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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百濟) 왕릉(王陵)과 금송(金松)과의 관계(關係)
2025년 02월 02일
"백제 왕릉급 무덤 동하총 목관, 250살 금송으로 제작"
송고시간 / 2019-10-17 17:14
국립부여박물관 '능산리' 심포지엄서 연구 결과 공개
◉동하총 목관 재현품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백제 사비 도읍기(538∼660) 왕릉급 무덤이 모인 「부여 능산리고분군」에서도 큰 고분으로 분류되는 동하총(東下塚) 목관을 수령 250년 이상 금송(金松)으로 제작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신용비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동하총(東下塚) 목관 뚜껑판 일부를 컴퓨터단층촬영(CT) 장비로 조사한 결과, 목재 지름은 56㎝ 이상이고 수령은 251년 이상으로 추정됐다고 17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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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記事) 제목(題目)’부터가 의미심장(意味深長)하다. 곧 "백제 왕릉급 무덤 동하총 목관, 250살 금송으로 제작"이라고 하였으니 말이다. “왕릉(王陵)”이라고 특정(特定)하지 못하고 “왕릉급(王陵級)”이라는 말일 게다. 즉(卽) “특정(特定)한 아무개 왕(王)의 릉(陵)”은 아니지만, 왕릉(王陵)에 비교(比較)될만한 어떤 이의 묘지(墓地)다”라는 이야기다.
❶ 바로 ‘아래의 글’을 보면 : ➨「동하총(東下塚) 목관 재료는 대부분 소실됐으나, 마구리(길쭉한 물건의 양 끝에 대는 것) 금동장식판과 금동제 관정(관에 사용하는 못) 등이 남았다.」라고 하였는데, 이미 대부분 소실(燒失)【불에 타서 없어짐】이 아닌 소실(消失)【사라져 없어져 버림】일 것이고, 또 소실(消失)이 아닌 “1천 4-5 백년(百年) 오랜 세월 땅속에 있었으므로 썩어 없어진 곧 부식(腐蝕)되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이게 옳은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뚜껑 판 일부가 남아 있어 컴퓨터 단층촬영을 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분명하게 ‘기자의 기사 내용’을 보면 : ➨「동하총(東下塚) 목관 재료는 대부분 소실됐으나, ‘마구리(길쭉한 물건의 양 끝에 대는 것) 금동장식판과 금동제 관정’(관에 사용하는 못) 등이 남았다.」라고 하였다.
남아있는 것은, 오직 「마구리(길쭉한 물건의 양 끝에 대는 것) 금동장식판과 금동제 관정(관에 사용하는 못) 등이 남았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잖은가?
➋ 「이곳은 이미 AD 1,915년도에 일제(日帝)의 학자(學者)들에 의해 발굴(發掘)되어 조사(調査) 보고서(報告書)까지 나온 것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대부분(大部分) 소실(消失)’ 되어버린 ‘목관’에서 무엇을 얻어내 ‘단층촬영’을 할 수 있었을까? 「혹시(或是)나 1,915년 일제(日帝) 학자들이 도굴(盜掘) 또는 발굴(發掘)하였을 때, “무언가를 슬쩍 던져 넣고 나와 복구(復舊)한 뒤, 해방(解放) 이후(以後), 우리 학자(學者)들이 이곳을 ‘발굴’할 때 발견(發見)되어, 이것에 대한 컴퓨터 단층촬영 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무엇으로 이를 증명(證明)할 텐가?」
일본인(日本人)들은 열도(列島) 땅인 “지” 나라 땅 안에서도 수차례에 걸쳐 고고학(考古學) 유적(遺跡)을 발굴(發掘)하면서 조작(造作)한 예(例)가 있기 때문에, 일인(日人) 학자(學者)들을 신뢰(信賴)할 수 없다. 특히 “반도(半島)와 열도(列島)와 관계(關係)되는 것”에는 이들은 왜곡(歪曲), 조작(造作)도 망설임 없이 서슴치 않고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러한 파렴치(破廉恥)한 일을, 천손족(天孫族)을 향(向)한 애국심(愛國心)이라고 생각하며, 포장(包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疑問)은,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 때에 발굴(發掘), 도굴(盜掘)된 여러 무덤에서 공통점(共通點)으로 의심(疑心)되는 장면(場面)들이다.
➥ 또 하나는, 「반도(半島) 땅 이곳저곳에서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 또는 그 이전(以前) 일인(日人) 학자(學者)들이나 관료(官僚)들에 의해 발견(發見)되었다」라는 많은 금석문(金石文) 곧 정계비(定界碑), 비석(碑石) 등을 보면 : 「5,000년(年) 역사(歷史) 이래(以來), 이 땅 “화려(華麗)한 금수강산(錦繡江山) 삼천리(三千里)” 땅에서 살아가던 ‘조선족(朝鮮族)=한민족(韓民族)’은, 문자(文字)도 몰라 “응응”하며 살았으며, 언어(言語)【말】도 없고, 몰라… …개(犬)처럼 ‘멍멍’대며, 돼지(豚)처럼 ‘꿀꿀’대며, 소(牛)처럼 ‘음메’하며, 살았다는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도대체 이게 뭔가? ‘조선족(朝鮮族)=한민족(韓民族)’은, 글자도 모르고, 언어(言語)도 없어 “지”나라 땅 안에 ‘서’ 있는 비석(碑石)이나 정계비(定界碑)조차도 그것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고,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모든 것들이 일제(日帝)와 그 하수인(下手人)들에 의해 식민지(植民地) 전후(前後)에 발견(發見)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이러한 일들은 “조선족(朝鮮族)=한민족(韓民族)”을 한(限)없이 업신여기고, 능멸(凌蔑)하고 있는 생생(生生)한 증거(證據)들이다.
