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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성을 점령함
수 8:18-29
18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넘겨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의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그 성읍을 가리키니
19 그의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들의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으로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20 아이 사람이 뒤를 돌아본즉 그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은 것이 보이니 이 길로도 저 길로도 도망할 수 없이 되었고 광야로 도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추격하던 자에게로 돌아섰더라
21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 복병이 성읍을 점령함과 성읍에 연기가 오름을 보고 다시 돌이켜 아이 사람들을 쳐죽이고
22 복병도 성읍에서 나와 그들을 치매 그들이 이스라엘 중간에 든지라 어떤 사람들은 이쪽에서 어떤 사람들은 저쪽에서 쳐죽여서 한 사람도 남거나 도망하지 못하게 하였고
23 아이 왕을 사로잡아 여호수아 앞으로 끌어 왔더라
24 이스라엘이 자기들을 광야로 추격하던 모든 아이 주민을 들에서 죽이되 그들을 다 칼날에 엎드러지게 하여 진멸하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이 아이로 돌아와서 칼날로 죽이매
25 그 날에 엎드러진 아이 사람들은 남녀가 모두 만 이천 명이라
26 아이 주민들을 진멸하여 바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
27 오직 그 성읍의 가축과 노략한 것은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탈취하였더라
28 이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불살라 그것으로 영원한 무더기를 만들었더니 오늘까지 황폐하였으며
29 그가 또 아이 왕을 저녁 때까지 나무에 달았다가 해 질 때에 명령하여 그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그 성문 어귀에 던지고 그 위에 돌로 큰 무더기를 쌓았더니 그것이 오늘까지 있더라
수 8:18-29 / [아이성 함락]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셨다. `네 손에 들고 있는 단창을 뻗어 아이성을 가리켜라. 내가 아이성을 네게 주리라. 네 손에 붙이리라.' 여호수아가 손에 들고 있던 단창을 뻗어 아이성을 가리켰다. 19) 그가 손을 드는 순간 아이성 부근에 매복해 있던 복병들이 일제히 소리 지르며 달려들어가 성읍을 점령하고 불을 질러 버렸다. 20) 아이 사람들이 여호수아 부대를 뒤쫓아가다가 아이성이 있는 쪽을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그쪽에서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연기가 어찌나 높이 치솟던지 하늘 끝까지 닿는 듯했다. 이 광경을 보자 아이성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하였다. 허둥지둥하면서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하였다. 광야 쪽으로 계속해서 쫓아갈 수도 아이성 쪽으로 퇴각할 수도 없었다. 더구나 도망치던 여호수아 부대는 방향을 돌이켜 다시금 아이성 사람들을 치려고 대들었다. 21)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부대는 아이성 부근에 매복해 있던 복병들이 아이성 안으로 쳐들어가 점령하고 불질러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바라보고는 쫓아오던 아이성 사람들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22) 아이성을 점령하고 불을 지른 복병 부대가 다시 아이성에서 나와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부대를 뒤쫓던 아이성 사람들을 따라 나와 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아이성 사람들을 앞쪽에는 여호수아 부대가, 뒤쪽에는 이스라엘 복병 부대가 포진하여 공격한 셈이었다. 아이성 사람들은 앞뒤에서 공격을 받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양쪽에서 협공을 하고 있던 이스라엘 군인들은 그들이 한사람도 남지 못하게 하고 또 도망치지도 못하게 하여 모조리 쳐죽였다. 23) 그런 가운데서도 아이성의 왕을 사로잡아 여호수아 앞으로 끌고 왔다. 24) 이스라엘 주력 부대를 들판까지 쫓아 내려왔던 아이성 사람들을 이스라엘이 모조리 쓰러뜨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스라엘 주력 부대는 아이성 사람들을 이렇게 들판에서 모두 다 해치우고 다시 아이성으로 쳐올라가 성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칼로 베어 버렸다. 25) 이날 전투에서 아이성 사람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쓰러졌다. 남자건 여자건 할 것 없이 이스라엘의 칼에 쓰러져 죽은 사람이 무려 1만 2천 명이나 되었다. 26)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아이성 사람들을 모두 다 쓰러뜨리기까지 손에 들고 있던 단창을 거두지 않았다. 2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대로 아이성에서 노획물로 잡아들인 가축과 기타 물건은 이스라엘이 모두 제 것으로 삼았다. 28) 이런 다음 여호수아는 아이성을 불질러 황폐화시켰다. 그래서 아이성은 오늘날까지도 그 이름과 걸맞게 폐허더미로 남아 있다 29) 또한 여호수아는 아이성의 왕을 그날 저녁때까지 나무에 매달아 두게 하고 해거름 때 명을 내려 아이 왕의 시체를 나무에서 내려 성문 어귀에 내던져 놓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아 올리게 하였다. 아이 왕의 시체가 있는 돌무더기는 오늘날까지도 거기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하나님은 아이 성 전투의 모든 과정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친히 싸우셨습니다. 두 번째 아이 성 전투는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납니다. 두 번의 전투를 통해 성공과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깨달았습니다.