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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9.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묵상글 ( 10/28 20:45, 06:25. )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0-21시. *가끔은 이전에도 올릴 수 있음 > : 호명환 신부님. 고인현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6시 이후. *가끔은 이전에도 올릴 수 있음 > :
김찬선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 가능하면 위와 같이 할 계획이나 개인 형편으로 그리 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오늘 묵상글 공유 : 호명환 신부님(10/28 20:45), 고인현 신부님 ( 06:25 추가. )
김찬선 신부님: ( 06:25 추가. ) 호명환 신부님: ( 06:25 추가. )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10/28 20:45.)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4. 3-1)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계속 여부도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11월 대림시기(11/29) 이후 12월 중순 아니면 , 그 이전이라도 4.3-1 뜨락의 운영을 중단할 계획이오며
카페는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킬 계획이기에, 2)의 회원분이나 제가 가끔 묵상글을
올릴 수도 있을 경우를 감안, 묵상글 뜨락(4. 3-1)은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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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9.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28. 15:28
사랑에 순명하는 삶!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사람이 만든 법은 정의를 보장하지만, 하느님의 더 높은 법은 사랑을 낳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이웃 사랑!
사랑에 순명하는 삶!
2026년 10월 28일 수요일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5-37)를 요약하며, 우리가 누구를 이웃으로 여기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성찰합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는 네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할 모든 사람이다. 그는 삶의 길가에 쓰러져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다. 그는 유다인도 이방인도 아니며, 러시아인도 미국인도 아니다. 또한 흑인도 백인도 아니다. 그는 삶의 수많은 예리코 길 위에서 만나는 '어떤 사람', 곧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신학적 개념이나 정의로 규정하지 않으시고, 삶의 구체적인 자리에서 누구를 향해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로 정의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선함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요? 왜 그는 오늘날까지도 이웃 사랑의 덕을 보여 주는 감동적인 모범으로 남아 있을까요?
제 생각에 그의 선함은 한마디로 이타적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존재 깊은 곳까지 이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선한 사람이었던 이유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삶의 가장 중요한 법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익보다 고통받는 이웃의 필요를 먼저 생각했고, 그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인간이 만든 법은 정의를 보장하지만, 그보다 더 높은 하느님의 법은 사랑을 낳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제로 요구될 수 없는 것에까지 기꺼이 순명했기에, 인류의 양심을 상징하는 인물이 됩니다. 세상의 어떤 법도 그에게서 드러난 그토록 순수한 자비와 진실한 사랑, 그리고 철저한 이타적 사랑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들이여, 오늘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모든 인종과 모든 민족이 서로에게 참된 이웃이 되라는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온 세상이 서로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은 결코 한때의 구호나 유행어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길 건너편으로 지나쳐 가는 여유를 부릴 수 없습니다. 과거에는 그런 태도를 도덕적 실패라고 불렀지만, 오늘날에는 그것이 인류 전체를 파멸로 이끄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리적으로는 하나의 세상 안에 함께 살면서도, 영적으로 서로 단절된 채 오래 살아갈 수 없습니다.
결국 나는 삶의 예리코 길가에 쓰러져 있는 상처 입은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나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라 내 삶의 일부이며, 나 또한 그의 삶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통은 나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고, 그의 구원은 나를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이웃 사랑을 삶의 현실로 이루어 가려는 우리에게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감동적인 모범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귀한 삶이라는 길잡이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타적 사랑은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까지도 배척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형제자매로 여기셨습니다.
그분의 이타적 사랑은 위험을 감수하는 사랑이었습니다. 당신께서 옳다고 여기시는 사명을 위해 기꺼이 험하고 위험한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의 이타적 사랑은 한없이 크고 철저했습니다. 그분께서는 골고타에서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장엄하게 드러난, 강요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순명의 표현이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믿음만으로 세상이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은 '존중으로 맞아들이는 삶', '동정심 가득한 삶', '이웃과 함께하는 공동체적 삶'을 통해 구원됩니다. 만일 종교가 환대와 동정심, 이웃 사랑의 실천에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요?
— Chris L.
