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를 사랑하는 스승의 세한도가 조선 500년 걸작이 되다
歲寒圖
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계절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 수 있다.
藕船是賞(우선시상) 스승이 제자를 다정하게 부른 후, 감상하게나,
阮堂
長毋相忘(장무상망)우리 서로 잊지 말자
스승과 제자의 인간지정이 하늘을 감동 시킨다
제자 이상적인가 스승을 생각하여 구하기 힘든 책을 구하여
스승 김정희에게 보냈다
「경세문편(經世文編)」이란 책을 구해다 보내 주었다.
‘만학집’ ‘대운산방집’ 등을 부쳐 주었는데
어렵게 구한 책을 권력 있는 사람에게 바쳤다면 출세가 보장 되었을 텐데
멀리 유배되어 아무 힘도 없는 스승 김정희에게 보내주었다.
이상적의 손에서 추사의 손으로 넘어간 책은 100권이 넘었다고 한다
歲寒圖
선생 추사 김정희는 제자 이상적에게 ‘논어’를 인용해
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 (논어 자한편)
계절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시련에 처했거나 겪은 후라야 그 사람의 된 참모습을 볼 수 있다고
제자 이상적의 사람됨을 칭찬하는 문구로 활용하고 있다.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고 적어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을 다정히 부른 후,
우리 서로 잊지 말자(長毋相忘) 스승과 제자의 아름다운 사랑을 오래 잊지 말자
권세를 따르는 세속과는 달리 문하의 구의(舊誼)를 잊지 않고
궁경(窮境)의 완당(阮堂)에게 정의(情誼)를 다하는 데 감격해서 세한도를 선물 하였다
스승이 권력을 잃고 귀양살이를 하게 된 뒤에도 변함없이
사제의 의리를 지킨 제자에게 감동한 추사는 보답하고 싶었다.
추사가 감격해 세한도를 보낸 이유였다.
이상적은 스승의 <세한도>를 받아보고 곧 다음과 같은 답장을 올렸다.
스승의 마음을 담은 세한도를 받은 우선은 감격에 겨워 답신했다.
우선은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제 분수에 넘치게 칭찬을 했고 과당한 말씀"이라고 겸손함을 보였다.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냐“
"서책은 선비와 같아 어지러운 권세와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간 것“
이라 언급했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하고 절실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 스스로 하지 않을래야 아니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서책은, 비유컨대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권세와는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스승과 제자의 정이 담긴 세한도는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참된 사람의 한 모습을 보게 한다.
이번 사행使行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들어가 표구를 해서
옛 지기知己분들께 두루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하고자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를 벗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득을 초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당하신 말씀입니다.
이상적은 편지의 글대로 이듬해 10월 동지사冬至使의 역관이 되어 북경에 갔다.
그리고 그 다음해 정초에 청나라의 문인 16인과 같이한 자리에서
스승이 자신에게 보내준 작품을 내보였다.
그들은 <세한도>, 그 작품의 고고한 품격에 취하고,
김정희와 이상적 두 사제간의 아름다운 인연에 마음 깊이 감격하였다.
두 사람을 기리는 송시頌詩와 찬문贊文을 다투어 썼다.
이상적은 이것으로 모아 10미터에 달하는 두루마리로 엮어,
귀국하는 길로 곧바로 유배지의 스승에게 보내 뵈었다.
1년이 지나 다시 <세한도>를 대한 추사의 휑한 가슴에 저 많은 중국 명사들의 글귀가
얼마만큼 큰 위안으로 다가섰을지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추사 김정희는 귀양살이하는 제주도의 집 산에 있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리고
歲寒然後知松柏之後彫也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야)
계절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 수 있다. (논어 자한편)
사람이 시련에 처했거나 겪은 후라야 그 사람의 된 참모습을 볼 수 있다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우선은 감상하게나, 우리 서로 잊지 말자" 세한도를 제자 이상적에게 주었다
이상적은 나중에 스승 김정희의 부음을 듣고 지은 시 가운데서 이렇게 읊었다.
‘평생에 나를 알아준 건 수묵화였네
흰 꽃심의 난꽃과 추운 시절의 소나무’
知己平生存水墨 素心蘭又歲寒松
스승 김정희가 그려준 <세한도>와 <묵란도墨蘭圖> 두폭은
이상적의 평생이 가치 있는 것이었음을 대변해 줄 정도로 소중했던 것이다.
이상적은 추사보다 18세 연하의 중인中人이었다.
김정희는 다가오는 새 시대를 예감하고 일찍부터 계급의 장벽을 넘어 재능 위주로 제자를 길러냈으니
그 문하에는 진보적 양반 자제는 물론 중인과 서얼 출신의 영민한 자제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상적은 중국어 역관譯官으로 12번이나 중국을 드나들었는데,
스승이 닦아놓은 연분을 따라 중국의 저명한 문사들과 깊이 교유하였다.
