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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릉
처음 이름은 기(祺)이고, 뒤에 전(顓)으로 고쳤다. 몽고명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이고, 아호는 이재(怡齋)·익당(益堂)이다. 충숙왕(忠肅王)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이다. 왕비는 원나라 위왕(魏王)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12세가 되던 1341년(충혜왕 복위 2)에 원나라에 들어가서 10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1351년 충정왕(忠定王)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공민왕은 즉위한 해인 1351년 11월 이제현·조일신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정치적 기반을 다진 뒤, 다음해 1월에 몽고식의 변발(辮髮)과 호복(胡服)을 폐지하여 고려의 자주적 전통을 추구하려는 새로운 정치의 방향을 암시했다. 곧이어 2월에는 권신(權臣)이 변칙적으로 인사행정을 하여 더 큰 폐단을 낳던 정방(政房)을 혁파하여 정치기강을 바로잡았으며 아울러 즉위교서를 반포했다.
여기에서 공민왕은 역대 선왕 및 기자(箕子)에 대한 봉사(奉祀)를 언급하여 그의 자주의식의 일면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정치면에서 왕의 권능을 직접 발휘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경제면에서는 불법적인 전민탈점(田民奪占)에 대한 시정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전민변정사업). 얼마 뒤 8월에 설치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은 그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이러한 의도는 부원배(附元輩)를 중심으로 하는 권문세족의 반발로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더구나 즉위한 지 1년 만인 9월에 조일신의 난이 발생하여 공민왕의 입지가 약화되었고 대신 부원세력이 강화되어 더이상 개혁정치를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다가 1356년(공민왕 5)에 이르러 마침내 본격적인 개혁정치를 단행했다. 그것은 대외적으로는 반원정책, 대내적으로는 왕권의 강화와 사회경제적 모순의 혁파를 주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원의 세력이 약화되는 대륙의 정세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전개되었다.
공민왕은 먼저 기씨 일족을 비롯한 부원세력을 전격적으로 주살하고,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했으며, 압록강 이서와 쌍성(雙城)지역을 공격했다. 뒤이어 원의 연호를 정지하고, 원의 압력으로 변경했던 관제(官制)도 문종 때의 것으로 환원했다. 그리고 24항목에 걸치는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이는 공민왕 즉위 초의 전민변정을 비롯한 일련의 개혁 시도와 그 맥락이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홍언박을 정점으로 하는 왕의 외척세력이 중심이 되었으므로 그만큼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고, 더구나 재위 8년과 10년에는 홍건적의 침입이 있었다. 따라서 원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목표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이 개혁도 전반적인 면에서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공민왕 14년부터 또다시 개혁을 시도했다.
먼저 내재추제(內宰樞制)를 신설하여 권문세족이 중심이 된 도당(都堂)의 권리를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많은 폐해를 끼치고 있던 외방의 산관(散官)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아울러 이전에도 설치된 바 있는 전민변정도감을 다시 두어, 권세가들이 탈점한 전민을 변정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는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와해시키는 것이었으므로 권문세족들은 맹렬히 반대했다. 이에 공민왕과 신돈은 왕권을 뒷받침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필요로 하여 신돈과 신진사대부 사이의 정치적인 제휴가 이뤄졌다.
신돈이 등장한 이후 공민왕과 신돈, 신진사대부가 추진하였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을 정치적으로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졌으므로 이전의 시도와는 달리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제거되자 그가 중심이 되어 추진하던 개혁정치도 중단되고 말았다. 이처럼 공민왕대 마지막 개혁 시도였던 신돈의 개혁도 중도에서 실패로 끝났지만, 그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가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공민왕이 즉위하던 1351년은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11년으로, 유례없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원도 이때를 전후하여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위(帝位)를 둘러싼 분쟁과 귀족간의 알력이 심화되고 순제의 실정(失政)으로 재정이 궁핍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진 틈을 타 각지에서 한인(漢人) 반란군이 봉기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원은 토벌군을 파견하여 그 진압에 힘썼는데, 고려에도 군대파견을 강력히 요청했다. 일찍이 공민왕은 왕자로서 원에 머물러 있을 때부터 원의 쇠약상을 목격한 바 있으며, 즉위하여서는 곧 반원 의지를 드러낸 바 있었다. 그러나 즉위한 지 얼마 안되어 왕권을 굳히지 못한 공민왕은 부득이 원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1354년(공민왕 3)에 조정군(助征軍)을 파견했다.
