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韓中日近現代史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출처: http://blog.naver.com/atena02/220649954742
중국 정부의 독촉에 따라 1946년 3월 중순부터 동북에서 소련군이 본격적으로 철수를 시작되었다. 소련군의 철수는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지만 국민정부군은 여전히 전진이 지지부진한데다 병참선의 한계와 병력 부족으로 광대한 동북을 접수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주요 철도의 태반은 공산군의 수중에 있었고 도처에서 토비들이 준동하였다.
마셜의 종용으로 국공 양측은 마지못해 1946년 1월 10일 정전협정에 합의하여 13일 발효되었지만 어느 쪽도 이것으로 내전이 완전히 끝나리라는 기대하지 않았다. 특히 동북으로 진입한 쌍방의 군대는 양보와 타협을 거부하고 주요 도시를 경쟁적으로 수중에 넣는 등 세력 확장에 열을 올렸다. 중국 정부의 강력한 항의를 받은 스탈린이 공산군에게 철로 연선의 도시에서 철수하라고 종용하자 린뱌오 휘하의 지휘관들은 격렬하게 반발하고 여차하면 소련군까지 공격하겠다는 식으로 맞섰다. 또한 현지에서 조직된 무장집단들을 경쟁적으로 포섭, 매수하고 공격하였다. 정전협정 발효 후 산하이관 이남은 비교적 잠잠한 반면, 동북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마셜이 옌안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성대하게 환대했던 중공 지도부는 3월 5일 그가 중국을 떠나자말자 동북국에 "동북에서 국공의 충돌은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 되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3월 25일에는 다시 린뱌오에게 다음과 같이 밀전을 보냈다. "모든 수단을 다하여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라. 특히 소련군이 철수하는대로 창춘과 하얼빈, 치치하얼을 장악해야 한다. 어떤 희생도 아끼지 말고 국민당군이 창춘과 하얼빈, 중둥철도를 차지하는 것을 막아라."
이 때만 해도 군사적으로 월등히 열세에 놓여 있었던 중공으로서는 만약 협상이 결렬되어 내전이 전국으로 확대될 경우 완전한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따라서 "향북발전 향남방어(向北發展 向南防禦)"라 하여 황허 이남에서는 패배하더라도 동북만큼은 어떤 수를 써서건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또한 동북에서 확고한 위치에 선다면 장제스와의 협상 테이블에서도 유리하리라 판단하였다. 린뱌오는 투항한 구 만주국군과 보안대, 자경대와 같은 현지의 지방 무장 세력들을 흡수 편입하는 한편, 국민정부측 조직에 대해서는 토비로 간주하고 가차없이 토벌하여 근거지를 강화하였다.
게다가 스탈린은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보면서도 장제스를 견제할 생각으로 소련 국경과 인접한 북만주와 동만주를 중공이 장악할 수 있도록 돕기로 마음 먹었다. 소련군은 철수하면서 북만주와 동만주를 관통하는 중둥철도의 통제권을 중공에게 넘겼다. 소련의 양해 덕분에 공산군은 국민정부군의 북상을 막고 창춘과 하얼빈, 치치하얼, 무단장 등 주요 도시와 요충지를 신속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또한 국민정부군의 손에 들어간 서만주에서도 중공 중앙의 지시에 따라 "대로는 양보하되 양 측면을 점령한다(讓開大路 占領兩廂)"라는 원칙으로 선양을 비롯한 대도시와 철로 연선에서는 물러나되 대도시에서 떨어진 중소 도시와 농촌을 확보하였다. 특히 압록강 접경도시인 안둥과 통화의 점령은 중공과 북한을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였고 국공내전 내내 북한을 통해 많은 군수품과 물자를 원조받을 수 있었다. 1946년 초를 기준으로 중공은 허베이성와 러허성, 내몽골 동부지역, 동북 3성의 대부분과 주요 철도를 손에 넣었다. 반면, 동북으로 진군한 국민정부군은 베이핑에서 산하이관, 진저우, 선양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선만 간신히 통제할 수 있었다.
