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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지막 강복, 평화
사도 14,19-28; 요한 14,27-31 / 부활 제5주간 화요일; 2024.4.3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당신의 평화를 제자들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노라.”(요한 14,27). 그분이 제자들에게 내려 주신 선물이자 마지막 강복이었습니다. 이 평화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로 말미암아 가능해 진 평화였으므로, 힘을 앞세우고 이익 추구에 골몰하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전혀 다른 하느님의 평화였습니다. 또한 독서에서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첫 복음선포를 행하여 커다란 성과와 호응을 얻은 바오로 일행을 시기한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리스트라까지 쫓아와서 돌을 던지는 바람에 죽을 뻔한 위기를 겪은 일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가사(假死) 상태에서도 하느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고백했는데 그 내용은 복음 선포를 멈추지 말라는 말씀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정도의 환난은 겪어야 마땅한 것이니,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신자들을 오히려 격려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이런 처신과 태도에서 복음 선포의 진정성을 본 티모테오는 감동한 나머지 그의 제자가 되겠다고 자원하였습니다(참조: 2티모 3,11).
이렇게 죽임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오로 일행이 전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남겨 주신 하느님의 평화를 담은 소식이었고, 사도행전의 초반부에 증언되어 있던 대로 강림하신 성령을 부어 주고 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른 공동생활을 전해 주는 한편 성령과 공동체를 실현하기 위한 사기지은 덕분에 박해도 이겨냄을 증거한 평화의 전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과 독서의 상황이 모두 그리스도 신앙이 유다교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는 형편을 보도한 것입니다. 생명과 평화를 염원하는 우리가 듣게 된 하느님 말씀이 이러합니다. 이렇듯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진정성 있는 정신 자세와 평화 실현의 과제가 초점으로 주어지고 있고, 이 정신 자세와 과제에 하느님의 영이 서려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영에 관한 일반적인 이치를 하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인간 생명은 몸과 마음과 혼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영을 받아야만 온전한 영혼으로 생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영혼이 살아있어야 마음도 튼튼해 질 수 있고 몸도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에게 해당되는 현실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와 집단, 더 나아가서는 민족에게도 어김없이 해당되는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에서 몸소 보여주신 이 현실이 하느님께서 선사하실 진정한 평화입니다.
생명의 차원에서 보자면, 영과 소통되어야 할 사람들의 혼이 세속화된 문화에 의해서 방해를 받기도 하고 심지어 박해를 받기도 합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물질만능 문화도 그렇지만, 생명과 성과 가정의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반생명적 문화가 모두 하느님의 선물인 생명에 대한 소극적이거나 적극적인 박해입니다.
또한 평화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안중근 토마스가 동양평화론이라는 화두를 자기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온 겨레에게 제시한 이래 우리 겨레는 이 평화를 단 한 치도 실현하지 못한 채 해묵은 냉전구도 속에 휘말려 왔습니다. 그제나 지금이나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친중(親中)이나 친미(親美)냐 혹은 친일(親日)이냐 종북(從北)이냐, 또는 한미일(韓美日) 연합체제 노선이냐 민족화해(民族和解) 노선이냐 하는 고질적 갈등에 휘말린 채 평화의 꿈을 상실해 왔고 복음화 과업에 대해서는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지경에 놓여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정권이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교체될 때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이, 우리 민족혼이 생명과 함께 역시 하느님의 선물인 평화에 관한 하느님의 영을 받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처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시대의 징표입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한반도와 그 주변에 자리잡은 지난 반만년 세월 동안 만주를 중심으로 한 아시아 대륙을 호령했고 한반도를 둘러싼 바다를 주름잡아 왔었습니다. 국력이 약화될 때에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에 휘둘린 것이지 국력이 강성할 때에는 대륙과 해양에 우리의 높은 선진문물을 전해 주었습니다.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연결해 주는 길목인 동시에 대륙과 바다를 아우를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에 붙어서 생존을 도모할 처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대륙과 바다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안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인류 평화에 대해서 한민족이 홍익인간적 가치와 사랑의 문명이라는 목표를 간직할 수 있는 이유이며 또 간직해야 하는 명분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장면도 하느님의 영이 사람들에 의해서 차단당하는 위험한 모습입니다. 바오로는 이스라엘 역사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준으로 재해석하여 피시디아 안티오키아 회당에 예배하러온 유다인들에게 전해 주었는데, 다행히 이 강론을 들은 유다인들이 잘 알아 들었고 그 결과로 더 많은 유다인들까지 호응하게 되자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군중을 막고 바오로 일행을 탄압하였습니다. 특히 바오로는 돌에 맞아 거의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는 기적을 행했다고 하여 신으로 떠 받들여 질 뻔했던(사도 14,10-11) 그가 돌을 맞고 죽을 지경이 되어 버린(사도 14,19) 이 극적인 위기 체험에 대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마치 잘 아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회상했습니다. 그의 겸손입니다. 그는 셋째 하늘까지 들려 올라가서 하느님의 환시를 보았다는 것입니다(2코린 12,1-10). 그 환시에서 들려온 메시지에 의하면, 그 일로 말미암아 바오로는 몸에 가시가 찌르는 듯한 증상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자만심을 다스리라는 뜻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알아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약해질 때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강해지실 수 있으므로, 그 자신은 그러한 증상이 주는 체력의 약함은 물론 반대자들이 가하는 모욕도, 심지어 다른 모든 재난이나 박해나 역경까지도 모두 달갑게 여기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탁월한 영성을 얻은 그의 지혜입니다.