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18-23) 하나님이 이스라엘 군대의 대장이 되셔서 모든 명령을 여호수아에게 내리셨고,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고 말씀하십니다(18). 여호수아가 단창으로 아이를 가리키는 순간 매복한 병사들이 성읍으로 달려가서 불을 놓았습니다(19). 전쟁의 승패는 전쟁을 지휘하는 대장의 명령에 순종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에 우리 싸움의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아이 성의 두 번째 전투에서는 첫 번째 전투와 다르게 전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여호수아는 철저히 전략을 세우고 완벽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우리도 삶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전략을 세우고 철저하게 준비하는 수고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첫 번째 아이 성 전투의 패배 원인은 아간의 죄 때문이었지만, 전투에 임하는 이스라엘의 자세도 잘못 되어 있었습니다. 여리고의 승리로 인해 교만해져서 이삼천 명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스라엘의 온 군대가 참여하였고, 모두가 하나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탈취하였더라(24-29) 아이 성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아이 성 주민들을 철저하게 진멸합니다(24). 그 수가 만 이천 명이 되었습니다(25). 또한 여호수아는 아이 주민들을 진멸하기까지 단창을 든 손을 거두지 않았다고 말합니다(26).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이 만 이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이실까?' 의문을 갖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영토를 차지하는 일반적인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가나안 땅에서 펼쳐진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의미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게 가나안의 우상에 빠져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진멸하여 우상의 흔적 조차 제거함으로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만 섬기는 거룩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기 원하셨습니다.
적용: 우리 교회 공동체는 아이 성을 정복한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용서치 못하는 죄는 없으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 없다 선포하신 그 크고 놀라운 구속의 능력과 사랑으로 항상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하신 뜻입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에서 그리스도인은 이미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였으므로 모든 상황에 있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 설 교 >
패자 부활전
수 8:18~29 / 홍문수 목사
미국 프로야구 사상 전설적인 홈런왕이 있습니다. 뉴욕 양키스의 베이브 루스(Babe Ruth)입니다. 프로 데뷔 이후 통산 714개의 홈런을 치고 2,212 타점을 올렸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그가 스트라이크아웃 최다 기록도 동시에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게 인생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인생에는 성공과 실패가 함께 공존한다는 역설적인 사실입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항상 성공만 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누구도 평생 실패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인생에 닥쳐오는 성공과 실패를 잘 관리하는 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성공은 계속 유지 발전시키고, 실패는 잘 극복해서 성공을 바꿔야 합니다. 앞서 언급한 베이브 루스도 수없이 스트라이크아웃을 당했지만 그것을 잘 극복함으로 홈런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역사 속에서 성공을 잘 관리하지 못해서 크게 실패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 로마의 역사입니다. 유명한 역사가 A. 토인비가 그런 이야기를 했죠. “그리스 로마와 같은 강대국이 멸망한 원인은 천재지변이나 외부의 침략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 자신의 교만과 안일함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명심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 성공했다고 앞으로도 마냥 성공할 수 있을 것처럼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오늘 실패했다고 인생이 끝장난 것처럼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본문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실패를 딛고 재기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패자부활전’인 셈입니다. 운동 경기에서 종종 패자부활전( Revival Match) 방식이 실시됩니다. 처음에 패배했지만 다시 기회를 주는 경기 방식입니다. 실제로 패자부활전을 통해 우승까지 하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패자부활전이 있습니다. 어제 실패했지만 오늘 하나님이 주시는 재기의 기회를 잘 살리면 얼마든지 내일은 성공적인 인생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이렇게 불러 봅니다. 우리에게 패자부활전을 허락하시는 하나님! 오늘 말씀을 통해 그 하나님을 만나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공했다면 앞으로 실패하지 않도록, 그리고 혹시 실패했다면 앞으로는 성공하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실패를 경험한 여호수아 : 인생에는 항상 실패가 존재합니다.