물론 장제스도 동북을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특히 창춘을 확보하는가에 동북의 승패가 걸려 있었다. 창춘은 만주의 중부 평야에 위치하여 서만주와 동만주, 북만주를 연결하는 철도의 요충지였다. 또한 창춘을 점령하려면 우선 그 관문에 해당하는 쓰핑부터 장악해야 했다. 동북 초비 총사령관 두위밍은 선양을 거점으로 동쪽과 북쪽, 남쪽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동북에 침투한 특무요원들은 중공 측에 선 무장세력들을 포섭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1945년 말부터 1946년 초까지 공산군에서 국민정부측으로 넘어간 병력은 약 10만명에 달했다. 양측 모두 동북에 운명을 건 상황에서, 전황은 갈수록 혼전이 되어 어느 쪽이 우세한지 쉽사리 점칠 수 없었다.
3월 17일 소련군의 철수와 함께 쓰핑이 공산군의 손에 넘어가자 두위밍은 즉각 탈환을 명령했다. 19일 국민정부군 최강부대인 신1군(제50사단, 신편 제30사단, 신편 제38사단)과 제71군(제87사단, 제91사단) 5개 사단 10만명이 선양에서 출동하여 쓰핑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신6군 산하 제14사단, 신편 제22사단, 제71군 제88사단, 제94군 제5사단, 제52군 제2사단, 제25사단 등 6개 사단은 남만주로 진군했다. 4월 2일 신6군은 안산(鞍山)을, 제88사단은 잉커우(营口)를 점령하여 랴오둥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또한 제14사단과 제25사단은 푸순(抚顺)을 점령한 후 번시(本溪)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공산군 제3종대 제7여단과 제9여단의 강력한 반격을 받아 1천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격퇴당했다. 4월 7일 재차 공격을 시작했지만 공산군 제4종대 제10여단이 증원되면서 3일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다시 격퇴당했다. 국민정부군은 제2사단과 제25사단, 제88사단을 증원하여 압도적인 전력으로 4월 28일 세번째 공격을 시도한 끝에 5월 3일 새벽에야 점령할 수 있었다. 이로서 남만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창춘을 향해 북상한 국민정부군 신1군 제30사단은 3월 24일 톄링(铁岭)을 점령하였다. 국민정부군이 강력한 기세로 쓰핑을 향해 북상하자 4월 4일 중공 중앙에서는 린뱌오에게 전문을 보내어 쓰핑의 결사 사수를 명령했다. 린뱌오 역시 "병력을 집중하여 쓰핑을 지켜내겠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4월 5일부터 쓰핑 남쪽에서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었다. 북상중인 국민정부군에 대해 공산군은 역공에 나섰다. 동북민주연군 산동군 제1사단, 제2사단, 신4군 제3사단을 주력으로 10개 연대가 국민정부군 신편 제38사단을 공격했고, 산동군 제3사단이 국민정부군 제30사단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공산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치자 두위밍은 병력을 증원하여 재차 공세를 시작했다. 제71군 제87사단과 제91사단이 투입되어 공산군의 방어선을 뚫고 4월 10일 쓰핑 교외까지 진출하였다. 4월 15일 제71군은 쓰핑 공격에 나섰다. 하루 종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공산군의 증원부대가 측면을 역습하는 바람에 전사 800여명, 부상 1600여명, 포로 2천여명 등 4400여명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만 입고 격퇴당했다.
한편, 4월 14일 소련군이 창춘에서 철수했다. 창춘에 남은 병력은 시내의 치안을 맡은 국민정부측 보안대였다. 숫자는 경찰을 합해서 2만여 명에 달했지만 대부분 현지에서 급조되거나 구 만주국군 출신들이기에 전투력은 형편없었다. 소련군이 철수하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공산군은 즉각 행동에 움직였다.
산동군 제7사단과 신4군 제3사단 일부, 제23여단, 지방 부대 4천여명 등 약 2만여 명이 삼방향에서 창춘을 공격하여 18일 새벽 5시 시가지 전역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국민정부측 손실은 사상자 2천여명에 포로가 1만6천여명에 달했고 항공기 1대와 각종 야포 56문, 기관총 432정, 소총 1만여정, 탄약 110만발을 노획하였다. 공산군의 손실은 1700여명 정도였다. 중공 중앙은 린뱌오에게 전문을 보내어 "창춘의 점령으로 동북과 전국의 정세가 우리에게 크게 유리해졌다."라고 치하하였다.