이러한 것도 모르고, 여기에 ‘부화뇌동(附和雷同)=뇌동부화(雷同附和)’하는 한국인(韓國人)들을 보면 : 이를 어찌할까?
금송(金松)에 대하여
➌ 「금송(金松)」 : 금송(金松)에 대한 정보(情報)는 아주 제한적(制限的)이다. 오늘날 일부(一部)에서는 ‘일본(日本)의 원산지(原産地)’로 ‘고가(高價)의 정원수(庭園樹)’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日本)이 원산지(原産地)라는 “금송(金松)”은 소나무(松)와는 전혀 다른 낙엽송계(落葉松系)의 정원수(庭園樹)로 재배(栽培)하는 수종(樹種)이다. 산(山) 또는 산맥(山脈) 등에 자생(自生)하는 금송(金松)이라는 수종(樹種)과는 또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현재(現在)의 일본(日本)에서는, 「오사카 남부의 코우야산[高野山] 에서 주로 자라며, 그 코우야산[高野山]의 나무라는 뜻이다【출처(出處) : 나무위키】」라고 설명한다.
일부(一部)에서는 “금송(金松)”은, 절강성(浙江省) 등지(等地)가 원산지(原産地)라는 설명(說明)도 하고 있는데, 상해(上海)에는 금송로(金松路)도 있다.
➨ 금송(金松) 원산지(原産地) : 절강성(浙江省) 台州市[타이저우시]【출처(出處) : 000000000 : 개인 정보보호를 위한 것입니다】로, 뒤에 일본(日本)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된다. 태주시 토산 수종(台州市 土山 樹種)이라고 전한다.
➨ ‘문암’님이 올려놓으신 유튜브 : 낙기산(洛基山) 해발고도 ‘2,000m’에서 자라는 ‘금송(金松)=낙협송(落叶松)’ 은, “우리가 말하는 금송(金松)이 아닌 ‘낙협송(落叶松)=낙엽송(落葉松)’을 말하는 것이다”
◆ 〈또 설명(說明)하기를 : 무령왕과 그 부인을 합장한 왕릉 출토 목관(木棺)은 그 재료가 이 ‘지구상에서 오직 일본열도에서만 자란다는 금송(金松)’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후대에 편찬된 문헌에 기록된 흔적들보다 백제와 왜(倭)는 훨씬 밀접한 관계에 있었음이 관재(棺材)에 대한 분석 결과가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이는 목재조직학이 이룩한 성과였다. 경북대 산림자원학과 박상진(朴相珍) 교수는 목재조직학이 전공. 이 무령왕 부부관 나무가 금송임을 밝혀낸 주인공이다 【출처(出處) : 연합뉴스 <목재조직학자 박상진 교수가 보는 한국역사> 입력 2004.03.16. 오후 3:58】〉라고 기사(記事)는 전(傳)한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 여기서 「우리나라 사학자(史學者) 또는 관련(關聯) 학자(學者)들이 간과(看過)하고 있는 것」은 : 「21세기 오늘날에는 금송(金松)이 열도(列島)의 특산(特産), 토산(土山)이라고 한다」라고 하더라도 「과연(果然) 6세기 곧 1,400-1500년(年) 전(前)에도 오늘날의 열도(列島) 특산(特産)이었을까?」하는 문제(問題)다.
반도(半島)의 사학자(史學者)들이나 관련 학자(學者)들은 「오늘날의 열도(列島) 땅에 수천(數千) 년(年) “왜(倭), ➨일본(日本)이 있었다.”」라는 가정(假定) 아래 모든 역사해설(歷史解說)이나 기타 관련(關聯)된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다.
➥➥➥ 만약(萬若), 「열도(列島) 땅에 19세기(世紀) 이전(以前) 역사서(歷史書)【고전(古典) 원전(原典)】속에 “왜(倭), ➨일본(日本)은 오늘날의 열도(列島) 땅에 없었다”라고 한다면 어찌 될 건가?」 AD 1,945년(年) 이래(以來) 한민족(韓民族)에게 거짓 역사(歷史)를 주입(注入)한 것이 되고, ‘대국민(對國民) 사기극(詐欺劇)’을 벌인 것인 것이 되는 중차대(重且大)한 일대사(一大事)가 되는 것이다.
실제(實際) 오늘날 상존(尙存)하는, 현존(現存)하고 있는 옛 역사서(歷史書) 속에 「“옛 왜(倭), ➨일본(日本)이 있었다”라는 기록(記錄)은 없다.」 많은 원전(原典) 속에 당시(當時)의 왜(倭)는 ‘남(南) 아세아(亞細亞) 땅(地)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 특히 「목재(木材)의 구조(構造)로 볼 때, 열도(列島)에 있는 “금송(金松)”과 그 조직구조(組織構造)가 똑같았다」라는 말은, 출토(出土)된 부식(腐蝕)된 금송(金松)의 파편(破片) 또는 일부(一部)는, AD 1,915년 당시(當時) 발굴과정(發掘過程)에서 목적(目的)을 가진 누군가가 고의적(故意的)으로 남겨 놓았을 확률(確率)이 매우 높은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疑懼心)은 매우 합리적(合理的)이고 합당(合當)한 것이다.
