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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8. 성 시몬과 유다(타대오)사도 축일. 묵상글 ( 10/27 19:35, 06:10.)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1-21시반 *가끔은 이전에도 올릴 수 있음 > : 호명환 신부님. 고인현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6시 이후 *가끔은 이전에도 올릴 수 있음 > :
김찬선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 가능하면 위와 같이 할 계획이나 개인 형편으로 그리 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오늘 묵상글 공유 : 호명환 신부님(10/27 19:35), 고인현 신부님( 06:10 추가 )
김찬선 신부님: 06:10 추가. 호명환 신부님: 06:10 추가.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10/2719:35 추가.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계속 여부도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11월 대림시기(11/29) 이후 12월 중순 아니면 , 그 이전이라도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할 계획이오며
카페는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킬 계획이기에, 2)의 회원분이나 제가 가끔 묵상글을
올릴 수도 있을 경우를 감안, 묵상글 뜨락은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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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8. 성 시몬과 유다(타대오)사도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27. 15:31
우리 사랑의 그릇을 더 넓게 확장해가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가 우리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다른 이들을 존중하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제국과 그리스도 영성
우리 사랑의 그릇을 더 넓게 확장해가기!
2026년 10월 27일 화요일
리처드 로어는 자기 사랑과 공동체 사랑에서 출발하여, 복음이 우리를 부르는 보편적 사랑으로 확장되는 길을 보여 줍니다:
발달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사랑 안에서 성장할 때 단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 자신을 존중하지 못한다면, 다른 이를 존중하는 법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공동체적 사랑, 곧 가족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우리와 연결되어 있거나 우리와 닮은 이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이 단계에조차 이르지 못합니다. 가족이나 가까운 이들, 혹은 자기 집단을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기로부터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세 번째 단계, 곧 보편적 사랑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이르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정치와 사회, 나라 안팎의 현실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껏해야 두 번째 단계인 ‘자기와 닮은 이들’을 사랑하는 데 머물러 있습니다. 인종, 국적, 종교, 정치적 성향과 같은 집단적 울타리 안에서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이 두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 건강한 사회를 이루지 못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와 정치 현실을 바라보면, 그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우리는 베드로조차 성령께서 가르쳐 주셔야만 사랑 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베드로는 당시 '집단적 사랑'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하느님께서 유다인만을 사랑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성령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내리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위를 둘러보며 "아, 하느님께서는 모든 이를 위하시는 분이시지, 유다인만을 위한 분이 아니시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는 것을 이해했고, 이는 결국 교회라 불리게 된 공동체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 대부분은 베드로의 통찰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집단적 사고와 집단적 사랑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 어떤 민족에서건 하느님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사도행전 10,34–35). 그 순간 베드로는 유다인으로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도 기존의 틀을 깨뜨린 이단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은 하느님께서 모든 선의의 사람들과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그 자리까지 나아가도록 떠밀려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조금씩 차근차근 그를 보편적 사랑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믿음만으로 세상이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존중으로 맞아들이는 삶', '동정심 가득한 삶', '이웃과 함께하는 공동체적 삶'을 통해 구원됩니다. 만일 종교가 환대와 동정심, 이웃 사랑의 실천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 Chris L.
Reference
Adapted from Richard Rohr, “Self Love to Group Love to Universal Love,” homily, May 6, 201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amuel Oakes, untitled (detail), 2021, photo, Broadway, UK.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누군가에게 건네는 빵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이웃에게 손을 내밀도록 초대받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축복을 주고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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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8. 성 시몬과 유다(타대오)사도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10.27 21:34
2026년 10월 28일 수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6,12-19
오늘 교회는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를 기립니다.
성경에 남은 자취가 거의 없는 분들입니다.
이름 하나가 명단에 오를 뿐,
설교도, 기적 이야기도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오늘의 은총입니다.
복음은 먼저 예수님의 밤을 보여 줍니다.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사람을 뽑는 그 일을 위해 밤을 지새우십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말했듯,
이는 사도들이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뽑혔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새겼습니다.