Reference
Martin Luther King Jr. “On Being a Good Neighbor,” in Strength to Love (Fortress Press, 2010), 22–23, 28–29, 3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amuel Oakes, untitled (detail), 2021, photo, Broadway, UK.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누군가에게 건네는 빵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이웃에게 손을 내밀도록 초대받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축복을 주고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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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9.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10.28 23:00
2026년 10월 29일 목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3,31-35
바리사이 몇 사람이 다가와 말합니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 하니 어서 떠나십시오.”
헤로데는 이미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사람입니다.
그러니 위협은 빈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여우는 밤에 몰래 다니고 위험하면 굴로 숨는 짐승입니다.
권력의 뒤에 숨어 남을 해치는 자에게 꼭 맞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흔들림 없이 말씀하십니다.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그 ‘길’이란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쳐 주는 일 ―
곧 사람을 살리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죽이려는 위협 앞에서도, 그분은 사랑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그러고는 갑자기 목소리가 무너집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이름을 두 번 부르는 것은 애끊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이름을 가졌으면서도
보내신 예언자들을 죽인 도시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보내신 아드님마저 죽이려 합니다.
바로 그 도시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사자도 독수리도 아닙니다.
들에서 매가 덮쳐 오면 어미 닭은 날개를 활짝 펴고 웁니다.
병아리들이 그 아래로 뛰어들면, 어미는 자기 몸으로 덮습니다.
불이 나면 어미 닭은 날개를 편 채 타 죽고,
그 아래 병아리들은 살아남는다고 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두 팔을 활짝 펴신 그분이 바로 그 어미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이 가슴을 찌릅니다.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억지로 품지 않으십니다.
집회서가 말하듯,
그분은 우리 앞에 생명과 죽음을 놓으시고 ‘선택’을 맡기십니다.
사랑은 강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가 애타게 설교했듯,
하느님의 팔은 언제나 벌어져 있으나
그 품으로 뛰어드는 것은 우리의 발걸음입니다.
사랑·기쁨 주간의 눈으로 보면
여기에 사랑의 가장 깊은 얼굴이 있습니다.
사랑은 거절당한 뒤에도 멈추지 않습니다.
“몇 번이나 모으려 하였던가?” ―
한 번이 아니라 몇 번이고, 계속해서 부르셨습니다.
이 사랑 앞에서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분께 등을 돌린 날에도
그분의 날개는 접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말씀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 언젠가 그날이 오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위협 앞에서도 ‘내 길(사랑)’을 계속 가는가?
나는 몇 번이나 부르시는 그 품을 ‘마다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거절당한 뒤에도 다시 사랑할 수 있는가?
나는 누군가에게 날개를 펴 주는 사람인가?
주님,
위협 앞에서도 사랑의 길을 계속 가게 하소서.
몇 번이나 부르시는 당신 품을 마다하지 않게 하시고,
저도 누군가에게 날개를 펴 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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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9.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29 05:27
- 힘센 사람이 되려면
우리는 힘과 관련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약함을 자랑해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에
힘세면 안 되고 약해야 한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힘센 사람 곧 힘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힘이 없어서 또는 힘이 약해서 번번히 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면역력이 약해서 감기면 감기, 염증이면 염증, 균이면 균에 무력한 것처럼
거절하거나 물리칠 힘이 없어서 욕이면 욕, 상처면 상처, 모욕이면 모욕을
주는 대로 다 받아 찔찔 짜고 불행이나 곱씹는 사람이 되면 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어떤 힘이냐?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힘센 사람이냐? 그것이고,
어떤 힘은 우리가 추구하고 어떤 힘은 우리가 거부할 것이냐? 그것입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말하려는 힘은 물리적 힘이나 권세적인 힘
곧 권력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여러분은 즉시 아실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
인간은 우리의 전투 상대가 아니기에 인간적으로 힘셀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은 싸움을 걸어와도 싸울 대상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이고,
상처를 주거나 고통을 줘도 잘 받아 상처나 고통이 안 되게 하고
오히려 내 행복과 성장의 기회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 됩니다.
유혹을 물리칠 또는 이길 힘
고통과 모욕을 견딜 힘
불의와 싸울 정의의 힘
무엇보다도 악과 악의 세력을 물리칠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이제 우리 앞에 놓여있는 것은
어떻게 하면 이 힘을 우리가 지닐 수 있느냐 그것입니다.
