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 단계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다쳤다. 나는 상처를 입었다. 그들이 (그/그녀) 내게 이런 짓을 했다.” 그러다가이윽고 “그러나 만일 내가 삶 속에서 상처나 고통에 매달린다면 나는 망해 버릴 것이다.”라는 말을 덧붙이게 될 때 우리는 분노 단계로 접어든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걸음을 표상한다.
희생 단계에서 억제되거나 격렬하게 터져 나오는 분노와 달리 넷째 단계의 분노는 사실 긍정적이고 전망있는 그런 분노다. 여기에 관심을 갖는 것은 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과민하고 이기적인 자기 연민적 한탄이 활기찬 외향적 에너지로 바뀌면서 ‘이런 일이 또다시 내게 일어나는 일은 없으리라. 나는 결코 무력하거나 절망하지 않으며, 내 상처와 고통이 나를 규정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라고 선언하는 명확한 목표를 담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는 하느님을 닮은 그 어떤 모습까지도 엿볼 수 있다. 하느님은 모세에게 당신을 일컬어 “나는 나다”라고 규정하셨다. 다시 말해 나는 나 이외의 어떤 것이나 나에게 일어난 어떤 일에 의해 규정될 수 없고 단지 내가 나라고 말하는 바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이 상태에서는 더 이상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허우적거리던 수렁에서 단호히 걸어 나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우리가 아직은 어디로 가고 있고 거기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를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거의 사라졌고, 두려움으로 인한 불만스런 반응도 많이 가라앉았다. 우리가 받은 부당한 학대를 한탄만 하고 있는 대신에 우리는 그와 관련해서 무슨 일인가를 하는 데 에너지를 활용한다. 이는 욥이 거름더미에서 일어나 삽을 들고 주위를 깨끗하게 치우는 것과 같다. 이것은 용서와 완성 과정에 꼭 필요한 일이다. 용서는 술렁이는 두려움의 소용돌이를 이따금씩 덮어가리는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자기 연민의 자리를 심한 분노로 대체한다.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이것은 건설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심한 분노가 바드시 파괴적인 것만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이 에너지를 앙갚음 쪽으로 몰아갈 경우, 가해자와 우리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반대로 긍정적 목표 쪽으로 몰아갈 경우, 이 에너지는 온전함에 이르는 움직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에너지를 보복하는 데 활요한 것은 우리의 자유를 상실하고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복수심으로 가득찬 공격은 증오의 대상에게 영향을 주기도 전에 가해자를 파괴한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흑인 분노폭발 운동’이나 줄곧 되뇌는 구호 ‘다시는 절대로’로 대변되는 박해에 대한 유다인들의 반응에서 이런 분노를 목격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분노 단계에 접어들었을 때 특별한 문제에 부딪힐 수 있다. 그들은 분노는 나쁘다고 말하는 흑백논리에 가까운 윤리관을 가지고 있다. 물론 사실은 그렇지 않다. 분노가 나쁠 수도 나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 앙갚음하려는 분노는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미래의 자유와 완성을 지향하는 활기찬 추진력으로 이용되는 분노는 선익하다. 우리 가운데 일부가 분노를 두려워하는 것은 분노가 너무나 깊고 강렬해서 만일 폭발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겁을 먹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일찍이 분노가 무슨짓을 할 수 있으며 자신이나 주위 사람에게 어떤 짓을 자행했는지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화가 난 부모에게 맞은 아이나 분노의 표적이 되어 구타당한 배우자는 분노를 건설적으로 보는 것이 어렵다.
분노하는 사람은 분노에 찬 세계에서 산다. 분노라는 감정은 자기와는 무관하다며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적개심이 투사되어 나오는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투사는 자신의 분노를 인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 분노를 억압한다. 억압은 화난 감정을 의식석으로 자각하지 못하게 하는 잠재의식이다. 이런 현상은 일종의 반발행위로 나타난다. 이런 억압된 분노는 흔히 우회적으로 표출되므로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때로는 불안으로 또는 궤양·대장염·두통 같은 심신증적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무의식중에 남성 또는 여성에 대한 증오나 도덕적 편견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사람은 물론 의도적으로 분노를 억누르기도 한다. 이것은 원하지 않는 감정을 의식적으로 차단하는 행위로 당사자의 동기와 행동방식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분노는 억누르는 것보다 표출하는 것이 더 좋다. 분노를 바람직하게 표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입증된 여러 발판이 있다. 우리가 공격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거나 표출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것 가운데는 아무런 해가 없는 방법을 빌려 의도적으로 분노를 터뜨림으로써 그것을 제어할 수 있다. 화가난 사람은 문을 쾅 닫거나 힘이나 입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거나 물건을 두둘겨 부수거나 한다. 내가 수도원에 들어와 수련기를 거치는 동안 분노의 감정을 극복했던 일이 생각난다. 나의 고해사제가 제안한 방법은 도끼를 들고 숲으로 가서 베어낼 구역의 나무 몇 그루를 찍어 넘어뜨리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분노를 건설적으로 표출할 수 있었다.