왜냐하면 「5∼6세기(世紀) 열도(列島) 땅에 “왜(倭)”는 없었으며, ‘2 만리(萬里)’쯤 떨어져 있는 서(西)쪽의 남아세아(南亞細亞) 땅에 있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왜(倭), ➨ 일본(日本)은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 카페(Cafe) “문무의 조선사 해설” 게시판(揭示板)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논거(論據)와 함께 “왜(倭), ➨일본(日本)”의 본거지(本據地)에 대한 많은 해설(解說)이 게재(揭載)되어 있다.
이러한 해설(解說)은 : 필자(筆者)의 사견(私見)이 아니다. 옛 고전(古典) 원전(原典) 속에 있는 내용(內容)을 번역(飜譯)하여 해설(解說)하며,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나 자연(自然) 환경적(環境的) 요소(要素)를 함께 설명(說明)하고 있을 뿐이다.
“금송(金松)과 무녕왕릉(武寧王陵)”에 대하여 설명(說明)하려면 : 기본적(基本的)으로 고전(古典) 원전(原典) “왜(倭), ➨일본(日本)”편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많은 고전(古典)이 있으나, 하나의 예(例)로 : “송사(宋史) 일본(日本)” 편의 토산물(土産物)을 보면 : 「오늘날의 “열도(列島)” 땅은 “절대로 왜(倭), ➨일본(日本)” 땅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음 편으로 “지형지세(地形地勢)와 토산물(土産物)”로 보는 “왜(倭) ➨일본(日本)”의 본거지(本據地)에 대한 해설(解說)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못다 한 이야기를 대신할까 합니다.】
宋史 / 四百九十一 / 列傳卷第二百五十 外國七 【開府儀同三司上柱國錄軍國重事前中書右丞相監修國史領經筵事都總裁臣脫脫等奉敕修】 송사(宋史) 일본국(日本國) 편을 보면 : 〈其地東西南北各數千里,西南至海,東北隅隔以大山,山外即毛人國。: 그 땅은 동서남북(東西南北) 각 수천리(數千里)로, 서(西)쪽과 남(南)쪽은 바다에 이르고, 동(東)쪽과 북(北)쪽 모퉁이는 큰 산에 막혀 있는데, 산(山) 밖으로는 모인국(毛人國)이 가깝다. 畜有水牛、驢、羊,多犀、象。: 짐승(畜)으로 물소(水牛), 나귀(驢), 양(羊)과 많은 무소(犀 : 코뿔소)와 코끼리(象)가 있다. 產絲蠶,多織絹,薄緻可愛。: 산업(産)에는 명주와 누에를 치며, 비단이나 명주를 짜는데, 엷고 촘촘한 것을 좋아한다(사랑한다). 樂有中國、高麗二部。: 음악은 중국(中國)과 고려(高麗) 악(樂) 2부(部)가 있다. 四時寒暑,大類中國。: 사계절은 춥고, 덥다. 國之東境接海島,夷人所居,身面皆有毛 : 나라의 동(東)쪽 지경(地境)에 섬(島)과 접(接)해 있는데, 이인(夷人)이 사는데, 신체와 얼굴 모두에 털이 있다〉라고 하였다.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宋史》是中國官方歷史著作二十四史之一,記錄了宋朝(960年-1279年)的歷史。 於元朝(1271年-1368年)末至正三年(1343年)由元朝丞相脫脫和阿魯圖先後主持,與《遼史》、《金史》同時修撰。元修《宋史》共有496章,包括宋代皇帝的傳記以及宋代政治家、士兵和哲學家的當代記錄和傳記。《宋史》是中國二十四史中最龐大的一部史書。
➨ 「열도(列島) 일본(日本)」 땅에 「물소(水牛), 나귀(驢), 양(羊)과 많은 무소(犀 : 코뿔소)와 코끼리(象)」등과 같은 동물(動物)들이 살아가고 있는가? 에 먼저 답(答)해야 하는 것이다. 「그 ‘관재(棺材)’로 쓴 목재(木材)가 열도(列島) 땅의 것과 구조적(構造的)으로 똑같다」라는 설명(說明)을 어떻게 이해(理解)해야 할까?
누가 이를 증명(證明)하고 고증(考證)했는가? 하는 문제(問題)에 답(答)할 수 있어야 한다. 누가 답(答)했는가?
➨➨➨ 결국(結局), 무녕왕릉(武寧王陵)에 쓰인 목관의 재질(材質)이 금송(金松)이며, 21세기(世紀) 오늘날 일본(日本)에만 자라는 “금송(金松)”이므로, 반도(半島) 전라도(全羅道) 땅은 왜(倭)와 관계(關係)가 있으며, 「이는 열도(列島)에 왜(倭)가 있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위한 증거(證據)키 위한, 고증(考證)키 위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과연(果然) AD 500年 경의 백제(百濟)가 반도(半島)에 있었을까? 또 당시(當時) 왜(倭)가 열도(列島)에 있었을까? 이건 모두 고증(考證)되지 않은 오직 주장(主張)일 뿐이다.
만약(萬若) 식민사학자(植民史學者)들의 말대로라면 : 조선왕조(朝鮮王朝)와 가장 밀접(密接)하게 관계(關係)하고 있던 천조국(天朝國) 중국사(中國史)에서 말하는 백제(百濟)에 대한 명쾌(明快)한 답(答)을 내놓아야 함에도 누구 한 사람도 명쾌(明快)한 답(答)을 내놓지 못하고 어물정 적당히 넘어가고 있지 않는가!
