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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楚漢誌(漢高祖 列傳)] 2-110 (140)
《여(呂) 황후와 척씨(戚氏) 부인 1》
여 황후는 이팔 청춘의 꽃다운 나이로 무명 청년이었던 유방과 결혼하여 한평생을 유방과 더불어
생사 고락을 같이해 왔었다.유방이 천하를 얻어 보려는 대야심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전선(戰線)
에서 전선으로 동분 서주하기를 장장 30여 년, 그간 여 황후는 젊은 나이로 얼마나 많은 고독과 함께
불안과 걱정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을 것인가 ?
그러나 본시 성품이 강인하기 짝이 없었던 여 황후는 남편이 대업을 성취하는 데 아낌없는 협력을
다해 온 것은 물론이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 데 있어, 내조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해 왔던 것이었다.
천하만 통일하고 나면, 여 황후는 천하의 국모(國母)로서 유방과 더불어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천하를 통일하는 날이 오고 보니,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뒤에는, 여 황후에게는 오직 <황후(皇后)>라는 허울 좋은 명칭 하나만을
남겨 주었을 뿐, 하룻밤도 따뜻한 애정을 베풀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통일된 이후에는 남편 유방은
더 많은 찬란한 여색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이제는 여 황후는 너무도 늙어 버렸기 때문에 거들떠 보지도 않음은 물론이려니와,
수수 대전에서 참패할 때에 하룻밤 인연으로 만난 젊고 아리따운 척씨 부인을 공공연히 서궁(西宮)에
데려다 놓고, 낮이고 밤이고 갖은 애정을 쏟아 오고 있으니,
여 황후는 자신으로부터 남편을 빼앗아 간 척씨 부인에게 이를 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냐 ! 이년, 어디 두고 보자. 나는 이 원한을 언젠가는 네년에게 반드시 갚고야 말리라 ! )
이렇게 독한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남편의 위세에 눌려 감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그러면서 밤마다 독수 공방(獨守空房)을 하며 치밀어 오르는 정염(情炎)을 억제하며
살아가자니 척비에 대한 복수심은 날이 갈 수록 뼈에 사무칠 지경이 되었다.
문제는 거기에서만 끝나지 않았다.여 황후는 자신의 아들인 영(盈)을 이미 태자로 책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척비는 남편을 이불 속에서 구워삶아 가지고 자신의 아들인 여의(如意)로 태자를 바꿔 치우려는
책동까지 하지 않았던가 ?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이지만, 만약 여의가 자신의 아들인 <영>을 제치고,
태자로 책봉된다면 여 황후는 <황후의 자리>까지 졸지에 척비에게 빼앗겨 버리는 신세로 전락하지 않겠나 ?
천만 다행으로 황태자를 바꿔 치우는 문제는 조정 대신들의 적극적인 반대와 장량 선생의 도움을 얻어
원만하게 해결하기는 하였으나,이런 과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갈등과 잡음은 따지고 보면 척비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려니, 자연스럽게 여 황후는 척비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척비가 남편을 빼앗아 간 것만도 가슴을 치며 통곡할 노릇인데, 이제는 황후의 자리까지 빼앗아
가려고 유방을 꼬드겼으니, 여 황후가 이를 갈며 복수심에 불타 오르는 것은 여자로서는 당연한
감정이었을 것이다.마누라를 둘 씩이나 거느렸다면 세상 모든 남자들이 부럽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두 집 생활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의 선망(羨望)일 뿐이지, 정작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두 여자의 입장과 처신 사이에서 <애정>의 배분(配分)을 공평 무사하게 할 수 있는 비결이란
결코 없는 것이 아니런가 ?그뿐만이 아니라 남자가 가지고 있는 재물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사회적인
위세와 집안에서의 위엄까지도 두 여자에게 공평하게 나눌 수는 없는 일이 아니런가 ?
그나저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씨앗싸움이다. 일반 세인(世人)들 조차에서도 <씨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 앉는다>는 속담도 있는 형편인데,유방의 경우에는 천하의 대권(大權)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지 않은가 ? 그렇다면 어떤 씨앗이 장차 이를 물려받을 것인가 ?
유방은 오랫동안 두 여인을 거느리고 살아온 관계로, 씨앗 싸움의 심각성을 몸소 겪어 왔었다.
그러면서 여 황후와 척비는 공존(共存)하기 어려운 존재임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그는 임종에 즈음하여
태자를 불러 놓고 그 문제를 슬기롭게 처리해 주도록 간곡한 유언까지 남기지 않았던가 ?
그러나 씨앗 싸움이란 유언 하나로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유방이 죽었을 때 여황후(呂皇后)는 60 고개를 바라보는 노파였다.
게다가 남편이 죽고 자신의 아들인 태자가 제위에 오르자, 그녀는 태후(太后)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60이 다 된 일국의 태후라면 누가 보아도 점잖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씨앗 싸움의 감정에는 나이도
체면도 없었다.남편이 죽고 나자 그녀의 머릿속에 대뜸 떠오른 생각은, 척비년을 그렇게나 알뜰살뜰하게
감싸주던 영감이 죽었으니, 이제야 말로 그년과 그년의 아들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릴 때가 되었구나.