그런데 힘을 키우는 방법과 원리는 다 같고 그래서 체력을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체력을 키우려면 영양 섭취와 체력단련을 병행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영양 섭취를 잘해야겠지요.
먹지 않으면 힘이 빠질 뿐 힘은 근본적으로 생기지 않지요.
먹지 않고 체력단련만 열심히 하면 영양 결핍으로 인해 갖가지 병이 날 것입니다.
옛날 북한에 갔을 때 너무 놀란 적이 있습니다.
먹지 못해 군인이 중학생 정도로 작았고 영양 결핍으로 영아 실명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잘 먹어야 하지만 체력단련을 해야만 영양이 힘으로 전환됩니다.
많이 먹고 단련하지 않으면 비만이 될 뿐 힘으로 바뀌지 않지 않습니까?
영적인 힘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영적으로 영양을 잘 섭취해야 하는데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에서 영적인 힘을 얻지 않고 영신 수련만 열심히 하면 탈이 납니다.
예를 들어 기도에서 영적인 힘을 얻지 않고 영의 식별만 열심히 하면 탈이 납니다.
그러므로 기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 줄 알아야 하고,
기도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힘을 얻을 줄 알아야 합니다.
힘을 얻는 기도는 하지 않고 이것저것 달라고만 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 다음 영적인 힘을 단련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사랑을 얻었으면 사랑 실천을 하면서 사랑을 단련하고,
기도를 통해 힘을 얻었으면 고통을 당할 때 덕을 단련할 기회로 삼고,
기도를 통해서 성령을 모셨으면 주님께서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서
사탄과 대적하셨듯이 우리도 악의 세력을 피하지 않고 싸우면서 단련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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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9.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29. 05:38
당신 날개 아래로 모으시려는 주님의 마음을 우리는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니면 마다하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죽임을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그것을 당신 자신의 비극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백성의 비극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언자처럼 통곡하며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이어서 우리는 하느님의 모성적 사랑이 담긴 따뜻한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예루살렘 건너편 골짜기에는 '도미누스 플레빗(Dominus Flevit)'이라 불리는 성당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셨다"는 뜻입니다.
그 성당 제대 아래에는 작은 모자이크 그림 하나가 있는데, 어미 닭이 병아리들을 자기 날개 아래 품고 있는 모습의 모자이크 그림입니다. 그 그림을 보면 어미 닭 날개 아래 둘러싸여 있는 병아리 몇 마리가 새끼답게 살짝 고개를 내밀고 밖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모자이크 둘레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하신 말씀이 라틴어로 새겨져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아름다운 말씀을 그토록 아름답고 따스하게 표현해 주는 모습을 그곳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모습을 연상시켜 주는 모자이크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이미지가 그저 이렇게 감상적으로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이 모자이크 그림에서 어미 닭이 새끼들을 위험에서 지켜 주기 위해 경계하고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본다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한탄하셨던 말씀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고 한탄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질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지금 현세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떠한가요?
예수님께서 당신 날개 아래로 우리를 끌어들이려 할 때 우리는 순수히 그 날개 아래로 모여들고 있는지 성찰해 볼 일입니다....
사실 위험한 상황 속에서 병아리들이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어미 닭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미 닭이 다른 강한 짐승들의 공격을 받으면 어미 닭도 병아리들도 다 희생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병아리들에겐 오직 어미 닭의 보호밖에는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십자가를 택하는 이치와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십자가를 선택하는 길은 우리 믿음의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따르려면 우리가 "제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버리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십자가를 지는 길은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를 택할 때 우리에게 오는 세상적인 위험에서 전적으로 모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택한다고 해서 안전하게 인생 여정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십자가를 선택하는 길은 희생을 선택하는 길이긴 하지만 그 희생을 통해 '나'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선택하는 길은 단순히 시련과 고통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길이 아니라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확신하며 걷는 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 홀로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따라 진정한 삶의 길을 걸어 참된 생명으로 이르는 길로 함께 가자고 제안하십니다. 그러니까 당신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즉 사랑을 확신하며 참된 삶의 길을 앞장서 앞으로 나아갈테니 그 뒤를 우리 자신의 십자가, 즉 사랑을 지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사랑이 있고, 궁극적으로는 이 사랑이 모든 것, 즉 죽음까지도 이기는 가장 강력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궁극적인 생명과 그 생명이 내는 가장 위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마저 이기는 사랑의 힘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적인 관점, 즉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정신의 경향 안에서 우리 삶의 방향을 잴 때가 있습니다. 즉 세상적인 판단으로 십자가를 지는 일을 마다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인과응보의 세상적 기준에 따라 판단하며 사랑 대신 미움을 선택하고 용서 대신 복수를 선택하며 이 사랑의 길을 거부하고 저버릴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이랬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난 이 길을 택하는 거야!"라고 말하면서요. 아니 이 논리를 의식적으로 한다기보다는 우리 정신 안에 깊이 파고들어 있는 무의식 속에서 그런 선택을 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일상 안에서 매번 이렇게 사랑의 십자가를 거부하는 삶을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약하디 약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십자가를 선택하는 길은 진정한 사랑을 선택하는 길이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생명을 선택하는 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매 순간 의식하고 되새기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의 십자가를 지는 길을 마다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 당장은 어떤 시련이나 고통이 우리에게 다가오기 때문일 겁니다.