금송(金松)이 열도(列島)에만 있다는 말은, 21세기(世紀)의 설명(說明)일 뿐이다. 이걸 증명(證明)하려면 : 5∼6세기(世紀)에도 열도(列島)에 “왜(倭), 일본(日本)”이 있었다는 증거(證據)를 내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금송(金松)”이라는 나무가 이 지구(地球)에서 사라지고 오직 “열도(列島)” 땅에서만이 자생(自生)하고 있고, 「반도(半島) 땅의 무녕왕릉(武寧王陵)의 관(棺)에 쓰였다」라고 한다면 : 여기서 따져볼 수 있는 것은,
㈠ ‘무녕왕릉(武寧王陵)’이라고 말하는 무덤의 진짜 주인공(主人公)은 “백제(百濟) 무녕왕(武寧王)”아닌 「반도(半島) 땅의 토호(土豪) 또는 호족(豪族)의 무덤일 수밖에 없다.」
첫째, 「역사서(歷史書)에 백제(百濟)가 반도(半島) 남(南)쪽 땅에 있었다는 직접적(直接的)인 증거(證據), 고증(考證)이 없다」라는 것이고, 둘째는, 「무녕왕(武寧王) 이전(以前)의 여러 왕릉(王陵), 이후(以後)의 여러 왕릉(王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㈡ 더하여 「왜(倭), 일본(日本)은 당시에 열도(列島)에 없었다」라는 것이 고전(古典) 원문(原文)에서 설명(說明)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그 무덤에서 “AD 1,915년(年) 일인(日人) 학자(學者)”들이 발굴(發掘) 당시(當時)에 은밀(隱密)하게 도굴(盜掘)한 뒤, 그곳에 그대로 남겨 놓았다」라는 반론(反論)에 대한 설명(說明)이 전혀 없다는 것이고,
➥「관재(棺材)의 조그만 파편(破片) 또는 조각은, 일본(日本)에서 자라는 금송(金松)과 같은 것이다.」라는 주장(主張)은, 「그것이 열도(列島) 금송(金松) 파편(破片) 또는 일부 조각이다」라는 반론(反論)에 힘이 실리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무슨 뜻인가? AD 1,915년(年) 일인(日人) 학자(學者)들은 “반도(半島) 조선(朝鮮)을 증거(證據), 고증(考證)할 수 있는 직접적(直接的)인 물증(物證)을 확보(確保)하기 위해 혈안(血眼)이 되었을 시기(時期)다. 이런 그들이 발견(發見)치 못하고 그대로 덮었다는 말을 순진(純眞)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식민(植民) 사학자(史學者)들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십(數十) 년(年) 뒤에 우연(偶然)이, 또 우연(偶然)이 겹치는 것은 우연(偶然)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가 은밀하게 그곳에 왕릉(王陵)급 묘지(墓地)가 더 있을 것이다」라는 정보(情報)는, 당시(當時)의 남한(南韓) 사학자(史學者)들에게는 오랜 가뭄 뒤의 ‘비’소식일 것은 누구도 부인(否認)하지 못한다.
우연(偶然)에, 우연(偶然)이라! 이건 우연(偶然)이 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은밀(隱密)한 정보(情報)는 어디로 부터 나온 것일까? 이건 ‘뻔할 뻔 자’다.
「왜(倭), 일본(日本)」이 남아세아(南亞細亞)로부터 계속 밀려난 것은, 기독교(基督敎)를 앞세운 서세(西勢)의 압력(壓力)과 무력(武力) 때문으로【해국도지(海國圖志)에 자세(仔細)한 내용(內容)이 생생(生生)하게 기록(記錄)되어 있다】, 이들 “왜, 일본(日本)”이 오늘날의 열도(列島)를 정복(征服), 정착(定着)하기 전(前)의 “열도(列島)” 땅은 “반도(半島)인들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라는 증거(證據)가 될 수 있다.” 【열도(列島) 땅은, 19세기(世紀)에 크고 작은 수많은 전쟁(戰爭)과 전투(戰鬪)가 벌어졌었다. 물론(勿論) 현대사(現代史) 곧 일본사(日本史)는, 이를 전혀 다른 이름으로 포장(包裝)해 놓고 설명(說明)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역설적(逆說的)인 이야기지만 금송(金松) 때문이다. 그렇게 「귀한 “금송(金松)” 목재(木材)가 반도(半島) 땅의 “토호(土豪)나 호족(豪族)들의 관재(棺材)로 사용되었다」라는 이야기는, 「열도(列島)에서 반도(半島) 본국(本國)의 명령(命令)에 따라 조공(朝貢), 헌상(獻上)한 것이다」라는 추측(推測)이 가능(可能)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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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연구사는 부여박물관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백제학회, 부여군과 함께 18일 여는 '사비백제 고분문화의 중심, 능산리' 학술심포지엄에서 이 같은 내용의 목관 분석 결과와 복원 방법을 발표한다.
‘능산리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무덤 6기에 대한 조사가 진행됐고, 1971년 보수공사 도중에 한 기가 추가로 발견돼 7기가 정비됐다. 동하총은 아래 열 동쪽에 있는 무덤으로, 무덤방에 그려진 벽화로 유명하다.
