러나 소련군의 동북 주둔은 중국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겼다. 스탈린은 일본의 항복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동북을 신속하게 장악하여 극동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확대하는데만 급급했을 뿐, 점령 이후의 군정이나 관동군의 무장해제, 중국에 언제 어떻게 반환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무적인 계획은 없었다. 장제스를 대신해 모스크바로 갔던 쑹쯔원 역시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너무 촉박했다. 따라서 중소우호조약에서 양측은 장제스 정권이 중국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것과 장제스 정권이 파견한 통치 기구들이 동북에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소련이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는 원칙적인 부분만 합의했을 뿐이었다.
동북은 엄연한 중국의 영토였지만 소련군은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행세했다. 군기가 이완된 소련군 병사들은 군인이라기보다 비적떼에 가까웠다. 이들은 일본인이고 중국인이고 가리지 않고 현지에서 무차별적인 약탈과 강간 등 온갖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투항한 관동군 70만명은 무장 해제당한 채 모조리 시베리아로 끌려 간 후 10년 이상의 강제 노역에 종사했다. 그 중의 일부는 동북에 진입한 중공군에게 포섭되어 국공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행정과 치안 조직이 마비되면서 도처에서 토비가 준동하는 등 동북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고 극심한 식량과 물자 부족에다 소련군이 군표를 마구 남발하면서 화폐 가치가 폭락하였다.
▲ 하얼빈을 점령한 소련군. 아이와 노인이 태반이었던 이들은 강인하기는 했지만 군기는 엉망이었다. 세계최강의 군대라기보다 오히려 "멕시코 산적떼"에 가까운 모습이었고 동유럽에서 보여주었던 행태를 중국에서도 그대로 재현하였다.
특히 소련의 주요 목표는 일본이 동북에 남긴 막대한 자산이었다. 이를 접수하기 위해 수백여명의 기술자를 동북으로 파견하였고 수천명의 일본인 전쟁포로와 노동자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동북 최대의 중공업 시설인 대쇼와(大昭和) 제철소와 선양 제철소, 펑톈 항공기 제조공장 등 동북의 주요 공장들을 해체한 후 철도와 항만을 통해 소련으로 가져갔다. 또한 전력 설비가 빈약했던 소련은 압록강 하구의 수풍 발전소를 비롯해 동북에 산재한 수십 곳의 발전소와 정유공장, 자동차 공장, 탄광설비 등을 조직적으로 철거했으며, 설비를 실어나른 뒤에는 철도 레일과 침목까지 뜯어갔다. 소련군의 약탈은 1945년 9월부터 철수 완료를 선언하는 1946년 5월 3일까지 이어졌다.
소련이 동북에서 약탈한 자산이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는 신뢰성 있는 통계는 없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의 특별보자관이자, 연합국 배상위원회 미국 대표단 단장으로서 1946년 5월 중국에 파견되었던 에드윈 W. 폴레(Edwin W. Pauley)는 약 8억 9500만 달러로 추산했으나 조사가 전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류가 많아서 정확성은 낮다. 또한 동북에서 일본인 철수를 위해 선양에서 조직된 일교선후연락처(日僑善後聯絡處) 산하 동북 공업회의 조사에 따르면 손실액 추계는 약 12억 3천만 달러였다.
여기에는 관동군 산하의 기업들이 빠져 있었기에 이를 합할 경우 20억 달러를 상회하였다. 그리고 만주국 은행에서 약탈한 금괴 300만 달러에, 5억 위안 이상의 만주국 화폐, 소련군이 발행한 97억 위안 상당의 군표까지 합하면 손실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으로 동북 경제의 50~70%에 달한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로 인해 동북 경제는 완전히 마비되었을 뿐더러, 국민정부군의 동북 장악에도 심각한 타격을 가하여 국공내전에 패배하는데 일조하였다.
이런 소련의 행동에 대해 장제스는 무엇을 했던가. 중국 입장에서 동북의 모든 자산은 마땅히 중국의 것이었다. 장제스는 1945년 9월 4일 동북 접수와 통치를 위한 동북행영을 편성하고 슝스하이를 동북행영주임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아들 장징궈를 외교부 주동북특파원에, 장자아오(張嘉璈)를 동북행영경제 위원회 주임 및 대소경제합작대표로 임명하여 소련과의 교섭을 맡겼다. 장자아오는 대표적인 저장 재벌로, 쑹쯔원과 쿵샹시와 함께 장제스 정권을 물적으로 후원하는 세력이었다.
이들은 10월 12일 창춘에 도착하여 소련군 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와 담판을 하였다. 장자아오는 성명을 발표하여 일본이 동북에 남긴 재산은 중국의 것이며 전쟁 배상금의 일부임을 분명히 하고 이는 미국 정부로부터도 동의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소련이 무단으로 반출한 설비의 반환을 요구하고 소련이 중공군의 동북 진입을 묵인하는 것은 엄연한 중소우호조약의 위반이라고 질책하였다. 하지만 소련측은 이는 소련군이 관동군으로부터 접수한 것이기에 모두 소련의 전리품이라고 주장했다. 양측의 주장은 팽팽했고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당초 맺었던 중소우호조약을 소련이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자 장제스는 소련을 점점 불신하게 되었다. 하지만 스탈린도 중국과의 마찰로 서방과 대립하기를 원치는 않았다. 그는 중국측에 장징궈의 모스크바 방문을 요청했다. 장징궈는 1945년 12월 25일 중국을 출발하여 30일에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스탈린을 만났다. 그는 스탈린에게 동북에서 양국의 경제협력에 대한 소련의 이권을 인정하되 소련이 중국에서 가져간 전리품을 반환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중국의 양보만을 요구했기에 결국 장징궈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다음해 1월 14일 중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로 인해 장제스는 더욱 소련을 불신하게 되었고 동북에서 중공이 소련의 묵인 아래 세력권을 나날이 확대하자 결국 1946년 3월 16일 소련군의 즉각 철수를 독촉하였다. 트루먼 행정부 역시 2월 9일 중국과 소련 정부에 각각 각서를 보내어 대일 배상은 연합국이 공동으로 결정할 문제이며 양국이 단독으로 처리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이는 실상 중국의 편을 들어 동북에서 소련이 멋대로 행동하는 것에 대해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었다.