이 년 놈들 어디 두고 보자. 내 반드시 너희 모자를 죽여없애리라 하는 복수심뿐이었다.
여 태후의 가슴속에는 척씨 부인 모자에 대한 원한이 이토록이나 사무쳐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남편이 숨을 거두기가 무섭게 여 태후는 조커뻘 되는 <여수>를 불러 이렇게 명했다.
"주상께서 돌아가셨으니까, 척녀가 아들에게로 도망을 갈지 모른다. 너는 지금 서궁으로 관헌(官憲)들을
데리고 달려가 그년을 당장 영항(永巷 : 궁녀들의 감옥)에 가두어 놓고 엄하게 감시토록 하여라."
여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한다."돌아 가신 폐하께서 그렇게나 총애하시던 <서궁(西宮)마마>를
무슨 까닭으로 영항에 감금하시라는 분부이시옵니까 ?"그러자 여 태후는 화를 발칵내며 말한다.
"백 번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년을, 너는 어째서 <서궁마마>라는 존칭으로 부르고 있느냐 ? 아무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당장 달려가 그년을 하옥시키란 말이다. 만약 나의 명령에 차질이 있게 된다면
너 자신도 무사치 못하리라."서릿발 같은 무서운 명령이었다.
태후의 명령이고 보니 여수는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수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아무 까닭도 없이 <척비를 하옥 시키라>는 태후의 명령이 너무도 무모하게 여겨져서 여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뢴다."마마의 분부대로 그분을 하옥은 시키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하옥시키면
매우 복잡한 사건이 발생할 것 같사오니, 그 점을 아울러 생각해 주시옵소서."
"그년을 하옥시킨다고 무슨 복잡한 사건이 발생한다고 하는 것이냐 ?"
여수가 예측한 대로, 태후는 앞뒤를 전혀 생각지 않고 무작정 명령을 내린 것이 분명하였다.
여수는 조용히 이렇게 대답하였다."마마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그분에게는 <여의>라는 아드님이
있사옵니다. 지금 <조왕(趙王)>으로 있는 아드님이 자신의 모친이 하옥된 것을 알게 되면 절대로
가만 있지는 않을 것이옵니다.조왕 자신은 아직 나이가 어려 별로 두려워할 존재는 못 되오나,
그의 곁에는 주창(周昌)이라는 명모사(名謀士)가 있사옵니다.만약 주창이 조왕모(趙王母)를 구출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켜 온다면, 그들을 어떻게 막아 낼 수 있을 것이옵니까 ?"
태후는 전혀 생각조차 못 했던 말에 크게 당황하였다. 지금 나라가 상중(喪中)에 있는 이 판국에,
주창이 <그년>을 구출하기 위해 대군을 몰아쳐 온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년>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 도망이라도 치는 날이면 영원히 복수를 못 하게 될 것이
아니겠나 ?
태후는 입술을 깨물며 오랫동안 심사 숙고하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결연한 어조로 말한다.
"나중에야 어찌 되든 간에 우선은 그년을 하옥시켜라. 그리고 나서 여의를 좋은 말로 꾀어다가,
그놈까지 죽여 없애 버리면 될 게 아니겠느냐."무서운 복수심이었다.그러기에 여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게 하실 바에는 그분을 옥에 가두어 나쁜 소문이 퍼지게 할 게 아니라, 숫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없애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옵니다."그러자 태후는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그건 안 될 말이다. 나는 그년 때문에 십 수년을 애간장을 태워 왔었다. 그년을 죽이기는 죽이되,
단박에 죽일 일이 아니라, 두고두고 애를 태우다가 몇 년후에나 죽일 생각이로다. 그래야만 나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이다."악독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여자들의 원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이렇게 태후의 말에는 무서운 독기(毒氣)가
서려 있었던 것이었다.
태후는 척비를 하옥시키고 나자, 이제는 조왕 여의까지 죽여 버릴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유방이 사망했음을 알리는 동시에, 신제(新帝)의 이름으로 위조조서를 작성하여 환관 양운
(楊雲)을 시켜 조왕에게 보냈다. 조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선제(先帝)가 돌아가신 뒤에, 너의 생모(生母)께서 병으로 위독하시니 빨리 오너라.>
조왕 여의의 나이는 이제 겨우13살이었다. 따라서 아직은 어머니의 슬하에서 모정을 받아야 하는
어린 상태였기에, 지금도 어린아이처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기에 여의는 조서를 받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즉석에서 재상 주창을 불러 상의한다.
"아바마마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께서 병을 얻으셔서 위독하다는 소식이 왔으니, 나는 장안으로 빨리
가 봐야 하겠습니다."주창은 문제의 조서를 면밀히 검토해 보고 나서 조용히 아뢴다.
"이 조서는 위조조서이오니, 대왕께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소서. 황제께서 붕어하신 것은 사실이오나.
대왕모(大王母)께서 병중이란 말은 근거 없는 거짓말 이옵니다."여의는 놀라며 말한다.