동하총(東下塚) 목관 재료는 대부분 소실됐으나, 마구리(길쭉한 물건의 양 끝에 대는 것) 금동장식판과 금동제 관정(관에 사용하는 못) 등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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➌ 「부여 능산리 고분군 [扶餘 陵山里 古墳群] 백제 사비시대 왕들의 안식처 / [출처(出處) : 우리역사 넷]」
➨ 〈고분의 최초 조사는 1915년 7월 구로이타 가쓰미(黒板勝美)와 세키노 다다시(関野貞)가 각각 조사단을 이끌고 실시하였다. 이때 사비도성 동쪽의 능산리산 남사면 하단부에서 왕릉급 6기의 고분을 확인하였고, 이를 각각 동하총(東下塚), 중하총(中下塚), 서하총(西下塚), 서상총(西上塚), 중상총(中上塚), 동상총(東上塚)이라고 이름 붙였다. 고분에 대한 조사 결과는 『조선고적도보 3(朝鮮古蹟圖譜 三)』(1,916년 발간)에 실렸다. 이 고분들이 순서대로 능산리 1~6호분이다. 이후 1,971년 사적 보수공사를 진행하며 6기의 고분 위로 1기의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현재의 7호분이다. 1,966년 발견되었으나 복원되지 않은 동하총(1호)과 중하총(2호) 사이의 고분(8호)까지 포함하면 총 8기가 된다. 능산리 동고분군은 1,938년 조사되었으며, 능산리 서고분군은 발견은 1,917년 『대정 6년도 고적 조사보고(大正六年度古蹟調査報告)』에서 확인되나, 실제 발굴조사는 2,010년대에 들어서야 실시된다〉라고 하였다.
이미 「일제(日帝)가 발굴(發掘)하였음에도 이곳에서 백제(百濟)를 증거(證據) 한다거나, ‘백제(百濟) 왕릉(王陵)’이라는 그 어떠한 것도 발견(發見)되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만약(萬若) 이곳에서 백제(百濟) 왕릉(王陵)이라고 할만한 확실한 지석(誌石)이나 물증(物證) 등이 나왔다면 일제(日帝)가 소리소문없이 그대로 덮어두었을까?
➥ 또 함께 발굴(發掘)되었다는 왕비(王妃)의 왼쪽 손목 ‘팔찌’, 그곳에 경자년【庚子年 520年】에 ‘장인(匠人) 다리(多利)’가 ‘대부인(大夫人)’을 위해 만들었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라고 하는데, 우선적(優先的)인 것은, “백제사(百濟史)”에서 왕비(王妃)를 대부인(大夫人)이라고 불렀다는 것을 고증(考證)하였는가? 아니면 추측(推測)일 뿐인 건가?
백제사(百濟史)에서, “왕비(王妃)”를 “대부인(大夫人)”이라고 칭(稱)하지 않았다면 : 무녕왕릉(武寧王陵)은 무녕왕릉(武寧王陵)이 될 수 없으며, 부인(婦人)이 “대부인(大夫人)” 칭호(稱號)로 불렸다면 : 그의 남편(男便)은 “대부(大夫) 또는 토호(土豪)” 정도(程度)의 관료(官僚)였을 가능성(可能性)이 큰 것이지, “백제(百濟)의 무녕왕릉(武寧王陵)” 일 수는 없는 일이다.
기사(記事) 내용(內容)으로 보면 : 부식(腐食)되어 소실(消失)되었다는 목재(木材)의 ‘샘플’을 어디에서 구(求)해 ‘단층촬영’을 했는가? 그것이 문제(問題)다.
‘송산리고분군’의 ‘1∼6기’는 이미 일제강점시기(日帝强占時期)에 발굴(發掘)되었다는 것이고, 무녕왕릉(武寧王陵)은, 1971년 5∼6호기 보수공사 때 우연(偶然)이 발견(發見)되었다고 전(傳)해진다.
그런데 또 다른 곳에서는 설명(說明)하기를 ‘우연(偶然)히 발견(發見)되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5∼6호기를 개보수하면서 발견(發見)했다는 것은 무엇이고… …일제(日帝)가 발굴조사(發掘調査)를 할 때 ‘1∼6호기’를 모두 했다고 하면서도, 무녕왕릉(武寧王陵)은 왜 발견(發見)치 못했을까? 일제(日帝)가 고의적(故意的)으로, 후대(後代)의 한국인(韓國人)들을 위해 남겨 놓은 것은 아니고… …바로 오늘과 같은 상황(狀況)을 두고 말이다.
곧 일제(日帝)가 발굴(發掘)하니, 무녕왕(武寧王, 462~523)의 왕릉(王陵)이었다고 대서특필(大書特筆)해봤자 이걸 누가 믿겠나? 물증(物證)이 없는데 말이다. 이걸 역이용(逆利用), 한국인(韓國人) 스스로 발굴(發掘)하게끔 그대로 덮어두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곧 터널을 만들어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일제(日帝) 발굴단(發掘團) 몇 중요(重要) 인물(人物)들은 다 알고 있었고, 터널을 똑같이 마감처리하고 그대로 나왔다는 것이다.
당시(當時) 일제(日帝)는, 「반도(半島) 조선(朝鮮)」을 만들기 위해 혈안(血眼)이 되어 있을 시기(時期)다. 이걸 알면서도 스스로 외면(外面)하는 반도인(半島人)들의 머릿속에는 과연(果然) 무슨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까?