“주님은 완전한 이들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이들을 부르시어 완전하게 만드셨다.”
이제 그 명단을 천천히 읽어 보십시오.
어부들, 세리 마태오, 그리고 ‘열혈당원 시몬’.
열혈당원은 로마 제국에 무력으로 맞서던 이들이고,
세리는 그 로마를 위해 동족에게 세금을 걷던 이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서로 원수입니다.
어제까지 칼을 겨눌 수도 있었던 두 사람이
한 스승의 부르심 앞에서 나란히 섭니다.
이보다 더 선명한 ‘일치의 표징’이 있을까요?
이념도, 과거도, 배경도 그리스도 안에서 녹아내립니다.
유다 사도는 배신자 유다와 이름이 같아,
오래도록 사람들이 부르기를 꺼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잊힌 사도’가 되었고,
역설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던 그에게, 가장 절박한 이들이 매달린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두 사도는 함께 페르시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함께 순교하였습니다. 그래서 축일도 한날입니다.
사랑·기쁨 주간의 눈으로 보면
오늘 축일은 우리를 위로합니다.
사도직은 재능이나 명성이 아니라 ‘사랑받음’에서 시작됩니다.
입당송이 노래하듯, 주님은 그들을 ‘참사랑으로’ 뽑으셨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님과 사도들 곁으로
군중이 몰려와 손을 대었고, 모두가 낫습니다.
사랑으로 부름받은 이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치유와 기쁨이 흘러넘친 것입니다.
겨자씨처럼 작고 이름 없는 두 사도를 통해서도
복음은 페르시아까지 자랐습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중요한 결정 앞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는가?
나는 ‘나와 정반대인 사람’을 형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나는 알아주는 이 없어도 내 자리에서 충실한가?
나를 통해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는가?
주님,
불완전한 저를 참사랑으로 부르시니 감사합니다.
나와 다른 이를 형제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이름 없는 자리에서도 충실히 당신을 증언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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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8. 성 시몬과 유다(타대오)사도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28 05:23
- 잘 결합 된 공동체는?
아시다시피 제자들 가운데서 열둘을 사도로 뽑으신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대표하는 자들로서 뽑으신 것이고,
어느 한 지파도 빠지지 않은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시려는 주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완전한 공동체란 완전한 사람의 공동체가 아니라
매우 다르고 불완전하지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참여하는 공동체라는 겁니다.
그리고 한 사람도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한 사람도 공동체 참여를 거부하지 않고,
공동체도 누구의 참여를 배제하지 않아야만 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고,
설사 모두가 다 참여했다고 해도 그 참여가 깨지지 않고
결합을 유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모두가 참여하게 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모래알 같지 않고 시멘트처럼 잘 결합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성도들의 공동체가 잘 결합 된 공동체라고 얘기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사도들이 모두 인격적으로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일까요?
아시다시피 사도들의 공동체는 매우 불완전한 조합입니다.
마태오라는 세리가 있는가 하면
오늘 축일로 지내는 그 반대파인 혁명당원 시몬이 있으며,
친형제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이 있었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유다와 시몬도 주님의 형제라는 얘기가 있지요.
그렇다면 12명의 사도 중에 반이 형제간이었을 것이고
게다가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의 좌우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지요.
이런 구성과 이런 역학관계 안에서 어떻게 잘 결합 될 수 있었을까요?
단합 대회를 잘해서 잘 결합 되었을까요?
이익이 딱 맞아떨어져서 잘 결합 되었을까요?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 된”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또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성령을 통하여”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들은 3년이나 주님과 함께 다니며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적을 봤지만
그들은 주님 안에 있지 않았고 각자의 꿍꿍이속이 있었고 속셈이 있었습니다.