오른 본문은 8장이지만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호수아 6장~8장을 전부 읽어봐야 합니다. 나중에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여리고성 정복 전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광야 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첫 번째 관문이 여리고성이었습니다. 그 성은 공략하기 어려운 큰 성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대로 성 주위를 돌다가 큰 소리로 외침으로 대승을 거둡니다.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 됐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리고 성이 폭삭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참고로 구약 시대의 전쟁에 관해 조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혹자는 여러 전쟁 기록들을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침략 전쟁을 하나님이 명령하다니, 게다가 진멸하라는 명령을 보면서 하나님이 잔인하신 분인가, 전쟁을 좋아하시는 분인가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의 전쟁은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전쟁은 방어 전쟁입니다. 다만 심판이 필요할 때 그 도구로 사용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것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이 너무 관영하므로 하나님이 심판하려고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과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전쟁은 마치 일상사와 같이 자주 생기는 일이었습니다. 요즘도 전쟁이 있지만 고대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구약 성경의 전쟁은 오히려 우리의 삶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늘 삶의 현실 가운데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전쟁을 하듯 힘겹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전쟁 기록을 보면서 우리는 삶에 적용하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어쨌든 여리고 성은 정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정복지였던 아이 성이 문제였습니다.
아이 성은 여리고 성에 비해 아주 작은 성입니다. 주민 수도 남녀 모두 합쳐서 1만 2천명밖에 안됩니다. 하지만 아이 성 정복 전쟁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2절~3절 보면, 3천명의 군사를 보냈는데 쫓겨 옵니다. 그리고 전사자 36명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렸습니다. 이 말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마음이 얼어붙었다는 뜻입니다.
여리고성 전투에서 성공한 여호수아는 이번에도 당연히 성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 살면서 항상 성공만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니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공할 때 잘 하지 않으면 이내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공할 때 방심하지 말고, 실패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재기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 : 인생에는 패자부활전이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낙심천만해 있었습니다. 6절 보면,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큰 슬픔의 표시로 옷을 찢습니다. 크게 슬퍼했다는 뜻입니다. 7절 보면, “슬프도소이다 여호와여 ... ”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이렇게 낙심해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위로해 주십니다. 10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여러분,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실패했을 때 단번에 잘라버리지 않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재기의 기회를 주십니다. 세상에서는 한번만 잘못해도 가차 없이 잘라버리지만 하나님은 여러 차례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선용해서 재기한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가 3년 반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철저한 배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불법 재판을 받으실 때 그 앞에서 세 번씩 부인합니다. 마지막에는 저주하면서 욕하면서 부인합니다. 그 죄악이 얼마나 큽니까? 그러나 닭울음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회개합니다. 그리고 재기합니다. 마침내 기독교 2천년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가룟 유다는 회개의 기회를 놓쳐버리고 마침내 자살해서 죽습니다. 영원한 멸망을 당한 겁니다. 베드로나 가룟 유다나 잘못한 것으로 치면 거기서 거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기회를 주셨을 때 회개했느냐 안 했느냐 여부입니다.