고려 조정군은 다음해에 귀국했는데, 고려는 이 기회에 원이 동요하는 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큰 용기를 얻은 공민왕은 1356년 5월에 드디어 적극적인 반원정책을 실천에 옮겼다. 기철 등의 부원배(附元輩)를 제거하고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했으며, 원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관제를 문종 때 것으로 복구했다. 그리고 평리(評理) 인당(印璫)을 서북면병마사로 삼아 압록강 이서의 8참(站)을 공략케 하여 파사부 등 3참을 깨뜨리고 밀직부사 유인우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아 쌍성(雙城) 지역을 쳐서 회수하는 등 여러 조처를 단행했다. 아울러 중국 대륙의 정세변동을 빨리 파악하기 위하여 강남지역에 할거하고 있던 장사성(張士誠)이나 방국진(方國珍) 등의 군웅과 자주 교빙했다.
이에 대해 원은 크게 반발했다. 비록 원은 전보다는 약해졌으나 공민왕으로서는 아직 원과 정면으로 대결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따라서 고려가 다시 원의 연호를 사용하고, 서북면을 공략했던 인당을 베어 사과한 것 등은 부득이한 조처였다. 이와 같이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원의 압력을 받아 동요하고 있을 때인 공민왕 8년과 10년, 북방으로부터 홍건적의 침입이 있었다. 2차례에 걸친 홍건적의 침입은 고려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지만 원은 이를 수수방관하여 다시금 국력의 쇠약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거기에다가 1363년(공민왕 12)에 원 세력과 결탁한 김용의 반란, 1364년 원이 직접 개입한 덕흥군 옹립 사건 등이 일어나 고려와 원의 관계는 더욱 냉각되었다. 그러다 1368년 명나라가 건국되고 원이 북쪽으로 쫓겨가자, 고려는 원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명과 정식으로 국교관계를 맺었다. 아울러 공민왕은 익군(翼軍)을 조직하고 이성계를 동북면원수로, 지용수를 서북면원수로 삼아 압록강 북쪽의 만주지역에 있던 원의 동녕부(東寧府)를 정벌했고, 랴오둥의 중심지인 랴오양을 공격하여 그 성을 빼앗았다. 이후에도 공민왕은 반원친명정책(反元親明政策)을 계속했으나, 이후 고려말의 복잡한 국내외 정세는 친명파와 친원파의 대립을 가져왔다.
1351년 왕위에 오른 공민왕은 원명교체라는 대륙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흥을 꾀하는 많은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1365년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모든 국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정사를 소홀히 했다. 1371년에는 실정을 거듭하는 신돈마저 귀양보내 사사(賜死)했다. 공민왕은 1372년에 공신 및 고위관직자의 자제를 선발하여 자제위를 설치했다.
그런데 자제위 소속의 미소년 홍윤(洪倫)이 익비(益妃)와 통하여 익비가 임신했다. 이를 환관 최만생이 공민왕에게 고하자, 평소 후사가 없어서 고민하던 공민왕은 익비가 낳을 아들을 자기의 아들로 삼기 위해 홍윤 일파와 최만생을 모두 죽여 사실을 은폐하고자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최만생이 먼저 홍윤·권진·홍관·한안·최선 등과 공모해 밤에 공민왕을 죽였다. 뒤에 이들은 이인임·안사기·경복흥 등에게 발각되어 효수(梟首)당했다.
그림에 뛰어나 고려의 대표적 화가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지며, 글씨에도 능했는데 특히 큰 글자에 뛰어났다. 작품은 〈천산대렵도 千山大獵圖〉만이 전하는데, 이밖에 〈노국대장공주진 魯國大長公主眞〉·〈아방궁도 阿房宮圖〉·〈현릉산수도 玄陵山水圖〉·〈석가출산상 釋迦出山像〉·〈동자보현육아백상도 童子普賢六牙白象圖〉등이 훌륭하다고 전해진다. 시호(諡號)는 공민(恭愍)이며, 능은 현릉(玄陵)이다.
공민왕은 왕비의 불륜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정통사극의 귀환을 알리며 호평을 받고 첫 출발한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 1,2회에선 공민왕(김명수 분)이 개혁 의지를 다시 불태우려는 시점에서 살해를 당하는 내용이 담겼다.