분노를 다루는 확실하고 지속적인 방법은 분노의 근원을 찾고 증상이 아닌 원인을 해소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원인을 찾는 일부터 시작한다. 어떤 사람 또는 사물이 그대의 화를 돋울 경우, 그것이 그대에게 그 사람이나 사물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지만 그대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할 수는 있다. 분노가 자신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왜 이 특정한 상황이나 사람이 분노하게 하는가? 여기에 대한 해답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의 내면에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더럽히는’ 것은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다.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바로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간음·음란·도둑질·거짓 증언·모독과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다. (마태15,11.18-20)
분노에 접근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독특한 방법이 있다. 분노의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감지할 때 대체로 세 가지 원인 중 하나로 보면 된다. 곧 우리는 그 순간에 세 가지 중 하나에 (또는 둘 이상에)위협을 받고 있다. 그것으로 안전을 바라는 욕구, 인정받고자 하는 갈망, 상황을 통제하려는 욕구로 그 중 어떤 것이 위협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대가 화를 내는 직접적이고 내적인 이유를 잘 살펴보라. 그러면 분노가 안전·통제 또는 인정에 대한 갈망이라는 세 가지 문제 가운데 하나를 어떻게 건드리는지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처를 만나는 방법인데, 이유는 안전과 통제 또는 인정이라는 단추를 누르게 되면 전에 겪었던 어떤 사건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어떤 단추를 누르고 있는지 일단 확인하고 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지금 화가 나는 것은 아들녀석이 마당의 눈을 치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나를 화나게 하는 걸까? 그것은 나의 안전이 위협받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야. 혹시 인정받고 싶은 갈망 때문이 아닐까? 아니야, 통제라는 욕구 때문이 아닐까? 바로 그거야!’
그리고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라. ‘이 특정한 사건에서-나를 화나게 하는 이유에 해당하는-통제를 (인정을, 안전을) 바라는 내 욕구를 흔연히 포기할 수 있는가?’ 이것은 그대가 흔연히 하려고만 하면 쉽게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아들이 자기 위무를 게을리해도 묵인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대가 화를 내지 않고도 아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아들이 그대의 통제 욕구를 촉발시키기 때문이 아니라 그대가 아들에게 올바른 일을 하도록 만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대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하면 된다. ‘내가 화나는 이유는 내가 이 상황을 통제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분노는 오히려 정반대 결과만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화를 낸다면 나는 통제력을 잃고 말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상황에서 통제하려는 내 욕구를 기꺼이 포기하기로 한다.’
이제 통제하려는 욕구를 더 이상 갖지 않음으로써 분노를 유발할 요인이 아무것도 없게 된다. 따라서 아들의 태만을 문제를 쏟아내는 배출구로 이용하지 않고 차분히 다룰 수 있다.
한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저마다 분화되지 않은 감정 에너지를 내면에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 에너지는 가짓수에 상관없이 감정이나 느낌 가운데 하나가 풀려날 때 함께 표출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이런 느낌을 풀어내는 방법을 어느 정도 통제할 힘이 있다. 좀더 세차고 강력한 감정은 실제로 그것들이 갖는 에너지의 힘, 예를 들어 분노나 증오, 사랑과 긴밀하게 연과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들은 사랑이나 증오, 분노를 표출하는 수로를 이 저수지에 단단하게 연결시킬 때 생기는 에너지다. 그리고 이런것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우리의 책임이다.
분노에는 제자리가 있다. 하지만 우리가 분노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오히려 분노가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분노의 자리가 아니다. 온전히 치유되어 용서하게 되는 완성 과정에서 우리는 상처를 느끼고 그 분노를 표현하도록 허용해야 한다. 우리가 지닌 아픔을 인식하고 치유하고자 건설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
분노를 건설적으로 다루는 방법-(내가 말하는)이른바 ‘사랑하기 위하여 자유로워지는’ 일-은 약함을 주제로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루겠다.
용서의 과정 윌리엄A. 메닝거 지음 -바오로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