여러분, 마가라는 인물을 아시죠.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으로 본래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고 1차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그때 마가를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아직 젊은 마가는 어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중도에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 후 2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는 또 다시 마가를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그때 바울이 반대합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선교 팀에 끼워 주냐 이겁니다. 이 문제로 두 사람은 심히 다투고 갈라섭니다.(행15:36 이하) 이렇게 보면 마가는 실패자입니다. 그런데 후일의 기록을 보면 마가가 변화됩니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의 말년에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한 말입니다. 딤후4:11 “ ...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마가가 너무 귀한 일꾼이니까 꼭 데려오라고 신신당부를 합니다.
이런 예들을 보시고 혹시 실패했어도 낙심 말고 하나님 주시는 기회 선용해서 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성공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실패를 극복한 여호수아 : 실패를 넘어 성공으로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재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백성들과 함께 다음의 과정들을 거치면서 실패를 넘어 성공을 향해 나아갑니다.
(1) 원인 분석 :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원인을 분석하는 게 선행되어야 합니다. 아이 성이 작은 성임에도 불구하고 정복하지 못한 원인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숨겨진 죄악, 둘째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여리고 성 전투에서 모든 전리품은 하나님 앞에 구별해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몰래 훔쳐서 숨겨둡니다. 시날 산 외투 한 벌, 금덩어리, 은덩어리 등을 장막 밑에 감추었습니다.(수7:1,21 참조) 죄악은 절연체와 같습니다. 절연체가 있으면 전류가 흐르지 않는 것처럼 죄악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은혜의 통로가 막혀버립니다.
여호수아는 어리고성 전투의 승리 후 흥분했던지 하나님의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 6장을 보면 주어가 ‘여호와’로 되어 있습니다.(수6:2,27 참조) 그런데 수7:2~3 보면 주어가 ‘여호수아’입니다.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전쟁을 치른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고 정탐꾼을 보내서 동정을 살핀 후 가볍게 판단한 나머지 3천명만 파견합니다.(수7:2~3 참조) 자신의 삶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우리가 잘 살아가는 것이 자신의 능력과 공로인 양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지구가 둥글고 움직이고 있지만 우리가 그 위에 잘 서 있는 것은 중력이 끌어당겨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이끌어주시기에 잘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놔버리면 흔들립니다. 넘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마음의 왕좌에 하나님을 모셔야 됩니다. 그게 겸손입니다. 겉으로만 얌전한 모습을 보이는 게 겸손이 아닙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만하면 반드시 멸망합니다.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2) 회개 : 실패의 원인을 깨달은 여호수아는 철저히 회개합니다. 백성들을 성결케 합니다. 그리고 죄인을 찾아냅니다. 스스로 자수하고 회개하지 않자 제비뽑기를 통해 부족별, 가문별로 색출합니다. 마침내 아간이 걸렸습니다. 그는 들통이 나자 하는 수 없이 실토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들통 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들통 나기 전에 스스로 고백하고 돌이키는 게 회개입니다. 아간은 진정으로 회개치 않았기에 하나님의 명령대로 처단합니다. 아간과 그 일족을 불태웠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아골 골짜기입니다.(수7:24~26 참조)
(3) 재도전 : 실패했지만 회개하고 다지 도전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수8:1과 본문 18절을 보면 주어가 어떻게 바뀝니까? ‘여호와께서’입니다. 이제는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앞세웁니다. 하나님의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순종합니다. 그는 겸손히 하나님의 주권을 존중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여호수아의 자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게 무엇입니까? 손에 단창을 들고 아이 성을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8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성읍을 가리키니”
26절. “아이 거민을 진멸하기까지 여호수아가 단창을 잡아 든 손을 거두지 아니하였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는 그의 모습입니다. 결국 이번에는 승리합니다.