공민왕은 숱한 사극에서 등장한 인물. 사극 뿐 아니라 한국 역사에서도 꽤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왕이다. 하지만 공민왕을 바라보는 시선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망국의 길에 들어선 고려를 다시 일으키려다 반역자들의 손에 참변을 당한 개혁군주라는 시선과 아집에 둘러쌓인 채 남색을 즐기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군주라는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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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년 1월
공민왕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부인의 영정을 앞에 둔 채 였다
아내를 잃은지 벌써 3년째
왕은 여전히 공주의 죽음을 부정했다
노국공주의 초상과 평상시 처럼 지냈던 공민왕
그는 요동을 정벌하고 권문세족을 숙청했던 개혁군주였지만
노국공주를 잃은 공민왕은 심질
즉, 정신병에 걸린 군주일 뿐이었다
사랑을 잃은 왕의 마지막은 시리고
또, 아팠다
139권의 방대한 기록 고려사
고려 왕에 대한 세세한 기록은 물론
열녀와 간신까지 포함한 천여명의 열전까지 실은 역사서다
그 중 공민왕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았다
공민왕의 본래 모습은 왕다웠다
엄격하고 신중했으며 예의바른 성격이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의심이 많고 사나운 성품으로 변했다
같은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는 그야말로 급격한 변모
그 시작은 아내의 죽음이었다
과도하게 슬퍼한 나머지 스스로 자신의 의지를 상실한 것이다
왕비의 죽음을 공민왕은 감당치 못했다
공민왕은 손수 공주의 초상을 그려 밥을 먹을 때에도 슬피 울 때에도 언제나 곁에 두었다
그녀는 몽골사람 이었다
공민왕은 공주가 생각이 날 때마다 몽골 음악을 듣고, 또 연주했다
시간이 흘러도 그리운 마음은 바래지 않았다
공주의 영전이 빗물에 상하지는 않을까 늘 살피고 걱정했으며
공주의 생일에는 연회를 베풀었고 공주의 기일에는 직접 제사를 지냈다
공민왕 22년
공주가 유독 그리웠던 10월
공민왕은 무덤을 찾아 제사를 지낸 뒤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능 밑에서 밤을 보냈다
공민왕은 예술적 감수성이 남달리 풍부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의 유품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공민왕 금
공민왕 금은 수덕사의 승려 만공이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이강으로 부터 1899년에 물려받은 거문고 이다
거문고 바닥에는 조선시대 유학자였던 이조북의 시도 새겨져있다
공민왕이 신령한 오동나무를 얻어 만들게 되었다는 유래다
음악을 사랑한 감성적인 공민왕
그의 성품은 섬세한 만큼 슬픔이 깊었다
공민왕은 공주를 잃은 슬픔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다시
1372년 10월 1일
공민왕의 기묘한 버릇
그것은 여장이었다
공민왕은 항상 자신을 여자처럼 화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분명 기이한 모습이다
밤낮으로 공주를 생각하다 결국
정신병이 생긴 탓이라고 역사는 판단하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
그 슬픔의 깊이가 고스란히 고려사 기록 속에 스며들어 있다
고려 왕자였던 공민왕과 멀리 먼 노국공주와의 사랑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고려가 처했던 비극적 현실 속에 그 답이 있다
공민왕 이전,
쿠빌라이칸은 중앙아시아를 정복하고 원을 세웠다
원은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현재의 자금성은 명나라가 건국되며 새로 지은 것이다
그러나,
1341년 12살의 나이에 볼모로 끌려온 어린 공민왕
공민왕은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황태자의 시중을 들었다
그러나 고작 12살
이 곳 에서의 공민왕은 단지 어머니와 생이별한 어린아이였다
외롭고 두려운 볼모생활이었다
고려에 대한 원의 지배는 왕자를 인질로 잡아두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고려의 왕을 마음대로 임명했고 폐위 시켰다
공민왕의 아버지와 형은 왕위를 두번씩이나 주고 받는 기행까지 겪었다
고려의 왕권은 더이상 존엄하지 않았다
고려 왕의 귀양 살이도 흔했다
형 충혜왕이 왕위에서 내려오며 귀양길에 겪은 수모는 특히 모욕적이었다
원나라 사신은 고려의 왕 충혜를 발로 차며 포박했고 또한 꾸짖기까지 했다
충혜왕은 북경에서 2만리 떨어진 게양으로 가야 했다
그 길로 단명하고 말았다
충혜왕의 나이 스물아홉이었다
그것은 고려의 비극이자 공민왕의 개인적인 원한이기도 했다
고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원은 고려의 왕과 원의 공주를 혼인 시켰고
그 아들은 북경에 데려다 인질로 삼았다
결국 몽골 공주와 결혼한 자가 고려의 왕이었고
몽골 공주의 아들된 자가 고려의 왕 이었다
힘들이지 않고도 효과적으로 통치하는 방법 이었다
다섯명의 고려왕은 모두 일곱명의 몽골 공주와 결혼했다
이들은 일곱명의 부인 앞에서 고려의 왕이 아닌 신하로 살았다
심지어 쿠빌라이칸에게 장가 든 충렬왕은 부인에게 맞고 살았을 정도였다
이런 공민왕에게 원나라 공주와의 결혼은 피하고 싶은 일 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349년 공민왕은 원나라 여인 노국공주와 결혼을 올린다
이유는 무엇일까?
