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가 그리운 '83세 청춘' 박종환(31회) 동문
2년 전 여주FC 끝 야인 생활
시니어 축구 즐기며 건강 관리
종착역이고 싶은 강원도
춘천중·고서 그라운드 누벼
창단 관여 강원FC 동참 희망
손흥민 父子 각별한 인연
부친인 손웅정(56회)씨는 고교 후배
손흥민 '박종환 축구교실' 출신
삶의 황혼기 역전골 노려
최근 경제적 어려움 우울증도
“반드시 부활” 강한 자신감
“나는 인생 후반전, 마지막 골을 넣을 준비가 됐다.”
박종환(31회) 전 국가대표 축구 감독의 일성(一聲)이다. 1938년생, 즉 83세의 고령임에도 꼿꼿했고, 눈빛은 형형했다. 강원도 출신 1호 축구 국가대표, 1호 프로축구 선수, 1호 프로축구 감독, 1호 국제심판 등 평생을 축구인으로 살았고, 또 살고 있다. 1983년 청소년축구 4강 신화창조를 이끈 수장, 국가대표 감독으로도 승승장구했다. 프로에서도 통했다. 1989년 일화 천마, 2003년 대구 FC에 이어 2014년 성남FC 감독을 맡으면서 창단 감독 3회라는 진기록을 세운 그다. 그러나 지금 박 감독의 삶은 어렵다. 남을 도우려다 정작 본인의 생활을 돌보지 않은 탓이다. 경제적으로 힘든 나날임에도, 그는 다시 한번 필드를 누빌 희망을 품고 있었다.
■아직도 필드가 그립다=“평생 볼 차고 뛰어다녔는데, 건강하지 않으면 이상하지. 지금도 시니어 축구 경기 나가면 60~70대 애들은 거뜬히 제쳐. 걔들은 아직 나한테 안 되지(웃음).”
'어떻게 지내셨나'는 질문에 다소 동문서답과도 같은 답을 내놨다. 곱씹어 생각해보니 건강하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것이었다.
박 감독은 한 달에 서너 번 정도 서울 효창구장을 찾아 여전히 볼을 찬다.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여전히 볼 다루는 실력은 물론 뜀박질은 70대보다도 월등히 앞선다며 자랑했다. 물론 예전처럼 호랑이 감독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부리부리한 눈매는 동네 아저씨처럼 부드러워진 것이 변화라면 변화다. 허리도 구부정하지 않고 곧게 펴 있고 여느 어르신과는 달리 걸음걸이도 좋고 달음박질도 잘한다.
사실 박 감독이 건강을 강조한 것은 자신의 축구인생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항변한 것이 아닐까. 그는 2년 전 여주FC를 끝으로 필드를 떠났다. 축구인으로는 은퇴하고도 남을 시점에서도 필드를 지켰지만, 그는 여전히 배가 고프다.
여주FC 감독에서 물러날 당시 프로축구팀에 복귀할 기회도 있었다. “사실 협의를 다 했었지, 그런데 결국 뭐 때문인지 부르지 않더라고…” 끝을 맺지 못하는 그의 말에는 진한 아쉬움이 엿보였다. 여전히 필드가 그리운 그다.
■인생 후반, 반드시 역전골 넣겠다=그러나 박 감독의 최근 삶은 녹록지 않다. 그를 돕는 사람을 통해 들은 그의 최근 모습은 마음 아팠다.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늘 최고의 순간에 서 있었지만, 황혼기에 닥친 경제적 어려움에 우울증까지 겹치면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하는 중에도 박 감독은 그런 어려움을 내비쳤다. 후배와 제자들이 힘들고 어려울 때 도와 달라는 요청에 선뜻 빌려준 돈만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억원에 달하지만 돌려받은 건 없다. “돈을 빌려가서 차라리 잘됐으면 좋았을 텐데, 잘되지 못해서 돌려 달라는 말을 할 엄두를 못 내겠어….”
이와 관련, 현재 그의 생활을 지원하고 있는 한 지인은 “박 감독님이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탈탈 털리면서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어했다. 지금도 여파로 사실 생활이 어렵다. 그로 인해 우울증이 생길 정도였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박 감독은 인터뷰 내내 자신의 어려운 삶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내 축구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언제든 골 넣을 준비가 됐지”라면서 자신감을 내비쳤다. '복귀하고 싶다'는 강한 희망도 축구를 통해 부활하고자 하는 심정이 느껴졌다.