모든 아이 성 주민을 진멸하고, 그 왕도 생포해서 나무에 매달아 공개 처형을 합니다. 완전한 승리였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그 이후 여호수아는 결코 실패하지 않고 승승장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인생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따라갈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나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주인, 나는 종입니다. 하나님은 총사령관, 나는 부관입니다. 하나님은 왕, 나는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사장, 나는 직원입니다. 이런 관계를 잘 지켜 나아갈 때 승리는 보장됩니다.
바울을 보면 참 놀랍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성경 기록상으로)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는 예수님 만나기 전 실패했던 것을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는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겸손히 순종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계속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성공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계속 성공할 것입니다. 더 큰 성공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혹시 실패하셨습니까? 하나님의 패자부활전 기억하십시오. 무엇 때문에 실패했었는지 분석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실패가 성공으로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 꼭 명심하시고 항상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반드시 거둬야할 두 가지 승리
본문 여호수아 8:18-29
본문해설
하나님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거룩을 요구하십니다.
거룩이란 말은 ‘구별되었다’란 뜻입니다.
구별된 삶은 정말 중요합니다.
구별되지 않은 삶은 부패로 이어지고 방종을 넘어 추하고 더러운 삶이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 걸쳐서 거룩을 반복하여 강조하셨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레위기 10:10; 19:2).
하나님은 왜 이렇게 거룩을 요구하시는 걸까요?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떠돌이 들개를 집안에서 키우며 함께 생활하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합니까?
당연히 깨끗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변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씻겨줘도 더러운 곳에 가서 더럽히고 아무 곳에서나 볼일을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집안이 악취로 가득하고 지저분하고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 더러움에 물들고 병균이 득시글거릴 것입니다.
이 정도 되면 당연히 집안에서 같이 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거룩을 강조하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더러움과 부패함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와 함께 있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정복전쟁을 하게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전 즉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동거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은 노아홍수 이후 계속 끊임없이 부패하고 타락했고 그곳을 정결케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을 향한 목숨을 건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우리들 역시 거룩의 주체가 될 것인지 아니면 부정함의 주체가 될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이성은 이스라엘들에게 절망과 패배의 상징이었습니다.
통곡하며 눈물을 흘리게 하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셨습니다.
하나님은 패배를 승리로 바꾸셨습니다.
이러한 전환의 조건은 두 가지 종류의 거룩입니다.
하나는 내적 거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삶에서 우상을 제거하고 그들의 마음에서 탐욕을 제거해야 합니다.
물질에 마음을 뺏기지 않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여리고 전투에서는 전리품을 취하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외적 거룩입니다.
내적 거룩은 외적 거룩이 전제되어야 유지됩니다.
물질에 마음을 두지 않지만 부패하고 죄악된 사람들이 주위에서 계속해서 유혹한다면 내적 거룩이 유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성 전투에서는 그 성의 거주민들을 예외 없이 몰살시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러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여호수아를 세우셨고 두 가지 승리를 이끌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는 외면적 승리입니다(18-23절).
성경에 ‘단창(短槍)’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키돈’은 ‘짧은 창’이 아니고 ‘던질 수 있는 가느다란 긴 창(dart, javelin)’을 가리킵니다.
지휘관만이 지니는 창으로 권력과 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칼이 오직 아이성을 향해야 합니다(18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칼을 보고 일사불란하게 전쟁을 수행했고 승리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칼이 다른 곳을 향해 있으면 어떻게 될까요?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고 있다면 전쟁에서 절대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젊은 청교도 목사 중 「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1637년에 미국 신대륙의 꿈을 안고 미국 땅을 밟았습니다.
그런데 불과 1년이 지나지 못한 1638년에 폐결핵 진단을 받고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목사님이 임종 직전에 자기의 재산을 살펴보니 가진 것은 거의 없고, 책이 한 300권 있었습니다.
