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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2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마르코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자아와 포용력
‘좋은연애연구소’ 소장인 김지윤 강사가 상대를 이해하는 문제에 대해 자신이 체험한 것을 이야기 한 것을 들었습니다.
김지윤 소장이 결혼하여 6년 정도 지나서였다고 합니다.
소장은 여자임에도 좀 털털하고 직설적입니다.
반면 그의 남편은 매우 꼼꼼한 편이라고 합니다.
설거지와 빨래 모두 남편이 잘 도와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어떤 옷들이나 수건은 빨래바구니에 다 넣지 않고 밖으로 삐져나와 걸쳐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6년이나 보아오다가 남편에게 왜 이런 것들은 바구니에 온전히 다 집어넣지 않고 밖으로 나와 지저분하게 걸쳐놓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남편의 자상한 대답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어 젖은 옷이나 수건은 밑으로 쌓이게 되면 냄새가 나기 때문에 걸쳐서 건조시키는 거야.”
저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빨래를 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젖은 러닝에 곰팡이가 생긴 적이 있어서
그 방법을 써서 잘 압니다.
그러나 김지윤 소장이 놀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결혼하기 이전에 친구 부부가 사는 집에 몇 달 동안 얹혀 산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냄비가 화장실에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의 집 사정이라 그 냄비가 왜 화장실에 엎어져 있는지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는데 결국 그 집 남편이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며 그 냄비가 왜 일주일 동안이나 화장실에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 아내는 “네~ 치울게요~”하고 냄비를 치웠습니다.
그냥 가정살림에 무관심한 여자였던 것입니다.
어쩌다 들고 들어왔다가 아무 이유 없이 그냥 그 곳에 두었던 것을 치우지 않은 대단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김지윤 소장은 자신에게 묻습니다.
‘만약 내 남편이 내 친구와 결혼했다면 내 친구는 남편이 빨래를 통에 완전히 넣지 않는 것에 대해 영원히 묻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구나.
내가 그것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은 나의 문제였지만 내 친구는 관심도 없었을 수 있었겠구나.
내 문제였는데 남편의 문제라고 생각해왔었구나!’
그렇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다른 사람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내가 만들어내고 나만의 문제들임에도 계속 보편화 시키면 상대의 고유한 문제로 만들어 버릴 때가 많습니다.
모세 때 모세의 영을 70원로에게 나누어 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70원로에 속하지 않은 엘닷과 메닷이란 사람도 영을 받아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가 와서 모세에게 말합니다.
“엘닷과 메닷이 진영에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즉 예언을 하고 있는 엘닷과 메닷이란 사람에게 문제가 아니고, 그들을 시기하는 여호수아가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자신의 문제를 남의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 복음도 이와 같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기본적으로 포용력이 크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그리스도교 종교 안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불교는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이고 천주교도 모든 종교에 대해 우호적인데 일부 개신교만 모든 종교에 대해 약간은 거부적인 소견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천주교를 이단이라고 가르치는 목사들도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자신 안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천주교에 투영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행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반대하지 않는 자는 당신을 지지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반대한 적이 없고 예수님처럼 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함께 지지하는 동료요 형제로 여겨야 하는 것이 오늘 복음에 맞는 자세가 아닐까요?
사실 ‘내’가 커지면 남을 품을 수 있는 ‘포용력’은 작아집니다.
우리는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넓은 포용력을 지닌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22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마르코 9,38-40
야고보서 4,13-17
<크신 주님 바람 앞에 한 줄기 연기인 우리들>
최근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LG그룹 구본무 회장님에 대한 훈훈한 이야기들을 많이 전해 듣습니다.
모그룹 총수처럼 조폭이나 수전노 같지 않으셨답니다.
제왕적 갑질이나 비인간적 횡포와는 한참 거리가 멀었답니다.
정도(正道) 경영, 투명 경영을 주창했으며, 인간과 자연에 대한 관심과 조예가 깊었답니다.
가까운 사람들, 특히 직원들을 향한 배려와 존중이 돋보였답다.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숨은 자선도 많이 하셨답니다.
직원들을 하인 부리듯 줄줄이 일렬로 총집합시켜놓고, 군기잡고 호통쳤던 어떤 재벌 총수와는 달리, 구회장님은 언제나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사셨답니다.
과한 의전과 복잡한 격식을 멀리한 소탈했던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장례식도 아주 소박하게 치러졌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 조차 떠들썩하게 과시하는 한국 사회의 장례문화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가 남긴 몇몇 어록들은 다른 재벌 총수들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가 귀담아듣고 마음에 새겨야 할 귀한 말씀들입니다.
“국민과 사회로부터 존경 받는 기업이 됩시다.
우리가 하는 활동 하나하나가 더 나은 고객의 삶을 만든다는 사명감으로 모든 일에 임해야 하겠습니다.”
“경영 환경이 어렵다고 사람을 안 뽑거나 기존 인력을 내보내서는 안됩니다.”
“이제부터 협력회사와의 갑을 관계는 없습니다.
협력회사에 단순히 도움을 주겠다는 시각에서 벗어나, 협력회사의 성장이 곧 우리의 성장임을 인식하고 실행해주기 바랍니다.”