스탈린이 트루먼, 장제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동북을 조직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했던 이유는 단순히 경제적인 이익 때문보다도 안보적인 이유가 더 컸다. 늘 중국을 경계했던 그는 소련과 마주보고 있는 동북이 거대한 공업지대로 남아 있는 것은 심각한 위협으로 여겼다. 따라서 동북 경제에 큰 타격을 가하는 한편, 중공의 세력권으로 하여 중국과 소련의 완충지대로 삼으려고 하였다. 국공내전 초반만 해도 중공에게 승산이 별로 없다고 여겼던 그는 전황이 악화될 경우 이들을 동북으로 철수시킨 다음, 본토로부터 분리시켜 위성국으로 만들 생각도 있었다. 스탈린이 바라는 중국은 어느 한편의 완전히 승리가 아니라 국공이 분열된 채 서로 대립하고 약체화된 모습이었다. 따라서 국공내전에 한발 걸친 채 중공에게 대량의 무기와 군수품을 제공하면서도, 그렇다고 전차와 항공기, 군함 등 소련제 최신 무기를 주는 대신 장제스에게 압도당하지 않는 정도의 최소한의 원조에 머물렀다.
소련군이 동북에서 철수한 후 동북에서 국공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소련과의 교섭 문제는 부차적으로 밀려났다. 이후 장제스가 동북에서 패배하면서 자연스레 흐지부지되어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물론 중공 역시 이를 묵인하였고 국공내전 승리 후에도 굳이 소련 측에 거론하지도 않았다. 소련 역시 설비에 대한 대가를 중국에 일체 지불하지 않았다.
한편 마셜의 조정과 1.10 정전합의에도 불구하고 동북의 총성은 도무지 멈출 기미가 없었다. 국공 양측 모두 여기에 사활을 걸었기 때문이었다. 동북초비사령관 두위밍은 린바오를 격파하고 진저우를 점령했지만, 숫적으로는 여전히 열세였기에 급히 병력 증원을 요청했다. 5개군이 증원되어 1946년 2월부터 미 해군의 수송함을 타고 친황다오에 차례로 상륙한 후 산하이관과 진저우를 거쳐 동북으로 진입했다.
그 중에는 장제스가 이른바 "5대 주력"이라 부르는 최정예부대인 신1군(제50사단, 신편 제38사단, 신편 제30사단)과 신6군(제14사단, 신편 제22사단, 지식청년군 제207사단)도 있었다. 이 두개 부대는 버마 전역에서 활약했던 신편 제38사단과 신편 제22사단을 주축으로 각각 3개 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각 사단은 미국식 편제에 따라 3개 보병연대와 1개 포병연대, 1개 전차 대대, 400여대의 트럭을 보유하여 중국군 유일의 기계화부대이기도 했다. 또한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추었고 사기도 충천했다. 장제스는 신1군과 신6군을 "천하제일군"이라고 불렀다.
▲ 중일전쟁 말기 인도에서 훈련 중인 신1군 병사들.
신1군의 군장은 쑨리런(孙立人)으로 미국 버지니스 군사학교를 졸업하여 중국에서는 드물게 서구식 현대전술에 해박했으며 버마 전역에서는 깐깐하기로 이름난 스틸웰조차 "동양의 롬멜"이라고 격찬할 만큼 대활약을 했다. 신6군의 군장은 랴오야오샹(廖耀湘)으로 황포군관학교 제6기생이었다. 그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난징 방어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버마 전선에서 쑨리런과 함께 일본군 제18사단을 격파하고 인도와 윈난성을 연결하는 "스틸웰 공도"를 여는 등 두 사람 모두 국민정부군 최고의 전술가들이었다.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그 공백은 중공이 차지해나갔다. 더욱이 소련은 동북에서 국민정부군이 철도와 항만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한편, 중공측에 국민정부군의 병력 이동 상황과 소련군의 철수 일정을 흘려서 쌍방의 충돌을 부추겼다. 덕분에 중공은 국민정부군의 방해를 받지 않고 북만주 전역과 남만주의 대부분을 빠르게 장악할 수 있었다. 4월 15일에는 소련군이 창춘에서 철수하자말자 즉각 중공군이 공격하여 장악하였다. 이는 장제스에게 큰 충격이었다.
물론 국민정부군도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신1군과 제71군이 창춘 남쪽의 요충지인 쓰핑(四平)의 탈환에 나섰다. 린뱌오 역시 산동군 제1사단과 제2사단, 신4군 제3사단 등을 동원하여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제 국공내전을 통틀어 네번에 걸친 공방전을 벌이며 동북의 승패를 갈랐던 쓰핑 전투의 첫번째 전투가 시작될 참이었다.
▲ 쓰핑에서 국민정부군의 공격을 방어하는 공산군 병사들.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철모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