꿍꿍이속이란 자기 속에 자기만 아는 꿍꿍이가 있고 속셈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자의 꿍꿍이속이 주님 죽음으로 무산되고 성령이 가득 찬 뒤에야
사도들은 각기 딴살림을 차리려던 것을 거두고 주님 안에 모여들게 되었고
일치의 성령께서 접착제처럼 단단히 결합 되게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결합의 시작은 딴살림, Privacy를 없애는 것이고,
오늘 주님께서 사도들을 뽑으실 때 하셨던 그 기도를 우리도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 기도는 나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전체가 하나 되길 바라는 기도요
주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을 위해 바치신 그 기도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를 한번 돌아봅시다.
나를 위한 기도 말고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얼마나 자주 하는지.
전체가 하나로 잘 결합 되길 비는 기도를 언제까지 했는지, 아직도 하는지.
멀리 있는 병자를 위해서는 같이 아파하고 기도하지만
가까이서 신음하는 사람은 그 아픔을 알지도 못하고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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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8. 성 시몬과 유다(타대오)사도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하느님의 숨
2026.10.28. 04:44
하느님의 사랑과 선의 존재성에 참여한다는 것....
오늘 우리가 듣는 독서와 복음 말씀은 '소속'과 '참여'와 관련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소속과 참여의 의미는 우리가 애써 무언가를 해야 만이 주님께로 갈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그저 주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깊은 신뢰심을 두고 그분의 이끄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겨 드리고자 하는 기꺼움으로 이루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가 주님께 속하고 그분의 존재성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 믿음과 우리 선업이나 공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무한한 사랑의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쥐시고, 우리의 죄와 어둠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선택하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믿기 어려운 진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진실 혹은 진리, 즉 이 가장 엄연한 현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가 '내' 선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선의 향기를 풍길 수 있는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시몬과 유다 사도를 기리는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저는 봅니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시작하면서 이 진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3-5).
그러고 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선행을 하며 살아가도록 그 선행을 미리 준비하셨습니다."(에페 2,10).
사도 바오로는 이미 오래 전에 우리가 하느님처럼 살도록 창조된 존재들임을 간파했던 것입니다.
일전에 한 번 나누어 드렸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나눌까 합니다.
오래 전에 Netional Geographic Wild(넷지오 와일드) 채널에서 본 개미의 생태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개미들은 철저한 계급 체제를 바탕으로 하여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는데, 무리들끼리 전쟁도 하고 약탈도 하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화면 중간중간에 인간들의 전쟁이나 살인과 약탈, 권력 쟁탈전 등의 화면을 오버랩(중첩)해서 보여주면서 해설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내용이 나왔습니다. "개미들이 꼭 사람들처럼 삽니다!"라고요...
저는 사실 그날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서 고민에 빠졌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개미들을 저렇게 창조하셨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 가지 답을 찾았습니다. 그 해설자가 잘못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해설자는 이렇게 말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이 꼭 개미들처럼 삽니다!"라고요...
사실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당신 모상으로, 또 당신과 유사하게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 뜻은 우리가 하느님처럼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시공의 한계와 우리의 본질적인 연약함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시각각 우리 존재의 근원을 의식하고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과 선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시몬 사도와 유다 사도를 통해 우리도 주님 제자들의 무리에 소속되어 있고 참여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참여를 통해 하느님처럼 살아가게 해 주는 우리 내면의 힘을 다시, 또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보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당신을 현현하시도록 우리가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에 머물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기도인 겁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결국 기도는 우리의 힘을 빼고 우리를 비워,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도록 우리를 내어 맡기는 것인 겁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선의 빛을 드러내 주는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이 두 사도는 열두 사도 중에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사도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에고는 흔적 없이 사라졌습니다 ― 마치 새들이 저 높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을 따르는 이들로서 우리 믿음의 토대가 된 이들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 두 제자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리스도인들 대다수의 주보성인입니다. 침묵과 무명의 가치는 참으로 깊습니다. 그것들은 신앙에 깊이를 더해 줍니다. 만일 성 시몬과 성 유다가 없었다면, 신약성경은 빛만 가득하고 그늘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쉽게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이 두 사도는 우리에게 거룩함은 겸손함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긴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며, 믿음의 위대함은 명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선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그에 대한 충실함에 의해 측정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사도 시몬과 사도 유다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이유가 그들의 위대함이나 그들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선하신 하느님의 주도권에 자신들을 맡겨 드렸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인들을 기리면서 그들의 위대함에 찬사를 보내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물론 그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들에게 그렇게 찬사를 보내고 나서 '내'가 그러한 사람들이 된 것처럼 착각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되겠지요?!