1344년 형 충혜왕이 유배길에 사망하며 공민왕이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조카 충목왕이 보위에 오른다
그 후에도 충혜왕의 서자 저하가 공민왕을 제치고 충정왕이 된다
게다가 공민왕의 어머니는 고려인 이었다
공민왕에겐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했다
공민왕은 두번째 왕위를 빼앗긴지 불과 5개월 뒤 노국공주와 서둘러 혼례를 치루었다
그리고 2년 뒤
공민왕은 드디어 왕위에 오른다
반원주의자인 공민왕과 원나라여인 노국공주의 결혼은 분명히 정략결혼이었다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공민왕의 것으로 전해지는 유물 한 점이 보관되어있다
원래는 두루마기 형태였으나 일부만 남아있다
수렵도라고도 불리는 천산대렵도
사냥꾼들이 말을 타고 내달리는 광경이 정교한 필치와 깊이있는 색조로 묘사 되어있다
공민왕은 고려의 대표적인 화가다
그 실력은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쌍화곡 고려속요 맞긔.. )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난 대신 고려의 호방한 기질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공민왕은 고려란 나라에서 사냥을하지 않는 유일한 왕이었고 심지어 말도 타지 못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정략결혼으로 만났지만 감성적 코드가 일치했다
이들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 1359년 4월의 기록에 나타나있다
신하들이 노국공주에게 후궁을 들이자는 청을 하고 있었다
이 때가 결혼 11년 차
혼인 한 지 10년이 넘도록 공민왕은 후궁을 들이지 않았다
(후궁 많은 왕들 보고 있숴여?? 일단 세종대왕님 눈 좀 감으시고...)
부부에게 아이가 없었기에 대신들의 청은 어렵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은 시련을 이기며 돈독해졌다
20만명의 홍건적이 무서운 속도로 남진해 20여일 만에 평양이 함락되고
두 달 후 개경까지 넘어갔을 때
공민왕과 노국 공주는 피난을 떠났다
길은 험했다
왕의 옷은 젖고 얼었다
공민왕은 옷 섶으로 불을 피워 몸을 녹였다
시련의 시기 사랑은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깊어졌다
노국공주는 피난처인 안동에서 공민왕을 설득해 말타는 연습을 시키기도 했다
천생의 베필이었다
2년 뒤 흥왕사
괴한 50여명이 공민왕의 처소에 침입했다
반역이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그녀가 나섰다
" 저 방에 들어가려거든 나의 목을 베고 가라! "
반란군은 원나라 공주의 기세에 역모를 포기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이야기는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7세기가 지나도록 이어졌다
서울 마포의 광흥창터에는 공민왕의 사당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공민왕 사당엔 그 홀로 모셔져 있는 것이 아니다
노국공주도 함께다
노국공주는 공민왕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노국공주와의 사랑을 배경으로 공민왕은 거침없는 개혁정책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반원의 깃을 내건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1356년
공민왕의 은밀한 계획이 드디어 드러났다
그것은 친원 세력의 처단이었다
기철과 그의 아들 유걸, 조카와 측근까지
기씨 일당은 대부분 이 밤, 그자리에서 즉사했다
대대적인 숙청이었다
기철 일당의 처단
그것은 위험한 선택이었다
기철은 바로 원나라 기황후의 친오빠 였기 때문이다
누이가 황후에 조카가 황태자
기철은 스스로를 신하라 칭하지도 않았다
오만함은 도를 넘었다
친원파는 고려를 원의 속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원나라에 기댄 권문세족들은 아녀자를 범하고
돈으로 관직을 사고 팔고,
각지에 농장을 만들어서 수탈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그들은 자신의 딸들을 원나라에 기꺼이 조공했다
공민왕은 계엄령을 선언한 뒤, 이것이 공정한 처사였음을 원에 알렸다
공민왕이 친원세력들을 제거할 당시
원나라는 각종 농민반란으로 흔들리는 말기였다
고려에 정벌군을 보내기에는 역부족인 상황
공민왕은 이 정세를 노렸다
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자주 국가 고려를 건설하고자 하는 공민왕의 꿈은
즉위와 함께 실현되기 시작했다
10년만에 귀국한 공민왕은
먼저 100여년간 이어지던 풍습부터 바로잡았다
스스로 먼저 변발을풀고 몽골복을 벗었다
풍습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우리 고유의 것으로 알고 있는 전통 혼례에도
몽골의 풍습이 스며들어 남아있다
신부의 족두리나 연지 곤지가 그렇다
풍속은 섞이면 정착하기 마련이다
공민왕은 또한 원의 연호 사용을 금지하는 한편
고려에 설치된 원나라 관아 정동행성 또한 폐지시켰다
이것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공민왕에겐 더 큰 포부가 있었다
쌍성총관부를 격파하고 잃어버렸던 북방영토를 수복한 것이다
북벌에 대한 공민왕의 야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고구려의 옛 땅까지 수복하겠다고 결심했고
그 각오는 마침내 요동을 (잠시)점령하게 된다
공민왕의 목표는 한가지였다
자주독립국가 고려
노국공주에겐 자신이 자란 모국을 배반하는 것 이었다
그러나
공민왕의 개혁 정책은 재위기간 내내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빼앗긴 토지를 돌려주고, 노비의 신분을 회복시켜주는 등 파격적인 정책을 펼쳐나갔다
노국공주와의 사랑과 거침없는 고려의 개혁
하.지.만. 행복했던 시간은 거기까지 였다
공민왕의 말로에는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1365년 2월
16년 만의 첫 임신
공주가 위독했다
산달이 되며 병이 위독해지자
공민왕은 일급 죄인까지 사면하며 무탈을 빌었다
그러나..
