觀應스님이 鏡峰스님에게 쓴 편지
拜辭하온 후 이미 數旬이 되온 이 때에 大法氣體 以時萬康하옵시며 院內大德이 一一康寧하시옵나이까. 伏慕正切 頂祝之至이로소이다. 小衲은 拜退敎山은 아직 顯頃은 없아오며 一山이 모라 無事하오니 伏幸이로소이다. 就伏白 此去 張濠君은 여러 가지 事情으로 出家修道하기로 發願固念이 있는 靑年이온대 此處인즉 諸般事情이 不通하므로 敢히 老師의 會下로 勸送하오니 一個蒼生을 救出하시는 大慈大悲로 攝受하여 주시옵기 伏望伏乞하옵나이다. 突然 如斯한 事情을 上達하오니 罪悚萬萬이오나 이 張君의 情狀이 너무나 可憫하고 또 小衲의 力量으로는 救出하기 不能하므로 如是上達하오니 再三下燭하여 주시옵기 伏望하옵나이다.餘惟伏祝 法體候萬安하옵고 不備上白하옵나이다.
壬寅 四月 念翌
小衲 觀應 九拜
[출처]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1. 내용: [1962년] 음력 4월 觀應스님이 鏡峰스님에게 쓴 편지'壬寅[1962]음四月念翌小衲觀應九拜'
2. 우편인 - 無
3. 봉투 - 수신인: '梁山郡通度寺極樂庵金鏡峰大禪師猊下' 발신인: '金陵郡直指寺全觀應上'
4. 국한문혼용
5. 참고문헌 - 석명정, 『삼소굴소식』(극락선원, 1998, p.170)
6. 봉투에 연필로 '서울明倫洞...' 등이 기록되어 있음
7. 壬寅年[1962]의 추정은 觀應의 생몰년(1910-2004)에 의거하여 추정
※ 이 편지의 내용은 상당히 의미가 깊습니다
전체 문맥을 풀어보면 관응스님이 경봉스님에게 한 젊은이를 부탁하는 편지입니다.
핵심은 이렇습니다.
“장호군이라는 청년이 여러 사정으로 출가수도를 하겠다는 굳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여러 사정상 받아주기 어려워 감히 노사의 회하로 보내오니, 한 중생을 구해 주시는 큰 자비로 거두어 주십시오. 소납의 힘으로는 그를 구해낼 수 없기에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특히 「一個蒼生을 救出하시는 大慈大悲로 攝受」라는 표현은 관응스님이 장호군을 단순히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경봉스님에게 그 청년의 출가·수행을 맡아 달라고 간곡하게 청하는 대목으로 보입니다.
※ 전관응 스님
19세에 남장사에서 출가해 금강산 유점사 강원과 중앙불교전문학교, 일본 용곡대학을 거쳤으며, 월정사·동화사 강사와 조계종 중앙총림 강주를 지냈습니다. 이후 조계사와 용주사 주지를 역임했고, 유식학을 국내에 소개한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어요.
주요 이력과 학력
일본 용곡대학에서 공부한 뒤 귀국했으며, 천태산 무문관에서 6년간 결사 수행을 마쳤습니다. 이러한 학문과 수행 경험을 바탕으로 교학과 수행을 함께 익힌 인물로 평가돼요.
교학 발전과 유식학 도입 업적
전관응 스님은 우리나라 불교 강원의 변화를 이끈 교학 전문가로 소개됩니다. 특히 유식학을 국내에 소개한 스승이라는 평가가 있으며, 그의 법어를 모은 《하나인 도리를 아느냐》도 발간됐어요. 다만 “처음 소개했다”는 표현은 자료에 따라 ‘스승’이라는 관계 중심 설명으로 나타나므로, 최초 도입자를 확정하는 표현보다는 국내 유식학 전파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주지 역임 사찰과 활동
조계사와 용주사에서 주지를 맡았습니다. 용주사 대웅보전은 1965년 전관응 주지의 수리 기록이 남아 있어, 사찰 운영뿐 아니라 주요 전각의 보수 과정에도 관여한 것으로 확인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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