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노형동 산19-2번지 제주시충혼묘지내 애국선열묘역
시대 ; 일제강점기~대한민국
유형 ; 묘
최정숙(崔貞淑)은 탐진(耽津)최씨로 고종39년(1902) 제주시 삼도동 948번지에서 최원순(崔元淳)의 딸로 태어났다. 최원순은 후일 초대 제주지방법원 법원장을 지냈다. 유치원에 다닐 때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세례명은 베아드릭스이다. 순종3년(1909) 4월 신성여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 3월 강평국(姜平國) 고수선 등과 함께 제1회로 졸업하였다. 1915년 서울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3월 졸업하였으며, 1919년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입학하였다.
1919년 당시 경성여자보통학교 학생으로 3월 1일 서울 탑동(塔洞) 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이 발표되자 수천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으로 시위가 강제로 해산되고 다른 동지들과 함께 붙잡혔다. 그리하여 같은 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기까지 8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공훈전자사료관)
1902년 2월 10일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 제주면(濟州面) 삼도리(三徒里)에서 아버지 최원순(崔元淳)과 어머니 박효원의 6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탐진(耽津)이다. 아버지는 평북 희천군수와 창성군수를 역임하였고, 광복 이후 초대 제주지방법원 법원장을 지냈다. 서울 진명여학교를 마치고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인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3월 1일 재동여자보통학교에서 교생실습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불참하고 기숙사에서 쉬고 있던 중, 밖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고 이에 참여하였다. 기숙사에 있던 최용숙(崔容淑)·한화순(韓化順) 등 동창생들과 더불어 밖으로 나와 시위대에 합류한 후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학생들을 포함한 3,000~4,000명의 시위대와 함께 탑골공원에서 나와 만세를 부르며 종로(鍾路)와 무교정(武橋町, 현 무교동 일대)을 거쳐 대한문 쪽으로 행진하였다. 이어서 대한문과 덕수궁 앞을 지나 서대문정(西大門町)·서소문정(西小門町)·장곡천정(長谷川町)을 거쳐 본정(本町) 방향으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붙잡혀 오랜 기간 예심을 거친 결과 1919년 8월 30일 경성지방법원으로 공판 회부가 결정되었다. 같은 해 11월 6일 오세창(吳世昌)·박규훈(朴圭壎)·안규용(安圭瑢) 등과 함께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미결구류일수 중 90일 본형 산입),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1921년 제주에서 강평국(姜平國) 등과 함께 여성 강습소인 여수원(女修園)을 개설하였고, 1927년에는 제주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을 맡았다. 1942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제주에 정화의원을 개원하고, 무료의료봉사 등을 통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다.
1954년에는 신성여자고등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대한적십자사 제주지사 부지사장, 제주도중등교육회 회장, 대한결핵협회 제주도지부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64년 교육자치제 시행 이후에는 초대 제주도교육감으로 선출되어 4년 동안 재직하였다. 1966년 5·16민족상이 제정된 후, 제2회 교육부문 본상을 수상하였다.(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때 79명에 이르는 소년결사대를 이끌고 미국영사관 주변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학생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이 확정되기까지 서대문형무소에서 8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당시 경성법원의 판결문에는 나이 18세, 본적 전남 제주도 제주면 삼도리 948번지, 주소 경기도 경성부 본정 2정목 27번지, 죄명 보안법위반, 주문 징역 6월 미결구류 9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3년, 판결 날짜 1933년 11월 06일 등의 내용과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그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각소를 행진하며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였고, 2회 독립시위운동으로 남대문 역전에서 수백명이 조선독립이라고 대서한 기와 붉은기를 흔들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며 남대문을 향하여 행진하였다는 요지가 기록되어 있다.
출옥 후 여성교육과 여성계몽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21년 3월 강평국, 김시숙 등과 함께 여성의 문맹퇴치 강습소인 여수원(女修園)을 개원하였는데, 이후 명신학교에 통합되면서 교직을 맡았다. 1925년 강평국(姜平國)·이재량(李載良)·고수선(高守善)·김시숙(金時淑) 등과 함께 제주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제주여자청년회를 조직하였고, 같은 해 목포의 소화학교(昭和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1년 신부 김양홍(金洋洪)의 권유로 전주의 해성학교(海星學校)로 옮겨 재임 중 민족혼을 일깨우는 노래를 지도하였다는 것이 문제되어 잡혀가기도 하였다.
1939년에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42년 3월 졸업하였다. 서울 성마리아병원에 부임하여 이화여자고등학교의 위생감을 겸임하였으며 의사면허증을 받았다. 1944년 귀향하여 제주읍 삼도리 향청(鄕廳) 안에 정화의원을 개업하여 불우한 사람들에게 무료로 진료하는 인술을 펼쳤다.
광복 직후 고수선(高守善)과 함께 여성 문맹 퇴치와 계몽 운동을 위한 대한부인회를 조직하였다. 1948년 11월 4·3사건과 관련하여 헌병대에 끌려가기도 했었다.
1949년 신성여자중학교 설립을 인가받았으며, 1954년에 신성여자고등학교를 개교하여 초대 교장이 되어 무보수로 재임하면서 명문 여자고등학교로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이후 대한적십자사 제주지사 부지사장, 제주도중등교육회 회장, 대한결핵협회 제주도지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4년 도(道) 단위의 교육자치제가 실시되어 초대 제주도교육감에 피선되어 4년 동안 재임하였다.
1955년 가톨릭 신자로서는 최대의 영광인 로마교황 훈장, 1967년 제2회 5·16민족상 교육부문 본상을 수상하였고, 1993년 3·1절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2006년 3월 우리 고장 출신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고인의 동생인 최희식(崔熙植. 83. 제주시 龍潭1동 310의13)씨가 1997년 5월 29일 崔 前교육감이 생전에 사용했던 필구 문갑, 사진첩, 경기여자의전이 준 부채(1919), 로마교황청이 수여한 십자가 훈장 등 수백점의 유품을 제주교육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기증된 유품에는 신학문에 의한 첫 교육과정 수료장 등 희귀 자료가 많다.
묘는 황세왓 천주교인공동묘지에 안치되어 있었으나 2011년 제주시 충혼묘지 애국선열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묘비에는 앞면에 애국지사 崔貞淑의 묘, 뒷면에는 1902년 2월 10일 출생. 1933년(1993년을 잘못 적었음) 3월 1일 대통령 표창. 1967년 제2회 5·16민족상. 1964년 2월 4일 초대 제주도교육감. 1977년 2월 22일 영면. 좌측면에 연고자 崔玉姬 金淳欽 崔憲卓이라고 새겨져 있다. 최옥희(김순흠과 부부)와 최헌탁은 조카이다. 최정숙 지사는 혼인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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