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 태종•이방원 제173편: 양녕과 태종의 파멸의 원인(1)
(시대와 공존할 수 없었던 발칙한 생각)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화창한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떠 있다. 또 다시 배가 흔들렸다. 억센 물결을 만났나 보다. 고개를 꺾어 강물을 바라보았다. 하늘에 떠 있던 흰구름의 반영(反影)이 수면 위에 흘러가고 있었다. 물결에 출렁이는 반영이 어리의 모습이었다. 하얗게 웃고 있었다. '어리가 보고 싶다. 지금쯤 어디 있을까?' 가슴이 뛰었다. 보고 싶었다. 강물에 어리가 있다면 뛰어 내릴 것만 같았다. 그동안 얼마나 곤혹을 치렀을까? 세자를 사랑했다는 죄로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까? 가슴이 저려온다. 유난히 입술이 예쁜 어리가 많이 많이 보고 싶다.
어기야 디야 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역수한파 저문 날에 홀로 앉았으니 돛대 치는 소리도 서글프구나
창해만리 먼 바다에 외로운 등불만 깜박거린다. 연파만경 수로창파 불리워 갈제 뱃전은 너울너울 물결은 출렁 하늬바람 마파람 마음대로 불어라 키를 잡은 이 사공이 갈 곳이 없다네.
부딪치는 파도소리 잠을 깨우니 들려오는 놋 소리 처량도 하구나
어기야 디야 차 어야디야 어기여차 뱃놀이 가잔다.
사공의 뱃노래가 끊어질 듯 이어졌다. 구슬프다. 자신의 마음을 사공이 대신 읊어주는 것만 같았다. 양녕은 흔들리는 뱃전에 몸을 맡긴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서연에서 빈객이 가르쳐주던 대학(大學)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대인(大人)과 군자의 학문(學文)이라 일컫는 대학의 첫 구절이었다. 명명덕(明明德)이다. <상서>의 '강고편'과 '태갑편'을 인용하면서 주를 달아주던 변계량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康诰曰 克明德. 太甲曰 顾 天之明命. 帝典曰 克明峻德. 皆自明也. (하늘이 모든 사람에게 밝은 덕을 부여한 것이며 사람은 누구나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이 선한 덕을 밝힐 수 있다)
이 부분이 평소에 가슴에 꽂히는 의문 부호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난해했고 오늘따라 절절했다. 덕이 작위적이라면 사랑은 자연적이다 '군자의 덕목이 덕이라면 인간의 덕목은 무엇일까? 사랑이라 정의해도 하등 부족함이 없잖은가? 부부 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 형제 간의 사랑, 남녀 간의 사랑…. 인간의 삶이 곧 사랑이다. 덕이 작위적이라면 사랑은 자연적이다.
군자가 하늘이 부여한 덕을 밝히듯이 하늘이 모든 사람에게 밝은 사랑을 부여한 것이며 사람은 누구나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이 선한 사랑을 밝힐 수 있지 않은가?' 발칙한 생각이다. 부적절한 관계를 감히 사랑이라 생각하고 있으니 공자가 놀랄 일이다. 하지만 양녕은 어리와의 관계를 사랑이라 설정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논리의 비약이 아니라 20세기에나 있을 법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늘이 나에게 어리를 사랑하라는 명을 부여한 것이며 나는 선천적으로 부여받은 이 사랑을 밝힐 수 있다.' 세상을 향하여 악이라도 써보고 싶었다. 어리와의 사랑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싶었다. 사랑을 사랑이라 밝히는데 누가 돌을 던지랴 싶었다.
돌팔매를 맞아도 밝히고 싶었다. '세상은 왜 만물의 흐름을 흐름 그 자체로 놔두지 않고 인위적으로 작위하려 할까? 이것은 무위자연(無爲自然)에 거스르는 생각과 행동이 아닐까? 만물을 바꾸려하지 않고 그대로 둔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어리와의 사랑도 제발 간섭하지 말고 그냥 그대로 놔두었으면 좋겠다.
정말 바람이다. 그런데 세상은 왜 어리와의 사랑은 안 된다고 할까?'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구름 사이로 갈매기 한 쌍이 끼륵거리며 정답게 날고 있었다. '아니야. 난 세상이 아무리 반대해도 나에게 부여된 어리와의 사랑은 밝힐거야. 난 어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어떠한 장애물이 있어도 뛰어넘을 것이고 어리와의 사랑을 위해서라면 왕좌(王座)도 미련없이 버릴 것이다.'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홀가분했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74편~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