시몬이라는 이름은 '듣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고, 유다라는 이름은 '찬미하다' 혹은 '감사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시몬은 한때 민족의 해방을 위해 열혈당원으로 활동했을 만큼 열정을 지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요한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하며 혼동스러운 마음을 드러냅니다.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의 부족한 마음을 끌어안아 주시고, 시몬의 정치적 열정을 하느님 사랑을 알고 전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변모시켜 주시고, 유다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고자 하는 용기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사실 이 두 사도는 우리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거룩함은 완벽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참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이 두 무명의 사도 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우리가 안에 조용한 용기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평범한 것 안에서도 거룩함을 이루실 수 있다는 믿음,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오히려 기초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우리는 버려진 돌이 아니라 선택된 돌이라는 믿음을 새롭게 인식하기 위해서입니다. 시몬과 유다는 역사 기록에서는 사라졌지만, 그들의 이름은 교회의 담벼락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오래 남는 것은 화려함이 아니라 참여와 소속이며, 야망이 아니라 충실함이라는 것을. 살아 있는 하느님의 성전은 대리석이 아니라 자비로 세워집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현존을 더 깊이 느끼고 그분을 모셔 그분과 하나 되고자 제단으로 나아갈 때, 우리 자신도 함께 봉헌해 드리도록 합시다. 우리의 피로와 좌절과 평화를 향한 갈망을 믿음의 옛 돌들 곁에 놓읍시다. 모퉁잇돌은 여전히 굳건히 버티고 있고, 그 위에 건물이 여전히, 계속해서 세워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평범한 제자들의 믿음을 통해, 하느님의 목소리는 지금도 온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분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신 선과 사랑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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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8. 성 시몬과 유다(타대오)사도 축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6896
2026.10.27 16:12
하느님을 향해 돌려진 마음 2 가난이 주는 자유와 해방
하느님을 향한 가난은 그분마저 내 뜻대로 붙잡으려는 마음을 비워 갑니다. 열심히 기도했으니 반드시 내가 바라는 결과가 주어져야 한다고 여기거나, 충실히 봉사했으니 실패와 외로움에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우정은 거래의 조건을 넘어섭니다.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을 지나면서도 그분께 질문하고, 탄식하며, 끝내 관계를 놓지 않는 신뢰로 깊어집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소유하려던 손을 펴면서, 오히려 그분의 사랑 안에 맡겨져 있음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이 가난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태도와 다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드리는 사람은 그분께 사랑받는 자신의 존엄도 함께 받아들입니다. 몸과 마음의 한계를 인정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청하며, 쉬어야 할 때 쉬는 것 역시 피조물다운 가난입니다. 내가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다른 이의 선의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겸손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주는 손뿐 아니라 감사히 받는 손을 통해서도 흐릅니다.
프란치스코는 일과 업적과 이익을 구실로 정신과 마음이 주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경계합니다. 이는 일을 소홀히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일하는 동안 무엇이 나를 움직이고 있는지 살피라는 초대입니다. 같은 봉사도 감사에서 시작할 수 있고, 자신을 증명하려는 조급함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같은 책임도 사람을 살리는 돌봄이 될 수 있고, 모든 것을 장악하려는 통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일의 크기만으로는 그 마음의 방향을 알 수 없습니다.