■축구인생의 종착역은 강원도이고 싶다=함경도 함흥 출신인 박 감독은 중학교 진학을 위해 춘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춘천중과 춘천고를 다니며 축구에 매진했다. 달리기를 잘했기에 그라운드를 종횡무진 누볐다. 대학 진학에 한 번 고배를 마시고 다음 해 경희대에 진학, 선수 생활을 이어 갔다.
“강원도에서 축구를 시작했지. 그 뒤 여기저기 불려가며 선수고 감독이고, 때론 심판이고 축구장을 안방 삼아 뛰어다녔지. 마지막 축구인생도 강원도에서 마무리하고 싶은데….” 강원FC 창단 작업에도 개입했다는 박 감독은 강원FC 발전을 위해 힘을 보태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구단과 선수들에게 이기고자 하는 DNA를 심어주고 싶다는 것이다.
■손흥민은 내 제자=한국 축구에 대한 박 감독의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손흥민의 활약을 묻는 질문에 눈을 반짝이기까지 했다.
“손웅정은 같은 동문(춘천고)이면서 내가 일화로 데리고 왔지. 춘천 출신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실력도 있었어.” 손흥민을 키워낸 아버지 손웅정에 대한 인연을 끄집어냈다.
손웅정은 월드클래스 반열에 오른 손흥민의 아버지다. 춘천고 재학 당시 스피드를 겸비한 공격수로 두각을 나타냈고, 대학 축구를 평정했다. 울산 현대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고교 선배 박종환 감독의 요청으로 일화 천마에 합류했지만, 부상에 발목 잡혀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던 비운의 스타이기도 하다. 유소년 축구에 눈을 돌려 'SON 축구 아카데미'를 만들었고, 둘째 아들인 손흥민을 집중 지도했다. 박 감독은 손흥민이 '박종환 축구교실' 출신이라며, 손 부자(父子)와의 인연에 힘을 주었다. 손흥민에 대해서는 남다른 승부근성에 기술까지 겸비한 선수라고 치켜세웠다.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박종환'이라는 이름 석 자를 세상에 알린 것은 1983 멕시코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다. 벌떼 축구로 U-19 대표팀을 4강에 올려놓으면서 일약 축구영웅으로 떠올랐다. 2002 한일월드컵 4강에 비견될 한국 축구사의 역사다. 박 감독은 강한 정신력을 심어주기 위해 어린 선수들을 특전사로 입소시킨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특전사)훈련 마치고 나온 선수들의 눈동자가 달랐어. 기합이 잔뜩 들어갔지. 큰 경기에서 벌벌 떠는 건 정작 나였고, 선수들이 되레 '걱정하지 마시라'며 달랬어….” 박 감독의 회고다.
6·25전쟁을 겪은 그는 미군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살아가야만 했던 어린 시절을 털어놨다. 그때 배운 농구 실력 때문에 농구선수로도 나설 뻔했다. '평생 친구'인 축구를 시작하면서도 가난한 생활고에 점심을 굶고 운동장에 나선 것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변변한 뒷바라지 못 받고 운동한 것이 가장 서글펐지….” 강한 정신력을 추구하는 그의 축구 스타일의 배경이 '가난의 굴레'였다는 것에 숙연했다.
■박종환의 축구혼='박종환 감독'의 축구는 호불호가 갈린다. 그는 강한 정신력을 기반으로 하는 축구 스타일로 정평이 나 있다. 올드팬 사이에서는 공격적이면서 다양한 전술을 구사하는 경기력에 찬사를 보낸다. 때론 강압적인 지도 스타일로 선수들과 충돌도 겪었고, 그로 인해 팀을 떠나야 했던 아픔도 겪었다. 하지만 여전히 연말마다 찾아오는 제자들이 있을 정도로 정도 많이 주는 지도자였다. 명감독과 폭력 감독 사이에서 박 감독의 평가는 여전히 엇갈리지만, 분명 대한민국 축구사에 큰 족적을 남긴 것에는 이견이 없다.
“내 스스로 능력이 없고 자신감이 떨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축구 인생의 종착역”이라고 말한 고독한 승부사 박종환. 그의 희망처럼 다시 필드에서 볼 수 있을까. 롤러코스터와 같은 그의 축구인생만큼, 그의 삶도 다시 솟구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