"이 조서가 위조 조서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 어머님이 병중이 아니라면 신제(新帝)인 형님께서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조서를 보내셨겠습니까 ?"주창이 다시 대답한다.
"신제께서 대왕 앞으로 조서를 보내신다면 반드시 친필 조서를 보내셨을터인데, 이 조서의 글씨는
신제의 필적이 아니옵니다. 필적이 다른 것을 어찌 진짜 조서로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
"그러면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거짓 조서를 보냈다는 말씀입니까 ?"
주창은 오랫동안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결연히 입을 열어 답한다.
"황실의 내분지사(內粉之事)이므로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여 황후께서는 옛날부터 대왕을 살해(殺害)
하려는 뜻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장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여 황후의 뜻을 쉽게 이룰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 선제(先帝)께서 돌아가신 뒤, 대왕모의 거짓 와병(臥病)을 핑계로 대왕을 장안으로 불러 올려
살해하려고 거짓 조서를 보낸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 어린 여의는 그 말을 얼른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경은 이 조서를 거짓조서라고 하시지만,
그 말씀을 믿고 상경하지 않았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그런 불효(不孝)가 어디있겠습니까 ?"
주창은 머리를 흔들며 다시 말한다."이 조서는 분명한 가짜조서이옵니다.
그것만은 신이 목숨을 걸고 단언할 수 있사옵니다.""어디다 근거를 두고 그런 장담을 하십니까?"
"필적도 신제의 필적이 아님이 분명하지만, 조서에 찍힌 어인(御印)도 황제께서 쓰시는 신인(信印)이
아니옵니다.게다가 폐하께서 조서를 보내실 때에는 여엿한 사신(使臣)을 보내는 법이온데,
이 조서를 가지고 온 양운이라는 자는 여 황후의 측근인 일개 환관에 지나지 않는 자 이옵니다.
그러므로 이런 조서를 믿고 상경 하셨다가는, 대왕의 신변에 커다란 재앙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음 ..... 정말로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이 양운을 적당히 달래서
돌려 보낼 터이니, 대왕께서는 신을 믿어 주시옵소서."
주창은 어린 조왕을 가까스로 달래 놓고, 이번에는 양운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황제께서 내리신 조서는 잘 받아 보았소이다. 대왕은 생모께서 중병중이라는 말씀을 들으시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오. 자식된 도리로서는 당장 문병을 가셔야 옳을 것이오.
그러나 공교롭게도 대왕 자신이 지금 신병으로 자리를 보존하고 누워 계시기 때문에 도저히 문병을
가실 형편이 못 되는구려. 귀공은 그리 알고 오늘은 돌아가셔서 이곳 사정을 사실대로 여쭤 주시오."
주창은 양운을 돌려 보낸 뒤에 조왕을 찾아와서 아뢴다."양운이라는 자를 듣기 좋은 말로 달래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두고 보십시오. 그자가 헛물을 켜고 돌아갔으니까, 여 태후는 조만간
다른 사신을 또 보내올 것입니다.그러나 저들이 사신이 아무리 여러 번 보내 와도, 대왕께서는 저들의
함정에 결코 말려들지 말아야 하옵니다.""알겠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경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조왕 여의는 우선 당면한 죽음을 모면할 수가 있었다. 한편, 여태후는 양운이 헛물을 켜고
돌아오자 길길이 분노하며 양운에게 따져 묻는다."조서를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병을 핑게로 오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 여의가 병 때문에 못 오겠다고 했으면, 네가 보기에도
그게 사실인 것 같더냐 ?""조왕을 직접 만나 보지는 못하고 주창을 통해 말만 들었을 뿐이옵니다.
짐작컨데 조왕은 병이 든 것은 아니오나, 주창이 앞을 가로막고 못 오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여 태후는 더 한층 분노를 금치 못했다."저런 죽일 놈이 있나 ? 주창이란 자가 중간에서
그런 농간을 부린다면, 이제는 그놈부터 죽여 없애야 하겠구나 ! "
한번 결심을 하게 되면 주저할 줄을 모르는 것이 여 태후의 성품이었다.
태후는 즉석에서 번쾌의 아들인 번항(樊亢)을 불러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그대에게 정병 5백 명을 줄 테니, 그대는 지금부터 한단(邯鄲)으로 달려가 주창이라는 자를 잡아
오도록 하여라. 만약 그자가 순순히 불려오지 않으려 한다면 목을 잘라 와도 무방하다."
번항은 명령을 받고, 곧 한단(邯鄲)으로 떠났다.
주창은 첩자들을 통하여 그런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대왕을 보내라면 못 보내겠지만, 나야 무엇이 두려워 못 가겠느냐. 나는 언제든지 소환에 응할 자신이
있다."주창(周昌)은 그만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왕 여의는 크게 걱정하며 만류한다.
"여 태후가 군사를 보내어 경을 부른다니, 무슨 까닭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함부로 가셨다가 무슨 변을
당하실지 모르니, 경은 가셔서는 아니되시옵니다."
2-111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