沙平驛(사평역)에서 - 곽재구 -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이 시는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는 표현과
80년대 초의 시대 상황, 운동권 학생이었던 시인의 이력 등에서 보듯이
시대적 아픔과 사회적 슬픔을 자조적으로 달래고 있는 시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시대상황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삶의 애환, 서민들의 추억과 아픔, 지나간 세월에 대한 회한 등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그리운 그 무엇을 확 가져다주는 서정시로 받아들여져
더욱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탁월한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면서도 서정성을 잃지 않고 보편적인 감정을 보듬는 그런 시!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 시로 인해 곽재구 시인은 일약 중견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요.
개인적으로도 참 좋아하는 시인데
이 시를 대할 때마다 문득 베낭 하나 메고 이름 모를 어느 간이역으로 훌쩍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고,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란 노래 가사 한 구절과 비슷한 느낌
"다시 오지 못할 그리운 그 무엇에 관하여..." 속절없이 그리워하곤 합니다.
참고로, 이 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시인의 친구인 임철우 작가가 사평역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써서
다시 이 시와 사평역이 더욱 유명해져서 사평역을 묻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사평역은 시인이 만들어 낸 역 이름이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인의 고향과 가깝고 이름도 비슷하고 위 시와 분위기도 비슷한 간이역인 경전선의 남평역이 곧 사평역이라는
얘기도 많았지만, 시인은 사평역의 모티브는 남광주역이라고 말하였다고 하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