그래 ‘이것을 어떻게 할까’ 기도하다가 정착한 도시에 새로 설립된 뉴타운 칼리지라는 대학에 기증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면서 기증서에 한 장의 편지를 첨부했습니다.
「나는 이 땅에 꿈을 안고 찾아 왔습니다.
나는 좀 더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고, 좀 더 법률도 공부하고 싶었고, 또 과학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부르신 것 같습니다.
내 이 땅에서 다하지 못한 꿈, 이것이 나의 후배들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합니다.
내가 학교에 기부하는 이 책을 통해서 나는 훌륭한 신학자, 훌륭한 법학자, 훌륭한 과학자들이 이 대학에서 길러져 이 땅을 풍성하게 하고 인류에 기여하는 위대한 거인들이 나타날 것을 기대합니다.」
감동적인 이 편지를 받은 이 학교의 이사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 목사 「쟌」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의 성을 따서 학교 이름을 바꾸기로 결정합니다.
「쟌」 목사님의 풀 네임(full name)은 「쟌 하버드」였습니다.
그래서 ‘뉴타운 칼리지’에서 ‘하버드 대학’으로 대학 이름이 변경되었고 「쟌」 목사님의 꿈은 이 대학을 통해서 열매를 맺었습니다.
한 젊은 목사의 꿈, 한 젊은 목사의 기도 속에서 위대한 하버드의 꿈이 자라났습니다.
여호수아도 손에 가진 것이라고는 한 자루의 칼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향할 때 위대한 승리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사실상 이 승리는 첫 번째 전투처럼 뒤돌아서 도망치지 않고 여호수아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모두가 하나가 되어 담대하게 나아간 결과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면적 승리입니다(24-29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 사람들을 진멸시킬 때까지 단창을 든 손을 거두지 않았습니다(24-26절).
그리고 전리품을 취한 후 아이성을 불살라 돌무더기를 만들고 아이성의 왕을 나무에 달아 해질 때까지 매달아 놓았습니다(27-29절).
아이성을 편안한 거주지로 삼지 않고 거룩한 예배자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이정표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순종하지 않는다면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패배한 꼴이 됩니다.
열 번 순종하다가 한 번만 순종하지 않아도 불순종입니다.
몇 년 동안 술을 마시지 않다가 오랜만에 딱 한잔만 마셔도 먹은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광야생활과 수많은 전쟁을 통해 예배자로 준비되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리가 어떤 곳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안락한 삶을 보장받는 자리입니까 아니면 거룩한 삶을 결단하는 자리입니까?
어떤 이유로든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한 예배자로 서지 못하면 그 어떤 승리나 전리품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 폭스사가 신문에 판매직 사원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냈습니다.
그런데 무려 1천5백 명의 지원자가 자기소개서를 보내왔습니다.
폭스사는 자기소개서를 보고 단 한명만 채용했습니다.
그의 자기소개서는 간략했습니다.
“저는 현재 가구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어느 때라도 가구점을 한번 방문하시면 세일즈맨으로서의 능력을 금방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구를 사는 척하고 한번 방문해 주십시오. 제 머리는 빨간색이기 때문에 저를 알아보기가 쉽지만 저는 손님을 알아볼 수가 없어요. 저는 단지 당신을 평상시의 손님처럼 맞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판매실력과 손님에 대한 친절이 어느 정도인지를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저를 채용해 주십시오.”
진정한 예배자는 내면의 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자로서의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시대마다지고 가야 할 불의의 짐이 있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그것을 역사의 하수구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한민족은 더러운 것을 모두 받아 내어 바다로 보내므로 깨끗함을 유지시켜주는 하수구가 되어야 한다고 일갈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이성 사람들을 몰살시키고 그 성을 돌무더기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픔이며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픔입니다.
여호수아가 지니고 있던 단창은 권력이나 쾌락이 아니고 아픔이며 고통입니다.