린뱌오는 국민정부군의 동진을 저지하는 한편, 4월 24일 산동군 제7사단과 신4군 제3사단을 주력으로 눈장 강(嫩江)을 건너 치치하얼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또한 28일에는 제359여단이 하얼빈을 점령하는 등 속전속결로 북만주와 동만주를 완전히 손에 넣었다.
창춘이 린뱌오의 손에 넘어가자 두위밍의 마음도 조급해졌다. 4월 18일 공군과 포병의 지원 아래 신1군 제30사단이 쓰핑 남쪽에서, 제71군이 서쪽에서 재차 공격에 나섰다. 20일에는 국방부장 보충시가 장제스를 대신하여 전선으로 날라와 전투를 독려하였다. 국민정부군은 서전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왕성한 사기로 쓰핑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연이어 퍼부었다. 린뱌오 또한 산동군 제1사단, 제2사단, 제3사단 등 6개 사단을 쓰핑에 집중하여 방어선을 강화하는 한편, 역습을 반복하여 국민정부군을 격퇴하였다. 21일 신편 제38사단이 쓰핑 서북쪽의 고지를 점령하면서 쓰핑은 남북으로 포위된 형상이 되었다. 국민정부군은 100문이 넘는 야포를 끌어모아 공산군 진지를 향해 포격을 날렸다. 분당 400발 이상의 포탄이 쉴새 없이 떨어지면서 쓰핑은 거대한 포연에 휩쌓였다.
▲ 쓰핑 전투를 관전 중인 보충시(왼쪽)와 쑨리런(오른쪽)
하지만 공산군의 저항은 여전히 완강했다. 소련군에 의해 재편되고 관동군의 무기로 무장한 린뱌오의 군대는 지난 수십년간 국민정부군이 상대해 왔던 오합지졸 농민군대와는 차원이 다른 상대였다. 국민정부군은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한 채 전선은 한동안 교착상태가 되었다. 쓰핑 공격이 지지부진하자 두위밍은 우선 번시를 점령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정하면서 4월 27일 공격은 일시적으로 중지되었다. 5월 3일 번시가 점령되었다. 이로서 선양에 대한 위협은 사라졌고 두위밍은 모든 전력을 쓰핑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번시 공격에 투입되었던 신6군과 제88사단, 제195사단 등 5개 사단이 쓰핑으로 증원되었다. 쓰핑 공격에 투입된 국민정부군 전력은 총 10개 사단으로 늘어났다. 동북의 전황은 점차 린뱌오에게 불리해졌다.
5월 12일 신6군이 쓰핑 남동쪽의 카이위안(开原)과 시펑(西丰)을 점령하고 공산군 제3종대를 격퇴하였다. 14일 국민정부군은 쓰핑에 대해 삼면에서 포위하는 형상으로 배치를 완료하였다. 신6군 제14사단, 신편 제22사단, 제88사단, 제195사단이 쓰핑 남쪽을, 신1군이 서남쪽을, 제87사단과 제91사단이 서북쪽을 맡았다. 또한 제182사단이 쓰핑 남쪽의 주요 도로를 장악하고 공산군 증원부대의 역습을 저지하였다.
15일 새벽부터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국민정부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쓰핑 주변의 고지를 하나씩 장악하였다. 상공에서는 전투기들이 쉴새 없이 날아다니며 폭탄과 기총 사격을 가했다. 전황이 점점 악화되자 18일 밤 중공 중앙에서는 린뱌오에게 쓰핑 포기와 창춘으로의 퇴각을 명령했다. 다음날 오후 1시 국민정부군은 쓰핑을 점령했다. 4월 5일부터 5월 19일까지 장장 45일에 걸친 혈전의 끝이었다. 국민정부군의 손실은 7천여명, 공산군의 손실은 2만5천여명에 달했다. 하지만 싸움은 시작일 뿐이었다.