이러한 식별 태도와 겸손의 영성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평화의 실체입니다. 겉으로는 옳은 일을 하다가 겪는 어려움으로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느님께 더 나아가는 삶으로 다시 태어나는 부활입니다. 여기서 창조주 하느님의 섭리가 드러납니다. 인간의 위대함과 하느님을 닮아가는 과정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악에 맞서고 그 박해로 고난을 받으면서도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원인이 되었던 옳은 일과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일을 그치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같지 않음을 실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생명의 문화와 사랑의 문명을 이룩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든 민족적으로든 그렇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히브리 민족과 함께 한민족의 역사도 이끄신 성령께서는 속죄와 감사와 경천의 문화 속에 이 생명을 존중하는 진정성과 평화를 추구하는 의식을 집어 넣으셨습니다. 속죄와 감사의 지향에서 진정성 있게 하느님을 닮고자 몸과 마음을 수양(修養)하는 구도적 정신 전통이 생겨난 결과, 신체를 단련하는 무술에도 ‘태권도’ 같이 ‘도’(道)를 붙이고, 글씨를 쓰는 일도 기능으로만 여기지 않고 서도(書道)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18세기 말에 장사를 하던 임상옥은 이 일에도 ‘상도’(商道)라는 이름을 붙였을 정도입니다. 과연 그에 걸맞게 그는 “장사는 이문을 남기기 위한 일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라는 구도정신의 철학을 지니고 조선 후기 사회에서 거상(巨商)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경천의 지향에서는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문명의 도구로서 천문 관측과 역법, 농경 질서와 수리 철학과 존대어법의 전통이 생겨났습니다. 낮에는 비온 뒤에 하늘과 땅에 걸쳐 세워지는 무지개로써 하느님의 축복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밤에는 별자리의 이동 경로를 관측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알아들어 문명의 질서를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한민족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별자리를 고인돌에 새겨 넣거나 각종 역사 일지에 기록하여 남겼으며, 특히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등 궤도가 서로 다른 태양계의 별들이 일렬로 늘어 선 오성취루(五星聚婁) 현상이라든지 작은 달이 커다란 해를 가리는 일식(日蝕) 현상은 커다란 하늘의 뜻이 담겨 있다고 보아서 반드시 기록해 놓았습니다. 이러한 천문관측활동에서 알아낸 지식에 기초하여 해의 공전주기로 일년을 삼고, 달의 공전 주기로 한달로 삼으며, 해의 자전 주기로 하루로 삼았으며, 역법에 따라 농사를 짓는 농업 문명이 이로써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천문 관측 활동은 땅의 질서를 이끄시려고 하느님께서 하늘에 보여주시는 뜻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 부산물로 천문 현상에 대한 사색과 이를 수로 표현하는 수리 철학이 생겨났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뜻에서 하나(一)요, 하늘과 땅 그리고 남자와 여자로 이루어진 세상의 기본 질서에서 둘(二)을 이끌어 냈으며, 하늘과 땅과 사람에서 셋(三)을 삼았고, 동서남북의 방위에서 넷(四)을 보았으며, 땅에 있는 물질 중에 불(火)과 물(水)과 나무(木)와 쇠(金)와 흙(土) 등이 기본이라고 보아 다섯(五)을 착안했습니다. 천지(天地)와 음양(陰陽), 천지인(天地人)의 이치로써 하나, 둘, 셋을 이루는 바탕으로 삼고,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방(四方)과 화수목금토(火水木金土)의 다섯 가지 기본 물질이 모두 하나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성찰한 사색이 이 십진법의 수리 철학에 담겨 있습니다(天符經).
