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하계스쿨링에서는 8월 23일, 중앙체육관에서 학광제가 성대히 열렸다. 그해 주제는 '잊지 마라 원점! 구축하자 전통!'이었다. 고기나 두부 꼬치구이 등을 파는 간이 음식점도 늘어섰다. 노래나 무용도 선보였다. 체육관 바닥에 망루를 설치하고, 그 주변에서 원을 그리며 함께 춤을 추는 봉오도리 시간도 있었다. 우정의 연대가 넓혀졌다. 어느 얼굴에도 기쁨이 넘치고, 도전하는 기개로 가득 차 있었다. 그곳에는 남녀노소가 모여 있었지만, '생애 청춘'의 활기가 있었다. 통신교육부가 2년째를 맞을 무렵부터 각지에서 통신교육부 학생들이 모여 정기적으로 학습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모든 통신교육부 학생이 서로 도우며 격려하려는 연대가, 구체적인 형태로 꽃핀 것이다. 또 학습회에 모이는 멤버가 중심이 되어 자주적으로 통신교육부 입학설명회를 연 지역도 있었다. 직접 전단을 만들어 참가를 유도하며 소카대학교 직원을 파견하도록 요청하고, 참가자와 간담을 나누는 자리도 기획했다. 새로운 전통은 새로운 도전과 행동의 발자취이다. '대학이 무엇을 해주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이다! 전통은 우리 손으로 구축해야 한다! 통신교육부 학생들은 그렇게 결심했다. 야마모토 신이치(이케다 선생님)가 개설식 메시지에서 강조한 '모두 통신교육부의 창립자'라는 말은 통신교육부 학생들의 확고한 자각으로 이어졌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어떻게 하면 통신교육부 학생이 학문에 힘써, 목적한 바를 이루고 졸업할 수 있느냐'는 문제로 늘 고심했다. 그리고 총장을 비롯해 교직원을 만날 때마다 그를 위한 여러 가지 조언을 거듭했다. 어느 날인가는 소카대학교에서 열리는 스쿨링에 참가하지 못하는 학생수를 듣고, 지방 도시에서 스쿨링을 개최하는 일도 검토하도록 제안했다. 소카대학교는 그 제안에 관해 협의를 거듭하고, 시험 삼아 1977년 12월 후쿠오카에서 처음으로 부기원리와 헌법 스쿨링을 개최했다. 지방에서 개최하는 스쿨링은 점차 개최지를 늘려, 전국 주요도시에서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1978년 4월, 통신교육부 제1기생은 3년차에 들어갔다. 1,2년차에 규정 학점을 취득하면 3년차부터는 모두 전문교육과목이 된다. 하계스쿨링에 모인 제1기생의 표정에는 예년보다 더 진지함이 감돌았다. 기숙사에서는 이런 대화도 오갔다. 갓 서른을 넘긴 청년이 전문교육과목이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다고 약한 소리를 했다. 그러자 노년에 접어든 통신교육부 학생이 힘주어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어렵다고 하는데, 교과서를 몇 번이나 읽어보았나. '독서백편의자현 (讀書百遍義自見, 책이나 글을 백번 읽으면 그 글에 담긴 속뜻이 저절로 이해된다는 뜻으로 학문을 열심히 탐구하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음을 가리키는 말)'이라 하지 않는가. 모른다고 바로 포기하지 말고, 알 수 있을 때까지 읽어야지. 나는 나이가 들어 자네보다 더 힘들다네. 내 경우에는 한계에 도전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계에서 도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자네는 나보다 훨씬 젊지 않나. 힘내게!" 청년은 엄하고도 따뜻한 말에 분기했다. 문호 톨스토이는 "인생은 한계에 도전해 자기 경애를 확대하는 일이다."라고 썼다. 한계는 자기 마음이 만들어 낸 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해마다 스쿨링 기간 중에 학광제가 열리는 데, 그해 학광제 주제는 '한계에서 도전'이었다. 그 주제는 분명히 통신교육부 학생들의 실감이자 기개이기도 했을 것이다. 1978년 하계스쿨링에서는 국가시험 설명회가 열렸다. 통신교육부 학생들은 사법고시를 비롯해 공인회계사, 세무사, 사회보험노무사 등 국가시험에 높은 관심을 갖고 설명회 개최를 요망하는 의견을 냈다. 설명회가 열리는 강의실에는 300명 가까이가 몰려들어 국가시험연구실 실장 등이 설명하는 내용에 진지하게 귀 기울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법고시에 현역으로 합격한 소카대생(통학과정)의 합격체험 발표가 참석자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 도전의 드라마는 모든 참석자 마음에 격려가 되었으며 용기를 크게 북돋웠다. 이날 설명회에는 모터보트경주 선수인 통신교육부 학생이 참석하고 있었다. 도쿠시마에서 온 이와카와 다케시이다. 이와카와는 도쿠시마에서 고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제지회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터보트경주 선수의 길로 진출했다. 1973년에 데뷔하고 머지않아 결혼했다. 1976년 4월, 이와카와는 소카대학교에 통신교육부가 개설되었음을 알았다. 이와카와는 모터보트경주 선수를 평생 직업으로 삼기는 어렵다고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앞으로 오래도록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직업을 구하려면 공부를 더 해야 겠다고 생각하며 통신교육부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했다. 모터보트경주 선수로서 각지에서 열리는 경기에 출전하면서 리포트를 작성했다. 하계스쿨링에도 참가했다. 