공주는 죽었다
노국공주의 정릉
그리고 그 곁에는 공민왕의 현릉도 있다
고려시대 왕과 왕비를 함께 모신 유일한 쌍릉이다
노국공주의 능을 만드며 공민왕은 쌍릉을 계획했다
공주의 능을 지으며 또한 대규모 토목공사를 진행시켰다
3천명의 승려가 지낼 수 있는 영정
즉, 공주의 초상화를 걸어둘 전각을 짓기 위해서였다
(영정 걸어두려고 3천명 들어가는 전각 짓는 스케일의 사랑 ㄷㄷㄷ)
공주가 죽은지 8년 뒤
" 어찌하여 귀빈들을 가까이 하지 않소? "
" 공주만 한 여자가 없습니다 "
" 한번 죽는 것은 당연한 이치요
왕도 마침내 죽음을 면치 못할텐데 어찌 그다지 심히 슬퍼하시오
남들 웃음거리가 될까 두려우니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마시오 "
공민왕은 신돈을 등용시켜 정사를 돌봤다
신돈을 통해 개혁정치를 이어가고자 했지만 그는 곧 타락했다
공민왕이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수록 신돈의 권력은 막강해져만 갔다
백관들은 궁궐로 가지 않고 그의 집으로 출근했다
결국 공민왕은 신돈을 주살한다
공민왕이 마지막으로 의지했던 신돈의 사망직후
그는 자제위를 설치한다
미소년들로 이루어진 경호 집단이었다
(영화 "쌍화점" 다들 보셨나요? 영화에서는 자제위가 아닌 '건룡위' 라는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다들 기억나시나요? ㅎㅎ
비록 영화는 후로게이 정치 치정극이 되고 우리에게 '자시에 오겠다' 만 남겼지만..ㅠㅠ)
공민왕은 자제위를 늘 곁에 두고 새로 맞은 왕비조차도 가까이 하지않았다
이 무렵부터 고려사는 공민왕을 정신이상으로 보고있다
공민왕은 극도로 문란해져갔다
자제위 소년들의 밤을 훔쳐보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기이한 왕의 행적
아내들을 멀리하고, 여장을 하고, 또한 지나치게 총애한 자제위까지
고려사의 기록은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이다
그렇게 2년
공민왕은 자제위에 의해 살해당했다
고려의 개혁군주로 23년
노국공주의 남편으로 16년
그리고 그리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채 9년
마흔 다섯
왕의 죽음은 허무했다
공민왕은 생전의 바람대로 노국공주의 곁에 잠들었다
고려의 왕릉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능으로 평가받는 공민왕릉의 내부
죽음이 갈라놓지 못하도록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쌍릉은 특별한 구조로 건축되어있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지극한 사랑은
고려가 패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뒤에도 곧잘 회자된다
공민왕과 노국공주는 지극한 사랑을 비유한다
조선의 정수를 관통하는 종묘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아니면 모실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이 곳에 공민왕이 있다
그리고 공민왕의 곁에는 노국공주가 있다
공민왕을 모시기 위해선 노국공주도 함께 있어야 했던 것이다
공민왕의 마지막 모습이 이처럼 기이한 것은
고려사가 조선에 의해 쓰여졌다는 점도 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서
고려와 공민왕의 말로는 어둡게 쓰여져야만 했다
하지만 노국공주와의 사랑만큼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사랑까지는 모욕하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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