이 기본 수에서, 천지의 둘과 사방의 넷을 합해 여섯(六)을 만들고, 음양의 둘과 기본 물질 다섯 가지를 합해 일곱(七)을 만들었으며, 네 가지 방위를 다시 세분하여 여덟(八)을 만들었고, 땅의 사방과 다섯 물질을 합한 땅의 완전수로서 아홉(九)을 만들고, 땅의 다섯 물질에 상응하는 하늘의 다섯 별 즉 화성, 수성, 목성, 금성과 토성의 궤도를 오행(五行)이라 하고는 다섯에 다섯을 더한 열(十)을 하늘의 완전수로 삼았으니, 이로써 인류 문명의 십진법이 완성되었습니다. 이는 생명과 평화를 중심으로 하는 정신문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물을 헤아리는 대수학과 기하학으로 발전하여 오늘날의 물질문명의 토대를 이룩한 서양의 수학 전통과 크게 대비되는 대목입니다.
하느님을 우러러 받드는 경천의식으로부터 부모와 윗사람을 공경하는 효(孝)의 도리가 나왔는데, 문명의 역사를 연구한 아놀드 토인비도 고조선 문명의 효 사상에 대해서 듣고는 인류를 구원할 사상이라며 경탄했던 독특하고 고유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이 경천과 효 사상이 반영되어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 불리었으며, 그 결과로 전 세계 모든 언어 가운데 유일하게 존대어법이 발달한 언어가 한국어입니다. 특히 ‘말씀’, ‘우리’와 같은 단어는 한국어에서만 통용되는 경천의 어휘들입니다.
이렇듯, 속죄와 감사와 경천의 요소들이 모인 결실이 하느님을 닮고자 노력하는 정신 수양의 구도적 전통과, 이를 위해 문명의 질서를 수립하는 평화로 나타났습니다. 속죄와 감사와 경천의 지향으로 제사를 주재하는 사제는 흰 옷을 입었습니다. 이 전통에서 우리 민족은 흰 옷을 즐겨 입는 백의민족이 되었습니다. 사제의 직책을 받은 민족이 즐겨 입어온 흰색은 빛이 비추어오는 밝음의 색으로서 하느님을 뜻하는 동시에 그분이 주시는 평화도 상징합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강성해진 주변 민족들이 숱하게 침략을 해 왔어도 단 한 번도 다른 국가를 침략하거나 다른 민족을 노예로 삼은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고조선 시대 이래 중국의 힘에 밀려 사대했던 천5백년 동안이나 일본의 힘에 밀려 식민통치를 받던 36년간에도 하느님께 대한 진정성과 평화에 대한 정밀하고 고유한 문화 덕분에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오늘날에 와서는 오히려 그들 나라의 문화와 국력을 추월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남겨주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앞장서 실현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민족은 분단 구도를 극복하여 평화를 되찾고 인류 전체에게 평화를 나누어 주는 평화의 샘이 되어야 합니다”(‘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세계 제44차 성체대회, 1989년)하고 격려하신 요한 바오로 2세의 강론 말씀은 예언자적인 메시지였습니다. 진정성 있게 하느님을 닮고자 했던 구도적 정신 전통, 정밀한 문화로 이룩한 평화의 문명, 그리고 이를 알아보는 외부의 진지한 시선 등 이 모든 역사적 징표에서도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게 하신 성령의 이끄심이 엿보입니다.
그러니 교우 여러분! 생명과 평화를 위해서 하느님의 영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인 개인들은 물론, 겨레 전체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야 합니다. 그 길은 사랑의 문명을 민들레 홀씨처럼 퍼뜨리는 길입니다. 이를 위해서 보편교회를 대변하는 교황청의 목소리, 특히 한국을 찾아와서 전해준 두 교황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외침이란, 우리가 그토록 염원해 마지않는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의 화해 및 통일은 우리 민족이 먼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더 큰 뜻을 위해 우리 자신의 노력을 봉헌할 때에 덤으로 주어질 선물이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또한 ‘더 커다란 뜻’이란 사랑의 문명이요 아시아 복음화이며, 우리가 봉헌해야 할 희생이란 생명의 문화와 이를 위한 교회 쇄신입니다. 영혼이 죽어버린 사람처럼 살지 말고 영혼이 깨어나 부활한 신앙인으로 살아가십시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축복으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신부님!
안녕하세요 😄
오늘도 말씀 고맙습니다
그런데
날짜가 잘못 나왔어요
오늘은 4월30일 ~^^♡
건강하셔요 👋
감사합니다. 작년 부활 제5주간 화요일 강론을 수정 보완해서 작성하다 보니, 본문에만 주목하다가 날짜도 수정해야 했는데, 그만 깜빡 잊어버리고 그냥 내보내 버렸네요.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