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호지(水湖志) - 3
제1장 백팔마왕
제2편 고구 2-1
송나라 철종 때 동경성 개봉부변량 땅 선무군(宣武軍)이라는 곳에 ‘고이(高二)’라는 자가
살았다.그는 본래 술과 여자와 잡기로세월을 보내고 있는 백수건달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달리 뛰어난 특기가 있었다.
춤 솜씨와 창 다루기, 봉술과 특히공차는 기술은 끝내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제기 구(毬)자로 바꾸어 별명으로 고구라 불렀다.
아무튼 그는 예의를 모르는개차반 같은 남자로 매일순진한 양반집 아들들을 꼬셔내 술집
에출입하는 일이 일과였다.
한 번은 철물상 주인 왕원외(王員外)의아들을 꼬여 내 오입을시키다가 왕원외에게 들켜
고구는 관가에고발당하여 잡혀가곤장 스무 대를 맞고 성 밖으로 쫓겨나 임회주(臨淮州)라는
먼 시골에서3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국경일에 사면을 받고동경성으로 돌아왔다.
고구는 연줄을 찾아 부마 왕진경(王晉卿)의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왕진경은 철종 황제의 매부로 풍류를 좋아하는사람이면 가리지 않고 집안에 두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고구는 왕도 위의 심부름으로 단 왕(端王)의처소로 가게 되었다.
단 왕은 신종황제의 열한 번째 아들로철종황제의 아우였는데,그림 재주가 뛰어난 데다
풍류를 좋아했다.
고구가 궁중에 들어갔을 때 단왕은 마침여러 명의 신하들과함께 뒤뜰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마침 단왕이 찬 공이 빗나가 공교롭게도고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는 서슴지 않고 허리를 굽혀 두 무릎을 모으는원앙괴(鴛鴦拐)로 능숙하게 공을 차서단 왕
앞에 보냈다.그것을 보자 단왕은 크게 놀라 물었다.“너는 누구냐?”
고구는 공손히 무릎을 꿇고 아뢰었다.
“소인은 왕도위 대감의 분부로 전하께 종이와필기도구를 바치러 왔습니다.”
단 왕이 다시 말했다.“네 기술이 보통이 아니구나. 너도 들어와 공을 차거라.”
고구는 사양했으나 단 왕이 재차 재촉하자 마지못해 뜰로 내려와 공을 높게, 낮게, 멀리,
가까이 차는 자신의기술을 마음껏 발휘했다.
단 왕은 크게 감탄하여 그날부터 고구를 궁중에 머물러 있게 했다.
두 달이 지나 철종 황제가 돌아가고 태자가 없자,문무백관들은단 왕을 황제로 옹립하여
대통을 잇게 하니,그가 곧 휘종(徽宗) 황제다.휘종은 고구를 총애하여 추밀원(樞密院)에근무
시키고,이어 여러 차례 승진시켜 미처 반년이 못 되는사이에 전수부 태위(殿帥府太尉)에 오르는
고속 승진을 계속했던 것이다.막 나가던 건달이 공 하나 잘 찬 덕분에아무런 공도 없이
일약궁궐의 대신이 되는 참으로 사람 팔자는알 수 없는 일이었다.
고구가 태위가 되어 관가에 첫 출근한 날 관청의모든 관리들이 인사를 올리는데,자세히 보니
80만 군사를 지휘하는 장군 왕진(王進)이 빠져 있었다.태위는 크게 노하였다.
고구가 화가 난 이유는 그가 한창 개망나니로시장바닥을 휩쓸고 다니던시절에 약 파는
어떤 노인을 놀리다가 초주검이되도록 얻어맞은 적이 있었는데, 그 늙은이가 바로 나중에
교두가 된왕진의 아버지 왕승이었다.고구는 왕진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자기를업신여긴
처사라고 생각한데다 그의 아버지 왕승(王昇)에 대한 보복감정까지 끓어올랐던 것이다.
- 4회에 계속 -
★ 수호지(水湖志) - 4
제1장 백팔마왕
제2편 고구 2-2
“왕진이 보이지 않는데 웬일이냐?”그때 군 사무관이 대답했다.