한편, 4월 18일 마셜이 중국으로 급히 돌아왔다. 한달 전만 해도 더 이상 내전의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났던 그는 동북의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자 당황하였다. 만약 그가 미국의 위세만 믿고 남의 정치 문제를 그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다면 중국인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것이리라. 마셜을 만난 장제스는 공산군이 창춘을 점령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동북에서의 충돌은 전적으로 중공에게 책임이 있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마셜은 동북에서 군사행동을 확대하는 것은 병참상 매우 불리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국민정부가 먼저 정전협정을 준수하고 협상 테이블로 나오는 것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권유하였다. 하지만 장제스는 동북은 중국의 영토이기에 정부군이 동북을 통제하는 것은 당연하며 중공이 타협하고 싶다면 창춘에서 철수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마셜은 저우언라이에게 장제스의 요구사항을 그대로 전달했지만, 저우언라이 역시 미국이 장제스 군대의 동북 수송을 돕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이로 인해 동북에서의 내전을 부추기고 있다며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하였다. 또한 그는 장제스가 정전협정을 성실하게 준수할 생각이 없다고 비난하면서, 군대 정편과 재배치와 관련해서도 당초 동북에 배치될 군대가 국민정부군은 14개 사단에 대해 공산군의 몫이 1개 사단에 불과하다며 5개 사단으로 늘려달라고 요구했다. 저우언라이가 목소리를 높인 것은 창춘의 점령으로 동북에서 중공의 입지가 유리해졌기 때문이었다.
4월 27일 마셜은 중공이 국민정부군의 동북 진입을 막아서는 안되며 창춘을 즉각 국민정부군에게 양보하지 않으면 미국은 중재를 중단하고 손을 떼겠다고 엄포를 하였다. 또한 공산군이 창춘만 포기하면 그 댓가로 미국은 국민정부군이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도록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의 철수는 국공내전의 전면전을 의미했기에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여긴 저우언라이는 결국 마셜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5월 23일 창춘은 장제스의 손에 들어왔다. 또한 28일에는 지린을 점령하였다. 린뱌오는 동쪽과 북쪽으로 계속 밀려났다.
▲ 1946년 3월부터 6월까지 동북의 전황.
하지만 이제 입장이 바뀌어 콧대가 높아진 쪽은 국민정부측이었다. 쓰핑에서 승리한데다 창춘마저 손에 넣은 동북의 지휘관들은 기고만장하여 중공과의 타협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하얼빈과 지린을 향한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장제스 역시 이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마셜에게 "무르익은 사과가 떨어지듯 승리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서로 유리할 때마다 말과 행동을 바꾸며 약속을 어기고 요구조건을 높이는 국공의 태도에 마셜은 큰 충격을 받았다. 마셜은 장제스에게 편지를 보내어 국민정부가 중공과의 약속을 어기는 바람에 자신의 위신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면서 즉각 공격을 중지하지 않으면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경고하였다.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장제스로서는 마셜의 경고를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6월 6일 국공 양측은 이른바 "6월 휴전령"을 선언하고 15일 동안 동북을 포함해 모든 전투 행위와 병력 이동을 중지하고 교통과 통신을 재개할 것, 정치군사협정의 이행에 합의하였다. 세번째 정전협정이었다. 충칭에서 협상이 재개되었지만 쌍방은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강요하면서 지지부진하였다. 마셜은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원조가 오히려 장제스 정권이 중국의 부흥과 안정에 필요한 개혁에는 무관심하면서 미국의 원조만 믿고 내전에 광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1945년 8월부터 1946년 3월까지 장제스 정권에게 무기대여법에 따라 6억 달러에 상당하는 전쟁 잉여 물자를 제공했고 1946년 3월에도 중국 재건을 위한 자금으로 5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였다. 