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1786-1859) 성인의 생애
사제들의 주보성인이신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님은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리용 인근의 ‘다르딜리’라는
농촌 마을에서 농부였던 아버지 마태오 비안네와 어머니 마리아 블루즈 사이에서 6남매의 넷째로 태어나셨습니다.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자라는 동안 여느 아이들과 특별히 다른 점을 보이지 않았고 주위 사람들 역시
장차 어떤 사람이 되리라고 추측도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만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강했으며, 일곱 살 때에는 직접 성모상을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비안네 신부님이 자라던 시절은 프랑스대혁명으로 불안정한 시기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였습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결과로 모든 교회 재산은 국유화 되었으며, 모든 성직자는 신앙과 교의에 앞서 헌법을 준수할 것을 강요받았고 서약을 거부하는 이는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고 선언되었습니다. 그 결과 서약을 거부한 많은 성직자들이 순교하였고, 성당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려면 몸을 숨겨야 했던 시절이었고, 그로 인하여 어린 비안네는 13세가 되어서야, 그것도 창문을 가린 방에서 첫영성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활은 1799년 나폴레옹의 등장과 그 후 1801년 교황청과 프랑스와의 정교 협약을
거치고 나서야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비안네는 정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였고 17세에 되어 사제가 되고자 마음먹었을 때에도 기초적인 프랑스어 문법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제가 되는 데 필수 언어였던 라틴어는 더욱더 몰랐습니다. 다르딜리 근방 에퀼리 본당의 ‘발레 신부님은 비안네의 하느님에 대한 열정에 감동하여 그를 받아들였으나, 농사에 익숙해 있던 비안네가 지적인 사고에 익숙해지도록 변화시키는 것은 크나큰 난관이었습니다. 하지만 발레 신부님은 인내로써 비안네를 보살폈으며 공부 때문에 좌절에 빠졌던 비안네를 격려하여 사제성소를 키워나가도록 도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직을 향한 비안네의 뜻은 군대 징집으로 인한 병역문제(1809년), 그리고 라틴어의
미숙 등으로 지연되었으며, 바리에르의 소신학교에서 철학을(1811년), 리용의 대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나(1813년), 결국 라틴어 때문에 퇴학당하고 말았습니다(1814년). 그러나 발레신부님의 지속적인 개인교수와 특별시험 주선으로 1815년 8월 15일 그레노블에서 사제서품을 받게됩니다. 당시 사목책임자인 쿨롱 주교님께서는 비안네의 사제직 결정을 앞두고 ‘머리 나쁘기로 소문난’ 비안네에 대하여 “공부는 못하지만, 신심은 깊습니다.”라는 주위의 증언을 듣고 나서 다음과 같은 말로 사제직을 수락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나는 그를 사제로 부르겠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비안네는 아직 미완의 사제였습니다. 교구는 사제의 여러 직무 중 고해성사 집전권을 유보했던 것입니다. 지적인 능력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사제가 고해소에서 교리에 어긋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발레 신부는 비안네 신부의 고해성사 집전권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신심깊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비안네 신부가 상처받은 신자들의 영혼을 사랑으로 치유해 줄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발레 신부의 노력은 결실을 맺었고 비안네 신부님의 첫 고해자는 발레 신부였습니다. 발레 신부는 모든 사람이 “포기하라”고 했지만, 비안네 신부의 성덕을 믿고 이끌었습니다. 그 발레 신부가 없었다면 비안네 신부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비안네 신부의 첫 고해자를 자청한 발레 신부의 심정은 상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3년 동안 발레의 보좌신부로 있은 뒤 1818년에 주민 230명의 아르스의 본당신부로 부임합니다. 아르스는 가난한 농촌마을이었습니다. 성당은 오랫동안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낡은 상태였고, 마을 사람들의 신심은 깊지 않았습니다. 젊은이들 대부분이 성당에 나오지 않았고, 기본적 교리지식조차 몰랐으며, 프랑스대혁명(1789년) 이후 태어나고 자란 젊은이들은 더 이상 신앙에 대해 목말라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신앙보다도 향락에 더 친숙해 있었고, 거의 매일 밤마다 술을 마시고 흥청거렸으며 주일미사도 어쩌다 한 번이었고 첫영성체 이후 영성체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들이 허다했습니다.
성인은 230명의 신자가 있는 아르스에 도착하기 전에 그곳의 신앙 실천이 매우 딱한 형편일 것이라고 경고해 준 주교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 본당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거의 없습니다. 바로 신부님께서 그곳에 하느님의 사랑을 심어 주십시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구현하고 그리스도의 자비를 증언하러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주님, 제가 제 본당을 회개시키도록 하여 주십시오. 저는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이라면 어떤 고난도 평생 감내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그는 자신의 사명을 받아들였습니다.