대기업 오너였지만 검소하고 조용하게 세상과 이별한 모습, ‘이웃집 아저씨’ 처럼 따뜻하고 품격있는 그룹총수로서의 모범을 남기고,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우리 곁을 떠나신 회장님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이 아침 야고보 사도의 권고 말씀이 비수처럼 제 마음에 꽂힙니다
“여러분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야고보서 4장 14절)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후 산전수전 다 겪으셨던 야고보 사도였습니다.
스승님의 정체와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부단히 발버둥쳤던 그였습니다.
때로 주님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도 겪었고, 주님 때문에 깊이를 알수 없는 바닥 체험도 거듭했습니다.
마침내 심오한 스승님의 뜻, 그분의 실체가 무엇인지 깨달은 그의 표현이기에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티끌보다 작은 것에 목숨걸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큰 인물들, 나라 전체를 쥐락펴락했던 거물들도 노화로 인한 쇠락 앞에 정말이지 초라한 모습으로 변화되더군요.
마침내 지상에서의 마지막 숨을 내쉰 날, 확인하게 되는 그들의 모습은 참으로 덧없고 보잘 것 없더군요.
따지고 보니 우리 모두는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너나 할 것 없이 손톱만한 도토리들입니다.
티격태격, 아옹다옹하면서 ‘내가 더 높네. 내가 더 크네. 내가 더 대단하네.’ 외치지만 하느님 눈에는 모두가 그놈이 그놈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잠시 떠다니다가 하느님 자비의 품을 향해 사라질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광대무변하시고 영원하신 주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신 주님 앞에 우리는, 너무나 작고 미약한 존재라는 진리를 잊지않고 살아간다면, 우리 공동체의 삶이 한결 부드러워질 것입니다.
내가 선배인데, 내가 연장자인데, 내가 원장인데, 내가 회장인데, 하며 어깨에 힘줄 이유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인간 존재의 영원한 결핍성과 티끌보다 작음을 잊지 않는다면, 서로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도 조금은 부드러워 질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이웃을 향한 측은지심이요, 진한 동지의식일 것입니다.
크신 주님의 바람에 우리를 내맡겨야겠습니다.
주님께서 한 줄기 작은 연기같은 우리를 당신 크신 사랑과 자비의 바람에 합류시켜 주실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7주간 수요일 강론>
(2024. 5. 22. 수)(마르 9,38-40)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8-40)”
1) 여기서 사도들을 따르는 사람이 아닌 ‘어떤 사람’은, 교회 공동체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한 적이 없는 사람을 뜻하는데, 단순히 “사도들이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사도들이 모르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빌려준 사람(마르 11,3), 또 최후의 만찬을 거행할 수 있도록 집을 빌려 준 사람(마르 14,14) 등이 좋은 예입니다.
그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님의 제자(신자)였는데,
사도들은 그 사람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그런 상황이었는데,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모르는 어떤 사람’이 신자인지 아닌지, 또는, 신자가 아닌데도 신자 행세를 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무엇으로 어떻게 식별해야 하는가?
신분증이나 증명서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텐데, 신분증이나 증명서를 위조하는 일이 아주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말’이 아니라 ‘삶’이 기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를 ‘구원의 보편성’과 ‘교회의 보편성’에 관한 문제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정식으로 신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신앙인들보다 더 착하게 살면서 신앙인들보다 더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았던 사람이라면 결코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9,41).
2) 요한 사도가 막은 것은,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 아니라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문제는 십계명 제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라는 계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요한 사도가 십계명을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공동체 안에서의 차별과 소외 문제도 아니고, ‘우리 편’이 아닌 사람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신성 모독에 관한 문제이고,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사람이냐, 아니냐?”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바오로를 통하여 비범한 기적들을
일으키셨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에게 대기만 해도, 그들에게서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다.
그러자 구마자로 돌아다니는 몇몇 유다인까지도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면서, 악령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스케우아스라는 유다인 대사제의 일곱 아들이 그렇게 하자, 악령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였다.
그때에 악령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모조리 억누르고 짓누르는 바람에, 그들은 옷이 벗겨지고 상처를 입어 그 집에서 달아났다(사도 19,11-16).”
<여기서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나는 예수님을 안 믿지만 바오로가 믿는 예수님의 이름으로”입니다.
믿음 없이 사용하는 예수님의 이름에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가 말한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39절의 예수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3)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과 합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마태 12,30).”
두 말씀을 합하면, 예수님과 악의 싸움에는, 또는 선과 악의 싸움에는 ‘중립’이란 없다는 가르침이 됩니다.
예수님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하는 것도 아닌 중립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 상황을 보면, 분명히 신앙인이면서도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미지근함을’ 매우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
<자기가 지은 죄를 알고 있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회개를 하고 새롭게 변화될 수 있는데, 열성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는 무슨 죄를 지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죄인이 아니니까 회개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회개하지도 않고, 새로워지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그저 습관적으로 살던 대로 살고, 하던 대로 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끝나버립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뜨겁게 믿는 것이 아닌 것은 모두 ‘안 믿는 것’, 즉 ‘알곡’이 아닌 것은 모두 ‘쭉정이’입니다.
쭉정이 같은 사람들에게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분께서는)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