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가 들어맞는 인물일지 모른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한 시에라리온 사람들을 속여 한 재산 챙겨 미국 로드 아일랜드주 청소년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니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로드 아일랜드주를 가면 어느 학교 건물에나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자선사업가 앨런 숀 페인슈타인이 지난 7일(현지시간)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고 현지 일간 프로비던스 저널이 9일 전한 뒤 다음날 현지 주민들이 잘 모르는 그의 재산 형성 과정을 소개하는기사를 내보냈다.
그가 재산을 모은 방법은 이른바 "모을 수 있는 것들"(collectibles)을 판매하는 일이었다. 예를 들어 내전으로 할퀴어진 시에라리온에서 나중에 값어치가 뛸 것이라고 현혹해 화성을 주제로 한 우표 시리즈를 만들어 팔았다.
그런데 이런 면모는 널리 알려지지 않고 1961년 구입해 세상을 뜰 때까지 살았던 크랜스턴의 허름한 목장주택에 살면서도 학교와 장학금으로 쓰라고 수백만 달러를 쾌척한 큰손으로 더 유명했다. 해서 1990년대와 2000년대 이 주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페인슈타인을 명문가로 기억한다. 왜냐하면 주의 모든 학교를 화상으로라도 정기적으로 찾아 가이아나 야구카드를 나눠주고 나중에는 페인슈타인 아이맥스 영화관의 팝콘 공짜 쿠폰을 나눠주곤 했기 때문이다.
금빛 재킷을 걸친 그는 페인슈타인 청소년 장학생이 되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기고 페인슈타인 저널에 자신의 얘기가 기록될 것이라고 고무했다. 그는 2021년 이 신문 인터뷰를 통해 "세상의 어떤 요트도 한 번에 25만명의 어린이들에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자고 맹세하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재산을 모은 방법을 보면...
그는 진짜 로드 아일랜드 사람인 것처럼 굴었지만 매사추세츠주 도체스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보스턴 대학에 다녔다. 그가 이곳에 이사 온 것은 아내 프라타른포른와 함께였는데 그녀가 아동 심리상담가 일자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태국 출신이라 둘은 그곳에서도 시간을 보냈다. 그는 나중에 태국 국왕을 알현한 뒤 어린이를 돕는 게 좋은 일이란 생각을 갖게 됐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페인슈타인은 중개업자에게 구입한 메일 리스트 인물들에게 'International Insider's Report'와 'The Wealth Maker' 같은 제목의 뉴스레터를 발송하는 사업으로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2004년 프로비던스 저널 인터뷰를 통해 털어놓았다. 그는 또 빨리 부자가 되는 법을 알려주는 'Making Your Money Grow'와 'How to Make Money Fast' 제목의 책들을 썼다.
나아가 우표나 수집용 동전, 대통령 서명 같은 것을 다이렉트 메일로 판매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 중에는 앞에 얘기한 시에라리온 우표 시리즈가 있는데 인간의 얼굴을 닮은 화성 암석 형성을 묘사한 시리즈도 있다. 그는 화성에서 지적 생명체가 발견되면 135달러짜리 세트가 1만 달러 이상으로 값이 뛸 것이란 "존경받는 과학 연구자"의 추정을 인용했다.
말도 안 되게 앞다퉈 구매 열풍이 일었는데 당연히 우표 세트는 투자한 돈조차 돌려주지 못했다. 이 세트는 현재 이베이에 15달러에 중고 거래된다.
그런데도 로드 아일랜드 학교 어딜 가나 그의 이름이...
화성 장사에 열중하던 1991년, 그는 첫 자선단체 페인슈타인 재단을 창립했다. 몇 년 안에 그는 5000만 달러를 재단에 쾌척했다. 1996년 뉴스레터 사업을 접은 뒤 다른 비영리 단체 앨런 숀 페인슈타인 재단을 세웠다.
그 뒤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대학원 학교 등에 그의 이름이 잇따라 새겨졌다.
2000년 그는 프로비던스 플레이스 몰의 아이맥스 극장에 자신의 이름을 넣을 수 있는 권리를 140만 달러에 사들였다. 아이맥스 로고 크기와 똑같이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모든 프로모션과 티켓 판매에 그의 이름이 들어가게 했다. 나중에 다른 회사가 극장을 사들여 이름을 제거해 버리자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의 관대함은 자신의 이름이 빛날 때에만 발휘된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2008년 그는 웨스털리 중학교에 100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제안했다가 철회한 일이 있었다. 몇 몇 지역사회 사람이 그의 이름을 학교 이름에 박아야 한다는 조건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당시 프로비던스 저널에 "왜 '이 친구는 모든 일에 자신의 이름을 넣는 거지'에초점이 맞춰지는지 난 이해할 수가 없다"면서 "내가 기부한 95%에 내 이름이 박혀 있지 않다"고 억울해 했다.
그래도 자선이란 유산은 이어진다...
그의 부음이 9일 전해지자 추모의 물결이 일어 크랜스턴 주민들은 때때로 그를 힘들게 했던 논쟁이 아니라 그의 자선을 기억할 것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고인은 2021년 인터뷰를 통해 자신이 죽으면 딸 레일라가 이끌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가족과 친구들이 참석한 가운데 오는 21일 스완 포인트 공동묘지에서 장례식이 열리며 줌 화상회의 시스템을 통해 생중계된다고 부음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