여기에서 파생(派生)된 것이 ‘토착왜구(土着倭寇) 세력(勢力)’이요, ‘친일사대주의자(親日事大主義者)’들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알만한 분들이 이러한 세력(勢力)이요,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들이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무녕왕릉(武寧王陵)의 지석문(誌石文)이라는 것을 보면 : 초라하지 못해, 조그마한 군(郡)의 태수(太守)의 것만도 못한 돌(石)에, 글자 또한 몇 개 되지도 않는 웃기는 모습이요, 문장(文章)이다.」
당시(當時) 백제(百濟)의 흥성(興盛)과 국세(國勢)를 보면 : 출토(出土)된 지석(誌石)은 누군가가 급하게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면… …지석(誌石)일 수 없다는 뜻과 같다.
즉(卽) 이것이 진짜 무녕왕(武寧王, 462~523)의 것인지를 무엇으로 고증(考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로… …고증(考證)했다? 차라리 백제(百濟)는 왜(倭)의 속국(屬國)이었다는 말과 같은 이야기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근대(近代)에 일제(日帝)가 만들어 낸 조작품(造作品)이라는 이야기는 헛소리가 아니다.」라는 것쯤은 알아두어야 한다.
◆ 지석문(誌石文)의 사례(事例)를 보자. 대륙에서 발견(發見), 출토(出土)된 지석문(誌石文)은 쌓아 놓을 곳이 마땅치 않을 정도로 많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모두가 무녕왕릉(武寧王陵) 지석문(誌石文)보다 더 값지고, 훌륭한 것들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지석문(誌石文) 내용(內容)이라는 건가?
(1) 무녕왕릉(武寧王陵) 지석문(誌石文)
➨〈表面〉
武寧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月壬辰崩
到乙巳年八月
癸酉朔十二月甲申 安厝
登冠大墓立志如左
➨〈裏面〉
丁午丙巳戊辰乙卯甲寅己丑癸子壬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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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여융묘지명(扶餘隆墓誌銘)
公諱隆字隆百濟辰朝人也元□□孫啓祚暘谷稱雄割據一方跨躡」
千載仁厚成俗光揚漢史忠孝立名昭彰晉策祖璋百濟國王沖撝淸」
秀器業不羣貞觀年詔授開府儀同三司柱國帶方郡王父義慈」
顯慶年授金紫光祿大夫衛尉卿果斷沈深聲芳獨劭趨藁街而沐」
化績著來王登棘署以開榮慶流遺胤公幼彰奇表夙挺瓌姿氣蓋三」
韓名馳兩貊孝以成性愼以立身擇善而行聞義能徙不師蒙衛而□」
發慙工未學孫吳而六奇閒出顯慶之始王師有征公遠鑒天人深知」
逆順奉珍委命削衽歸仁去後夫之凶革先迷之失款誠押至襃賞荐」
加位在列卿榮貫蕃國而馬韓餘燼狼心不悛鴟張遼海之濱蟻結丸」
山之域皇赫斯怒天兵耀威上將擁旄中權奉律呑噬之筭雖」
稟廟謀綏撫之方且資人懿以公爲熊津都督封百濟郡公仍」
爲熊津道摠管兼馬韓道安撫大使公信勇早孚威懷素洽招攜邑落」
忽若拾遺翦滅姦匈有均沃雪尋奉明詔脩好新羅俄沐」
鴻恩陪覲東岳勳庸累著寵命日隆遷祑太常卿封王帶方郡公事君」
竭力徇節亡私屢獻勤鎖留宿衛比之秦室則由余謝美方之漢朝」
則日磾慙德雖情深匪懈而美疢維幾砭藥罕徵舟壑潛徙春秋六十」
有八薨于私第贈以輔國大將軍諡曰公植操堅慤持身謹正高」
情獨詣遠量不羈雅好文詞尤翫經籍慕賢才如不及比聲利於遊塵」
天不憖遺人斯胥悼以永淳元年歲次壬午十二月庚寅朔卄四日癸酉」
葬于北芒淸善里禮也司存有職敢作銘云」
海隅開族河孫效祥崇基峻峙遠派靈長家聲克嗣代業逾昌澤流㴲」
水威稜帶方餘慶不孤英才繼踵執尒貞慤載其忠勇徇國身輕亡家」
義重迺遵王會遂膺天寵桂婁初擾遼川不寧薄言攜育寔賴」
威靈信以成紀仁以爲經宣風徼塞侍蹕云亭爵超五等班參九列虔」
奉天階肅恭臣節南山匪固東流遽閱敢託明旌式昭鴻烈」
大唐故光祿大夫行太常卿使持節熊津都督帶方郡王扶餘君墓誌」
➨ “부여(夫餘) 융(隆)”과 “무녕왕(武寧王, 462~523)”은, 비교(比較)할 수 없을 정도(程度)로 그 차이가 현격(懸隔)하다. 함에도 “부여융(扶餘隆, 615~682)”의 묘지명(墓誌銘)을 보면 : 당시의 지석문(誌石文)의 형식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그러나 흥성(興盛)했던 백제(百濟) 왕(王) “무녕왕(武寧王, 462~523)”의 지석문(誌石文)은, 지방(地方)의 일개(一介) 군수(郡守)의 것보다도 못한 초라할 정도(程度)다. 이건 백제(百濟) 왕실(王室)을 능멸(凌蔑)하고도 남는 일이다. 팩트(Fact)는 “백제(百濟)는 반도(半島) 땅에 없었다”라는 것이다. 누군가가 몰래 급(急)하게 만들어 놓은 느낌은 없나?