그는 특히 시로 크게 명성을 얻어 1847년에는 시문집을 중국에서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의 문집 『은송당집恩誦堂集』이란 제목은
‘헌종 임금께서 직접 그의 시를 읊어주신 은혜가 있었다’ 는 뜻을 담고 있다.
스승에게 보인 기특한 행실이 음덕이 되었던지 이상적은 벼슬길 역시 순탄하고 높았다.
하여 1862년에는 임금의 특명으로 종신토록 지중추부사知中樞府使를 제수 받았다.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는 푸르름이 동심(冬心)을 품고
꿋꿋이 서리와 눈에 굽히지 않는 삶의 희망을 이야기 한다
소나무·대나무·매화는 ‘세한삼우(歲寒三友)’로 불린다.
겨울철의 세 벗이라는 뜻으로서 흔히 한 폭의 그림에 그려서 ‘송죽매(松竹梅)’라고 한다.
지조 있는 선비인 군자를 상징한다.
탄탄대로를 걷다 인생 밑바닥에 떨어졌을 때 변치 않고 찾아주는 친구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세한삼우의 하나인 소나무가 바로 그러한 일을 했다.
세한도(歲寒圖)는 완당(阮堂) 추사 김정희가 1840년(헌종(憲宗)6년)에
윤상도(尹尙度)의 투옥 사건에 관련되어 제주도(濟州道)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59세 때(1844년)의 작품으로서,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자신을 잊지 않고 책을 보내주는
제자 우선 이상적(藕船 李尙迪)을 위해 ‘세한도’를 그렸다.
청(淸)의 연경(燕京)에서 유학하고 있던 사랑하는 제자 이상적(李尙迪)에게 그려 보낸 일품이다.
이 세한도(歲寒圖)야 말로 그 화격이나 고고한 필의로 보아
조선왕조 500년의 걸작으로 꼽힐 만하다.
<세한도>는 그려진 연유에도 곡절이 있었거니와 그려진 이후에
천하를 유랑한 행로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애초 제주도에서 그려져 이상적에게 보내졌다가 연경까지 다녀왔던 이 작품은
다시 스승에게 보인 후에 물론 이상적의 소장이 되었다.
그러다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金秉善이란 이의 소장품이 된 것을,
그의 아들 김준학金準學이 물려받아 2대에 걸쳐 소중하게 보관하였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에 이르러 추사 김정희의 연구자였던
경성대학 교수 후지즈카 린(藤塚隣)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고
급기야 광복 직전인 1943년 10월 현해탄을 건너고 말았다.
그러나 종전終戰직전에 서화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선생이 일본 도쿄로 후지즈카를 찾아가
비 오듯 퍼붓는 폭격기의 공습 위험을 무릅쓰고 석달 동안이나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가까스로 양도받아 다시 조국 땅을 밟게 되었다.
당시 후지즈카가 소장했던 김정희에 관한 그 밖의 수많은 자료들은
결국 미군의 폭격을 피하지 못하여 대다수가 타버리고 말았다고 하니,
<세한도>는 그야말로 구사일생으로 간신히 화를 피한 셈이다.
그래서 작품 말미에 이러한 전말을 기록했던 오세창吳世昌선생은
<세한도>를 다시 보게 된 감회를 비유하여 말하기를
“마치 황천에 갔던 친구를 다시 일으켜 악수하는 심정이라譬如起黃泉之親朋 而握手焉” 하였다.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는 금석학과 서화에 능한 조선후기 문인이다.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형조참판을 지내는 승승장구했으나 정쟁에 휘말리면서
한순간 나락으로 떨어졌다.
1840년 제주도로 유배됐고 육지에 남아 있던 아내(론혜 이씨)마저 2년 뒤 저세상으로 떠났다.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지내던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독서였다.
유배된 처지라 책을 구하기 어려웠지만 제자 이상적(1804~1865)이 스승의 심정을 헤아리고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마다 최신 서적들을 구해 보내줬다.
스승이 권력을 잃고 귀양살이를 하게 된 뒤에도 변함없이 사제의 의리를 지킨 제자에게
감동한 추사는 보답하고 싶었다.
유배 5년째 되던 어느 날 추사는 제자에게 줄 수묵화를 그렸다.
세로 23㎝, 가로 69㎝의 화폭 중앙에 간결한 필선으로 초가집 한 채를,
그 옆으로 앙상한 소나무와 잣나무 4그루를 그려넣었다.
한겨울에도 푸르름을 유지하는 소나무나 잣나무를 통해 위기에서도 지조를 잃지 않는
꼿꼿한 선비 정신을 담아낸 것이다.
조선조 말 천재 다산과 추사
복숭아뼈 닳도록 공부한 다산 (踝骨三穿)
붓 천 자루 털 빠지게 쓴 추사 (磨穿十硏)
삶에 진심과 정성을 다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