1818년 2월, 인구 230명의 아르스는 점토 기와로 덮인 40채의 낮은 집들이 흩어져 있는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비록 작은 마을이었지만 비안네 신부는 자신이 책임지고 구원해야 할 영혼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고 ‘사목’을 시작했습니다. 너무도 초라했던 성당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으로 바꾸기 위하여 노력했으며, 매일 시간을 쪼개서 신자 가정을 방문했고, 신자들과 영적 담화를 나눴습니다.
특히 그는 강론에도 집중하여 ‘머리 나쁘기로 소문나고’ 문장력도 서툴렀지만 강론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거의 매일 밤을 새웠습니다. 비안네 신부가 강론에서 가장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복음을 열정적으로 선포했으며, 성체성사의 은혜로움을 강조하며 자주 영성체하라고 권고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체를 모십시오. 예수님께로 가십시오.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는 죄가 너무 많아 주님께 나아갈 용기가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아픈데 치료를 거부하거나 의사를 부르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또한 비안네 신부는 병자를 방문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거리가 멀고 시간이 많이 걸려도 방문했고, 한번은 자신이 몹시 아픔에도 불구하고 병자를 방문하였다가 탈진한 상태에서 함께 침대에 누워 병자의 고해를 들으며 성사를 집전하고 결국은 수레에 실려 집에 돌아오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신자들 반응은 냉랭했습니다. “잠시 저러다 말겠지”, “즐기면서 편안하게 살려 했는데, 꽉 막힌 신부님이 마을에 오셔서 골치 아프게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소명을 알기에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좌절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으며, 죄를 멀리 하고, 하느님과 기도 안에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교리를 직접 가르쳤으며 하느님에 대하여 무관심한 신자들을 초대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일만 합니다. 일밖에 모릅니다. 여러분의 이익에만 신경 쓸 분 영혼 구원에 무관심하다면 구원되기 힘듭니다.” 그리고 강론과 설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본보기로 자신의 고행, 극기, 단식을 감수하였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아끼고 절약했던 비안네 신부였지만 하느님을 위해서는 가장 아름다운 것을 봉헌하길 즐겨했습니다. 비안네 신부는 예쁜 것을 좋아했고, 미적 감각도 있었으며, 신자들도 성스럽고 아름다운 성당에 다니기를 좋아하리라 생각했기에 성당을 꾸미는 데에는 아낌이 없었습니다. “낡은 수단이 아름다운 미사 제의에 알맞다”라는 유명한 말은 “우리 주님께 제일 예쁘고 비싼 것을 드려야 되지 않을까요?”라는 말씀과 함께 비안네 신부가 자주 하셨던 말씀입니다.
비안네 신부의 이러한 사목열정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823년부터입니다. 비안네 신부가 36세 되던 그 해, 인근 지역에서 열린 대규모 피정에서 비안네 신부의 고해성사를 통해 많은 고해자들이 죄 사함의 큰 은혜를 느꼈고, 그 고해자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이후 비안네 신부는 ‘고해소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아르스로 찾아왔습니다. 그 후로 비안네 신부는 미사 시간과 교리 교육, 그리고 기도와 본당 업무 처리, 그리고 간단한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고해소에서 보내게 됩니다.
비안네 신부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살아있을 때에도 이미 사람들은 그를 성인 신부님, ‘아르스의 성자’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화가들이 그의 모습을 그리고 싶어 했으며, 수많은 사진사들이 그의 모습을 필름에 담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아르스 성당 주변에서는 고해를 기다리는 이들과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사진과 그림들이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안네 신부는 극도의 겸손으로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가 받았던 모든 유혹 가운데 가장 큰 유혹은 자신에 대한 실망의 유혹이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자신이 아르스의 본당 신부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느끼고 그 직무로서 떠나고 싶어했지만 결국 순명의 정신과 신자들의 기대를 굴복하여 끝까지 사목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했습니다. 73세가 되던 1856년 6월, 비안네 신부는 성체를 모시고 갈 힘도 없었지만 평소대로 고해소에서 16시간을 보냈고, 교리를 가르쳤으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사제관으로 돌아온 후 “저는 더 이상 못합니다.” 라는 말씀과 함께 쓰러지셨습니다.
2개월 후인 8월 2일, 비안네 신부는 폭염이 유난히 기승을 부리던 그날 “내가 그분께로 갈 수 없게 되니까, 그분이 제게로 오시는군요.”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 성체를 모셨습니다. 마을에는 울음과 기도 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마을 남자들은 비안네 신부의 마지막 길을 시원하게 해 준다며, 지붕에 계속 찬물을 길어 쏟아 부었습니다. 그리고 8월 4일 새벽 2시, 41년 5개월 동안 작은 시골 본당의 주임 신부였던 비안네 신부는 하느님께 영혼을 돌려 드리고 그토록 소망하던 쉼에 들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는 이후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됐으며, 1928년 4월 23일 비오 11세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황 비오 11세는 비안네 성인을 1929년에 ‘본당 신부의 수호자’로 선언했습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09년 12월 - 2010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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