중국에 파견된 군사 고문단은 중국군의 재편과 해공군의 현대화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미국의 원조는 장제스 정권에게는 도리어 독이 되어 타성에 젖도록 만들었고 자금의 태반은 부정부패한 정치가와 관료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갔다. 또한 한쪽에서는 마셜이 국공의 화해를 종용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장제스 정권에 대한 원조를 확대하여 내전을 지원하는 모습은 미국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게 하였다. 저우언라이는 마셜에게 미국이 진정성과 공평성이 없다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마셜은 이런 모순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트루먼에게 대중원조를 축소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마셜의 의견에 대해서는 번즈(William J. Burns) 국무장관과 애치슨 국무차관, 빈센트(John Carter Vincent) 국무부 극동국장도 적극 찬성하였다. 하지만 군부 강경파들은 아시아에서 미-소의 세력균형을 위해서는 설사 내전이 확대되더라도 중국에서 손을 떼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포레스탈(James V. Forrestal) 해군장관은 중국을 방문한 후 트루먼에게 소련은 극동을 지배하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았으며 미국이 중국에서 철수한다면 소련이 중국을 차지하여 1941년 당시 일본이 그러했던 것처럼 태평양 전체를 위협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행정부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다보니 트루먼은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 중원 포위(中原突围)
휴전은 전면전을 위한 잠깐의 숨고르기일 뿐이었다. 장제스는 중공과의 협상을 하면서도 협상이 결렬될 때를 대비하여 중공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첫번째 목표는 중원 해방구(中原解放區)였다. 황허의 중류에 위치한 허난성은 광대한 화북 평원이 펼쳐져 있으며 고대 은왕조의 발원지이자 중국의 중심부로서 고래 이래로 중원이라 불린다. 중일전쟁 말기인 1944년 일본군의 "이치고 작전"으로 국민정부군이 허난성과 후베이성, 후베이성 등 화중과 화남 일대에서 큰 타격을 입은 채 남쪽으로 밀려나자 중공 팔로군 총부는 신속하게 왕쩐이 지휘하는 팔로군 제359 여단과 리센넨(李先念)의 신4군 제5사단 등을 침투시켜 "중원해방구"로서 근거지를 건설하였다. 중원해방구의 통치 영역은 산둥성 남부에서 안후이성 북부, 허난성 남부, 한커우 동쪽에 걸쳐 있었으며 병력은 2개 종대 3개군구 정규군 6만명에 민병 30만명에 달했다.
장제스 입장에서 중국 대륙 한 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중원해방구는 그야말로 목에 들이댄 비수나 다름없었다. 그는 중원해방구에 대해 “북으로는 황하를 건너 중원을 교란하고 남으로는 우한과 양호를 넘볼 수 있으며, 서진하면 징저우(荊州)와 샹앙(襄陽)을 장악하여 중원의 대동맥을 끊을 수 있다”고 일컬었다. 일본이 항복한 뒤 장제스는 자신의 오호 상장인 류즈(劉峙)를 허난성 정저우 수정공처 주임(鄭州綏靖公署主任)로 임명하고 중원해방구를 포위한 채 견제하고 있었다. 내전이 전면전으로 확대되자 당연히 첫 번째 목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1946년 6월 10일. 중공과의 일전을 결심한 장제스는 류즈에게 비밀전보를 보내어 중원해방구의 포위 섬멸을 준비하라고 지시하였다. 54살의 류즈는 북벌전쟁 이전 황푸 군관학교 설립 당시 교관을 맡았으며 첸쳉, 탕언보, 후쭝난 등과 함께 장제스의 심복 중의 심복이었다. 북벌 전쟁만 해도 군벌들을 상대로 뛰어난 전공을 발휘했지만 일본군과의 싸움에서는 싸웠다 하면 패하여 “장패장군(長敗將軍)”이라는 오명으로 불릴만큼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쑹메이링은 장제스에게 류즈를 해임하라고 권유했지만 장제스는 그가 무능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충성심을 높이 사서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그로서는 군에 대한 장악력이 약했기 때문에 능력보다 충성심을 우선시 할 수 밖에 없었다.
국민정부군이 중원해방구에 대한 포위를 갈수록 강화하면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자 6월 23일 중공 중앙에서는 중원해방구에 전보를 보내어 “전투보다 전력을 보존하고 생존에 최우선하라.”라면서 포위망 돌파를 지시하였다. 최후 통첩과 함께 정전 기한을 한차례 연장했던 장제스는 6월 26일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날 류즈는 제1전구와 제5전구 25개 사단 30만명의 병력으로 중원해방구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국공내전은 본격적으로 폭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