바쁜 하루 속에서 기도는 짧게 멈추는 모습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을 듣기 전에 마음을 열어 달라고 청하고, 어려운 대화 뒤에는 자신 안에 남은 감정을 바라보며, 일을 마친 뒤에는 함께 수고한 이들의 선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짧은 멈춤은 따로 시간을 내어 주님 앞에 머무는 기도와 서로를 지탱합니다. 고요한 기도에서 배운 현존이 일상으로 이어지고, 일상에서 드러난 마음의 진실이 다시 기도로 돌아옵니다.
하루가 저물 때에는 무엇을 이루었는지와 함께 어떻게 사랑받았는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 건넨 한마디, 함께 나눈 식사, 말없이 해 준 수고, 지친 몸을 받아 준 쉼 속에서 오늘 내게 이른 선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선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나를 돌보셨음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받은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은 내일을 오직 결핍과 의무로만 맞이하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선에 응답하여 누군가의 필요를 살필 힘을 얻습니다.
프란치스코가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는 마음의 토양을 중요하게 여긴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자주 듣는 것과 말씀이 내 안에 뿌리내리는 것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지만 저절로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자기방어로 굳어 있으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기준으로만 사용하기 쉽습니다. 반면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는 마음에서는 말씀이 나를 비추기 시작합니다. 용서에 관한 말씀을 들으며 용서하지 않는 누군가를 떠올리던 사람이, 자신이 붙들고 있는 원망을 주님께 내어놓게 됩니다. 그 순간 말씀은 내 삶 안에서 자랄 자리를 얻습니다.
말씀의 열매는 관계의 작은 장면에서 드러납니다. 함께 일하는 형제가 약속한 일을 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곧바로 무책임하다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 판단 뒤에는 나의 수고를 가볍게 여겼다는 서운함이 있고, 서운함 아래에는 존중받고 싶다는 바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우리는 상대를 몰아세우거나 차갑게 멀어집니다. 그러나 잠시 멈추어 자신의 감정과 필요를 살피면 다른 선택이 가능해집니다. 무엇이 어려웠는지 묻고, 내가 겪은 부담을 설명하며, 다음에는 어떻게 함께 책임질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을 하느님께 돌린다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행동하는 일이 아닙니다. 분노와 서운함 속에서도 사람을 해치지 않는 길을 찾는 것입니다. 잘못을 분명하게 말하면서 상대를 모욕하지 않고, 필요한 책임을 요청하면서 그의 존엄을 지키며, 당장 화해하기 어려울 때에도 보복의 마음이 행동을 이끌지 않도록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때로 부드러운 위로가 되고, 때로는 관계를 지키기 위한 정직한 말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인정받는 순간에도 우리의 마음은 드러납니다. 함께 기뻐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잊힌 듯한 서운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때 마음을 주님께 돌리는 사람은 그 서운함을 부끄러워하며 숨기기보다, 자신도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타인의 빛남이 나의 가치를 빼앗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 갑니다. 내가 중심에 서지 않아도 좋은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할 수 있을 때, 마음에는 이전보다 넓은 자유가 생깁니다. 형제성은 바로 이러한 자유 안에서 자랍니다.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정배와 형제와 어머니가 되는 길도 여기에서 구체적인 모습이 됩니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결합하는 친밀함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삶으로 이어지고, 마음에 모신 그분은 거룩한 행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그리스도와 같아진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삶 안에서 그분의 사랑을 증언하도록 부름받습니다. 누군가를 끝까지 들어 주는 인내, 잘못을 인정하는 정직함, 보답할 수 없는 이를 향한 돌봄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 세상에서 다시 구체적인 얼굴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귀를 기울이려면 자신의 말을 잠시 내려놓아야 하고, 용서를 향해 나아가려면 상대에게 되갚고 싶은 마음을 거듭 다루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려면 계획과 편의를 조정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우정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사랑이 아름다운 감정에 머물지 않고, 자기중심성을 통과하는 길임을 알게 됩니다. 이 길에서 십자가는 피할 수 없는 질문으로 우리 앞에 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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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을 향해 돌려진 마음 1 하느님의 거처를 마련하기 (261012. 04:21)
http://www.ofmkorea.org/ofmkfb/586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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