전쟁에 대한 기억이고 하나님의 심판이며 징계였습니다.
그 불의의 짐이 서로를 향하면 모두 무너지고 깨집니다.
오늘날 교회가 존재하면서 져야 할 불의의 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비난과 손가락질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역사의 하수구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불의의 짐을 받아서 모두 하늘로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수구가 온갖 더러운 것을 받아서 바다로 내보내듯이 말입니다.
생각을 위한 질문
1. 하나님께서 아이성을 함락시키도록 하신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레위기 10:10; 19:2).
2. 아이성 전투에서 거둬야할 첫 번째 승리는 무엇입니까?(18-23절)
3. 아이성 전투에서 거둬야할 두 번째 승리는 무엇입니까?(24-29절)
4. 당신이 정복해야할 아이성 즉 안락함이 아니라 거룩을 위한 성지는 무엇입니까?
묵상의 숲
여호수아 8:18-29
18-25 아이 성을 정복하다
아이와 벧엘 연합군은 아마 20-30km 거리의 요단 강 유역 광야(아라바)까지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를 추격했다. 이때 여호와께서 직접 작전을 지시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손에 쥐고 있는 단창을 높이 들어 아이 성을 가리키라고 하신다. 아이 성을 하나님께서 넘겨주신다는 신호였다(18). 여호수아가 손을 드는 순간 복병들이 일제히 일어났다는 표현은 여호수아의 명령과 지시 하에 전투가 진행되었음을 드러내기 위한 문학적 기법이다. 복병들은 군대가 모두 빠져나간 아이 성을 쉽게 점령하고 불을 놓았다. 아이의 군대는 성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목격하고는 함정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다.
복병이 아이 성을 점령하여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사기가 오른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 군대는 전열이 흐트러진 아이 군대를 공격했다. 빈 성을 점령 했던 복병 부대도 나와 아이 군대를 반대쪽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받은 아이 군대는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지리멸렬하여 도주했다. 여호수아는 아이로 달려가 복병 부대와 합류해서 아이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사람들을 진멸함으로써 아이에 대한 헤렘 전쟁을 완수한다. 그날 전쟁에서 죽은 아이 주민의 숫자가 만 이천 명이다. 이 인원은 벧엘에서 합세한 군대를 포함한 숫자일 수 있다.
26-29 아이 전쟁의 마무리
여호수아는 아이 성 전투가 완료될 때까지 단창을 잡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단창은 여호와의 지시가 계속되고 있다는 징표였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 정복때와는 달리 아이 성의 모든 전리품들, 곧 가축과 물건들을 노략해서 이스라엘이 취하도록 허용하신다. 여기서 우리는 헤렘 전쟁은 경우에 따라 전리품이 허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수아는 아이를 불사른다. 이 불사름은 어떤 것을 완전히 태워서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강조한 대로, 여기서 우리는 ‘진멸’의 방식이 반드시 대량 학살만을 의미했던 것이 아니라, 피신과 도주, ‘내쫓음’이 포함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진멸의 반대는 상생 혹은 공생이다. 상생은 쌍방의 약조를 통해 우호적 관계가 정립됨으로서 시작된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과 결고 상생이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그들과 어떠한언약도 맺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신다. 그들을 불쌍히 여겨 그들과의 상생의 길을 택함으로써 그들의 사악한 문화가 이스라엘에 침투하게 해선 안 된다. 그러나 그약은 아간의 길과는 정반대로 라합의 사례와 같이 개인적인 산앙의 투항을 통해 언약 백성에 합류하고, 심지어 기브온 족속과 같이 민족적 단위에서도 집단 개종을 통해 언약 백성에 합류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다. 이것은 쌍방의 상생과 교류를 위한 타협과는 다른 일이다.
아이 성 전투의 승리에 이름을 붙인다면?
승리는 훈련이나 무기에만 있지않다. 전심으로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 안에서 하나 되어 협력할 때, 주께서 아름다운 승리를 우리에게 선물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