그러다 별 생각 없이 국가시험 설명회에 참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카와는 국가시험 합격자의 체험을 듣고 이렇게 결심했다. '나도 국가시험에 도전해보자!' 체험에는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는 인간의 고뇌가 있고, 도전이 있으며 실증이 있다. 그러므로 체험에는 설득력이 있으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교육은 지식뿐 아니라 긴 인생을 활기차게 끝까지 살아갈 힘을 기르는 일이 중요하다" 이 말은 도다 조세이의 지론이었다. 그런 뜻에서도 체험발표는, 인간교육을 위한 중요한 교재가 된다. 처음에 이와카와는 가장 돌파하기 어렵다는 사법고시를 목표로 하고자 했다. 하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을 고려해 사법서사시험에 도전하기로 했다.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통신교육부 공부에 국가시험 공부까지 더해졌다. 하지만 어렵고 힘들수록 투지가 솟았다. 한편 이 무렵부터 이와카와는 모터보트경주 성적이 잘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시험공부를 계속 해야 하는가, 모토보트경기 선수로서 철저히 단련해야 하는가… ….' 이대로라면 어느 쪽도 어중간하게 끝나버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와카와는 1979년 말에 모터보트경기 선수를 그만두고 물러나 공부에 전념했다. 얼마 동안은 퇴직금으로 생활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2년이 한도였다. 아침부터 도서관에 가고, 밤에는 집에서 공부에 힘썼다. 이듬해 1980년 7월, 처음으로 사법서사 필기시험을 치렀다. 마음만 초조해져 형편없는 결과로 끝났다.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은 앞으로 1년뿐이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심정으로 새롭게 출발하고자 결심하고 하계스쿨링에 참가했다. 그해 학광제에는 야마모토 신이치가 참석해 '자기에게 이기는 인생을'이라고 강조했다. 이와카와는 강한 전류를 맞은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 진정으로 내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시험이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그렇기에 전혀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 나 자신에게 이기면 된다.' 이와카와는 분기했다. 마음 깊이 소카대학교 통신교육부 학생답게 사회에서 실증을 보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전수학교에서 답안연습 통신 지도를 받으며 사법서사 시험공부를 거듭했다. 점차 학습한 보람을 확실히 실감하기 시작했다. 1981년 3월, 이와카와는 소카대학교 통신교육부 제2기생으로 졸업했다. 그리고 7월, 두번째 사법서사 필기시험을 치렀다. 시험이 끝날 쯤에는 모아둔 돈도 거의 바닥이 나서 8월부터 택시 운전사를 하며 10월에 있을 발표를 기다렸다. 합격이었다. 그 후 구두시험에도 합격해 정식으로 사법서사가 됐다. 1979년 하계스쿨링 때는 소카대학교 통신교육부 학생을 위해 두번째 국가시험 설명회를 열었다. 이때 법학부 4년차를 맞은 후지노 에쓰요라는 통신교육부 학생이 사회보험노무사 합격체험을 발표했다. 후지노는 8년 전인 서른네살 때, 사회보험노무사 시험에 합격했다. 후지노의 남편은 토목청부업을 경영했는데 1962년 말쯤에 많은 빚을 남기고 행방불명이 됐다. 집도 토지도 처분했지만, 부채는 남았다. 아이들과 어머니를 데리고 할머니 집에 몸을 의지했다. 천장에서 빗물이 새는 집이었다. 앞으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생각하니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울고 있을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낮에는 세무사사무소에서 일하고, 밤에도 경리 일을 했다. 조금이라도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필사적이었다. 아이들 옷은 헌 옷을 얻어 입혔다. 새 옷을 입고 싶다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딸을 보니 안타까움에 가슴이 아팠다. 계속 일해서 5년 만에 빚을 모두 갚았다. 하지만 장래를 생각하니 돈을 더 벌어야 했다. 그러려면 무언가 자격증을 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사회보험노무사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회보험노무사는 중소기업 등의 의뢰를 받아 노동이나 사회보험에 관한 신청과 보고를 하거나 이의신청 등을 하는 전문가다. 후지노는 1970년 봄부터 독학으로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노동기준법을 비롯해 노동자재해보상보험법, 건강보험법, 후생연금보험법 등이었다. 법률은 전혀 미지의 분야였다. 공부는 심야에 할 수밖에 없었다. 짧은 틈도 놓치지 않으려고, 욕실 안에도 책에 비닐을 씌워서 가지고 들어가 공부했다. 괴로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늘도 새로운 사실을 하나 더 외웠다고 생각하면 신이 났다. 매사에 기쁘게 임하는 사람은 강하다. 왜냐하면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의 발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