수많은 지석문(誌石文), 묘지명(墓誌銘)이 발굴(發掘), 출토(出土)되어 그 보고서가 쌓여 있지만, 저런 초라한 것은 처음 대하는 것 같아. 가슴이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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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하총 목관 머리 쪽 마구리 장식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신’ 연구사는 발표문에서 "목재 벌목 연대는 430∼480년으로 판단되며, 관을 놓는 관대를 봤을 때 관 바닥 규격은 가로 60㎝·세로 210㎝로 예상된다" 면서 "목관 재료 위에 안료와 뼛가루를 혼합해 칠한 뒤 토회(흙과 재)를 섞어 칠을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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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재(木材)가 1,500년 동안 땅속에서 썩어 소실(消失)되었다고 하면서 그 ‘벌목연대(伐木年代)가 AD 430∼480년(年) 경(頃)’이라고 주장(主張)하는 것은 짜 맞추었다는 의심(疑心)을 살수 밖에 없다. 탄소측정(炭素測定)이 정확(正確)하게 1,500여 년(餘年) 전(前)의 것을 겨우 50년(年) 차이(差異)로 측정(測定)할 수 있을까? 또 핵심(核心)은, 탄소측정을 한 목재(木材) 파편(破片)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냐 하는 것이다.
1,500년(年)에서 50년(年)은 똑같다는 말과 같다. 430∼480, 겨우 50년 차(差)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 것이다. 무엇에 딱히 맞춘 결과(結果)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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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목관 몸체 폭은 하단 57㎝·상단 60㎝이며, 관 뚜껑 폭은 머리 쪽 60㎝·발 쪽 57㎝로 추정된다고 덧붙였다.
‘신’ 연구사는 「마구리와 관정」에 대해 "순동에 수은 아말감 기법으로 도금했다"며 "다리 쪽 마구리 장식판과 관정이 머리 쪽 재료와 비교해 두 배 이상 두꺼운 것으로 확인됐다"고 주장했다.
정현 국립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일제강점기 동하총 조사 성격과 동하총 특징을 정리하고 무덤 주인공에 대한 생각을 밝힌다.
그는 "동하총은 능산리고분군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조성한 2호 중하총(中下塚)과 나란히 위치하며, 호석(護石·무덤 둘레에 쌓는 돌)이 잔존한 고분 가운데 가장 크고 견고하다"고 말했다.
정 연구사는 입지, 봉분과 석실 규모, 축조 방법, 장식적 요소를 두루 고려했을 때 동하총은 왕의 무덤으로 봐야 한다면서 위덕왕, 7세기대 세상을 떠난 왕비, 고구려와 교류한 인물 등 여러 견해 중 위덕왕일 가능성이 크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했다.
그는 중하총을 사비 천도를 주도한 성왕(재위 523∼554) 무덤, 익산 쌍릉 대왕묘를 무왕(재위 600∼641) 무덤으로 가정한다면 동하총에 묻힐 수 있는 왕은 위덕왕(재위 554∼598), 혜왕(재위 598∼599), 법왕(재위 599∼600)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사비 시기 능묘는 능선 아래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며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고, 중하총을 둘러싼 무덤 중 동하총이 중하총과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에 동하총은 위덕왕 무덤으로 유력시된다"면서도 "쌍릉 대왕묘와 유사한 요소도 있어 동하총과 중하총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시기 차가 존재한 듯하다"고 추측했다.
부여박물관이 다음 달 24일까지 여는 특별전 '사신이 호위하사, 백제 능산리 1호 동하총'과 연계해 마련한 심포지엄에서는 이 밖에도 백제 사비기 고분의 위계, 부여 능안골고분군의 단상에 대한 발표도 진행된다.
psh59@yna.co.kr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2019/10/17 17:14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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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半島) 사학계(史學界)가 아무리 몸부림치고 애달프게 외쳐도, 없었던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흔적(痕迹)이 새롭게 나타날 일은 없다. 단군조선(檀君朝鮮)으로부터 그 후대(後代)로 도대체 몇 천년(千年)인가?
각각(各各)의 왕조(王朝)를 이루고 있었던 수많은 군주(君主)인 왕(王)과 왕실(王室) 친족(親族), 고급(高級) 관료(官僚)들인 대신(大臣), 무인(武人)들이었던 장군(將軍)들, 각 지역의 패자(霸者), 호족(豪族), 관찰사(觀察使), 목사(牧使), 절도사(節度使), 각(各) 군(郡)의 태수(太守)등 그 수(數)를 헤아린다면 수만(數萬) 이상(以上)이 되어야 하는데, 이들의 흔적(痕迹)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왕릉(王陵)만 해도 단군조선(檀君朝鮮)이니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니 기자조선(箕子朝鮮)이니 하는 기천년(幾千年)을 빼고도 : 삼한(三韓)의 78 왕(王)들과 그 후대(後代) 왕(王)들은 어디에서 잠들고 있으며,
「삼국(三國)+고려(高麗)+조선(朝鮮)」의 왕릉(王陵)만도 무려(無慮) 「173개(個)」【고구려(高駒驪) 28개 왕릉(王陵) + 백제(百濟) 30개 왕릉(王陵)[의자왕(義慈王)은 당(唐)에서 병사(病死)] + 신라(新羅) 56개 왕릉(王陵) + 고려(高麗) 34개 왕릉(王陵) + 조선(朝鮮) 25개 왕릉(王陵)[고종(高宗) 순종(純宗)은 제외(除外)]= 合 173개】는, 확실(確實)하게 반도(半島) 안(內)에 조성(造成)되어 있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當然)한 일이다.