다른 이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참으로 중요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의 십자가냐? 아니면 우리가 이성이라고 여기는 판단에 의한 그 반대쪽의 감정이냐?"
어중간한 것은 없습니다!
이 둘 중에 우리는 하나만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신명 30,19).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의 십자가를 택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는 이 믿음의 삶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믿음을 잘 살면 주님께서 '나'를 세상적인 위험에서 다 지켜주실 것이라는 얄팍한 믿음 말입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사랑의 희생을 선택하는 것이기에 세상적인 기준에서는 '나'에게 힘이 드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이 당분간은 우리에게 시련과 고통을 가져다줄지는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의 힘으로 우리는 더 큰 사랑의 힘을 얻게 된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굳게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이 세상이라는 삶의 다리를 건너 궁극적인 생명으로 들어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지상 교회를 "전투하는 교회(Ecclesia Militans)"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다소 거부감을 주는 표현처럼 들릴 수 있지만, 본래 그 의미는 외부의 어떤 대상을 거슬러 벌이는 폭력적인 투쟁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죄와 맞서 싸우는 교회의 여정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 자신 안의 어둠과 약함을 이겨 내기 위한 영적 싸움을 묘사하기 위한 표현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공격적이고 단호해지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과의 영적 싸움 앞에서는 병아리처럼 약해지고 망설인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에페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사도 바오로는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이 쓰고 있던 서간의 초점을 우리의 현세적 두려움, 곧 신변의 안전이나 재산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으로 돌려놓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영혼, 곧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본질을 보살피기 위한 두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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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9.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6937
2026.10.28 15:27
기억 위에 떨어진 낙엽
먼저 떠난 이를 그리며
1절
낙엽은 말없이 기억 위에 내려앉고
눈을 감으면
먼저 간 이름 위에
촛불 하나 빛나고 있네
찬바람이 불어
우수수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기억에서 멀어진 이여
그대 이름 마음에 남아
말없이 내려앉은 계절 속에
작은 불빛 하나 지키고 있네
멀어진 길 끝에 닿지 못해도
그리운 이름 불러 보네
낙엽은 말없이
기억 위에 내려앉고
촛불 하나 빛나고 있네
2절
가을비에 젖은 들국화 고개 숙이고
빈 들녘 억새는 바람에 우네
한때 내 곁에 머물던 그리운 사람
따스했던 그 온기 가슴에 남아
희미해진 그 얼굴 떠올려 보면
못다 한 이야기 낙엽처럼 쌓이네
눈을 감으면 들려오는 그 목소리
그리운 이름 바람에 불러 보네
기억에서 멀어진 그리운 이여
저무는 가을 끝에 서 있는 이여
그대는 떠나도 사랑은 남아
내 삶의 계절마다 다시 피어나네
마지막 잎새마저 떨어지는 날
그리움은 고요한 기도가 되어
먼저 간 그대 이름 위에
꺼지지 않을 촛불 하나 밝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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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fmkorea.org/ofmkfb/586943
2026.10.28 15:42
미루나무가 있는 풍경
https://www.youtube.com/shorts/rOir6jFjsQc?feature=share
미루나무가 있는 풍경은 이마르첼리노 형제의 유튜브 체널입니다. 어느날 돌아가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쓴 시를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위의 링크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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