더불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도 말하기를 : 옛 왕조(王朝)의 왕릉(王陵)에 대하여 “릉(陵) 주변에서는 땔감도 하지 못하게 하는 등 보존(保存) 관리(管理)에 힘쓰라”라는 어명(御名)도 기록(記錄)되어 있음이다.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서 말하는 전(前) 왕조(王朝)의 많은 왕릉(王陵)은 어디로 사라졌느냐?
그래! 삼국(三國)은 이미 “일천(一千) 년(年)” 이상(以上)의 세월(歲月)이 지나 모르겠다고 치자! 그렇다면 최소한(最小限) 고려(高麗) 왕릉(王陵)이나 조선(朝鮮)의 왕릉(王陵)은 그곳에서 확실(確實)하게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어떤 왕조(王朝)의 누구 왕릉(王陵)이라는 정도(程度)의 물증(物證), 직접적(直接的)인 증거품(證據品)이나 흔적(痕迹)은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심지어 근대(近代) 조선(朝鮮)의 여러 왕릉(王陵)은 있다고만 여기저기에 팻말만 붙여 놓았을 뿐, 그 왕릉에서 확정적(確定的)인 어떤 객관적(客觀的)이고 의심(疑心)을 사지 않을 만한 물증(物證)이 나온 것이 있느냐? 물어보자!
오죽하면 「조선(朝鮮)의 개국시조(開國始祖) 이성계(李成桂) 가문(家門)의 선원보록(璿源寶錄)」의 내용(內容)조차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이해불가(理解不可)한 내용(內容)으로 되어 있음을 어찌할 건가? 누구 한 사람 속 시원한 해설(解說)을 하지 못한다. 이건 팩트(Fact)다.
이러한 실정(實情)임에도, 1,500년(年) 전(前)의 무녕왕릉(武寧王陵)이 진짜 백제(百濟) 무녕왕릉(武寧王陵)이라고 한다면 일반(一般) 국민(國民)들이야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선사(朝鮮史)를 연구(硏究)하는 많은 분들은 무엇으로 그것을 신뢰(信賴)하겠냐? 하는 것이다.
또 그렇다면 「그 왕릉(王陵)이 정말 “무녕왕릉(武寧王陵)”이라고 한다」라면 : 「무녕왕(武寧王) 전대(前代)의 여러 왕릉(王陵)과 후대(後代)의 여러 왕릉(王陵)은 어디로 사라질 것일까? 또 같은 시기(時期)에 대립(對立)했던 고구려(高駒驪)와 신라(新羅)의 많은 왕릉(王陵)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이냐?」에 대한 답(答)은 바로 반도사학(半島史學)의 몫이다.
그래서 ‘반도(半島) 사학(史學)’의 답(答)은 무엇인가? “모른다”라는 답(答)이 100% 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녕왕릉(武寧王陵)”이 반도(半島) 남(南)쪽 땅에 있어야 하는 것인가?
또 같은 곳에 있는 여러 왕릉(王陵)을 이미 1,915년에 다 파헤쳤음도, 어떻게 1,971년도(年度)에 새로운 왕릉(王陵), 그것도 이 땅에서 단 하나의 명문(銘文)을 가진 왕릉(王陵)을 발견(發見)할 수 있었을까? 우연(偶然)이 우연(偶然)으로 겹치는 것은 우연(偶然)이 될 수 없는 것이다.
○ 「반도사학계(半島史學界)」에게 바라는 것은,
〈오늘날의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옛 여러 왕조(王朝)가 노력(努力)을 기울여 기록(記錄), 편찬(編纂)해 놓은 ‘조선(朝鮮) 왕조(王朝)’들에 대한 ‘고전(古典) 원전(原典)’속의 내용(內容)을 「객관적(客觀的)으로, 지형지세(地形地勢), 자연환경적(自然環境的) 요소(要素), 토산물(土産物) 등으로 해설(解說)할 수 있겠는가?」〉
희망(希望)의 끈을 놓지 않고 기대(期待)해 본다.
2025년 02월 02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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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하세요!
문무님께서 올려주신 장문의 글 관심깊게 읽었습니다.
읽어가는 중에 문암의 수준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내용도
있었으나, 배우는 심정으로 읽었습니다.
오늘은 문무님께서 올려주신 장문의 글을 평가할 수준이
되지 못해 의견을 올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무님의 주장에 공감한다는 것입니다.
2025년 2월 2일(일) 문 암 올 림.
부족한 의견이지만 영감이 떠올라 간략히 말씀드리겠습니다.
5~6세기 당시의 일본은 현재의 일본열도가 아니가 그 위치가 남아시아에
있었다는 내용은 대단히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같은 시기의 백제의 위치는 반도가 아닌 중국에 있었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1915년 일제에 의해 백제의 왕릉급 묘소가 발굴되었을 때 왜 무령왕릉이
발견되지 않고 그로부터 56년이 지나서 배수로 공사하는 인부에 의해
발견된 점도 지금와서 생각하니 의아스러운 측면이 있는 듯 합니다.
왕의 무덤에 있는 지석이 왜 그리도 짧고 초라한 측면도 다소 의문점을
품게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분야에 초보자인 문암이 1971년에 발견된 것이 실제
무령왕릉 여부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금송과 관련해 문무님의 글을 읽으면서 낙엽송과의 금송과 또 다른
금송이 있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었는데 사실 그동안 이 부분은
정리가 되지 않은 대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문암의 선조들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송곡'은
과연 낙엽송과에 해당되는 것인지 아니면 제3의 금송에 해당되는지
여부가 궁금하게 생각되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