“보름 전부터 몸이 아파 집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습니다.”그 말에 고 태위는 더욱 화가 났다.
“그놈이 꾀병을 앓는구나. 놈을 당장 잡아들여라.”왕진은 집에 누워 있다가 태위가 크게 화가
났다는 말을 듣고, 할 수 없이 관가에 나가 태위에게 네 번 절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고구가 물었다.“네 아비가 바로 교두 왕승(王昇) 아니냐?”“그렇습니다.”
그 말을 듣자 고구는 소리를 가다듬어 꾸짖는다.
“네 아비는 본래 거리에서 봉술이나 희롱하여 약을 팔던 놈인데, 네 놈이 무슨 무예를 알겠느냐?
전에 있던 태수가 사람을 볼 줄 몰라 너 같은 것을 교두로 삼았구나. 네 놈은 누굴 믿고
나를 업신여겨 인사도 안 나왔느냐?”고두는 곧 사령에게 왕진을 끌어내 매질을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관가의 아장들은 모두 왕진과 친해서 그 명령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곧 군 사무관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태위께서 처음 부임하신 경사로운 날에 죄를 다스리는 것은
옳지 않으니, 왕진의 죄를 한 번 용서해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태위는 마지못해 말했다.
“좋다. 너희들 체면을 봐서 오늘은 참지만 내일은 반드시 그 죄를 물어 곤장 형을 집행할 것이니
그리 알라.”왕진은 그때서야 머리를 들어 고구의 얼굴을 바라보고 관가에서 나오면서 한탄했다.
“고 태위라기에 누군가 했더니 바로 천하의 부랑자로 소문난 고이 놈이로구나.
놈이 봉술 좀 한다고 뽐낼 때 우리 선친께 한번 얻어맞고 서너 달 자리에서 못 일어난 앙심을 품고
있다가 이제야 내게 분풀이를 할 작정이구나.”왕진은 노모를 모시고 혼자 살고 있었는데,
노모는 아들에게 재난이 닥친 것을 알고 한동안을 서럽게 울다가 말했다.
“삼십육계 주위상계(三十六計 走爲上計)라는 말이 있지만 어디 갈 데는 있느냐?”
그 말에 왕진은 꿈에서 깨어난 듯 머리를 번쩍 들고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님, 이대로 앉아서 맞아 죽느니 한시 바삐 어디로든 몸을 피하는 것이 상책인 것 같습니다.”
왕진은 생각 끝에 어머니와 함께 연안부(延安府)로 달아날 마음을 먹었다.
연안부의 군관들은 전에 동경에 올라와서 왕진에게 봉술을 배운 자들이 많았다.
그들을 찾아가면 설마 괄시는 안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왕진은 곧 짐을 꾸려 말에 싣고, 어머니를 부축하여 동경성을 탈출했다.
저녁 때 왕진이 달아난 것을 안 고구는 크게 노하여 즉시 각지에 왕진을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왕진이 한 달 남짓 걸려 연안부에 도착했을 무렵의 어느 날 밤이었다.
그가 길은 잘못 들여 주막을 못 찾고 길을 헤매고 있을 때 뜻밖의 큰 집 한 채가 나타났다.
어마어마하게 큰 집의 규모로 보아 마을에서 가장 큰 부잣집이 분명했다.
왕진은 그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도록 허락을 받았으나 노모가 먼 길을 오느라 몸이 아파
주인에게 사정하여 좀 더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뒤뜰에서 한 젊은이가 웃통을 벗고 봉술을 익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이는 열여덟 아홉쯤, 눈같이 흰 몸에 청룡 문신을 새긴 젊은이였다.
왕진은 봉술 솜씨를 눈여겨보다가 말했다.“잘하긴 하는데 아직 못 미치는구나.”
그 말에 젊은이는 발끈했다.“나는 지금까지 고수들한테만 봉술을 배운 솜씨인데,
네가 누군데 그 따위 말을 하느냐? 한번 겨뤄 보겠느냐?”
바로 그때 집 주인인 태공이 나와서 말했다.“어디서 손님한테 버릇없이 구느냐?”
우선 그는 아들을 나무란 다음 왕진을 향해 물었다.
“손님께서는 봉술을 하십니까?”“능하지는 않지만 좀 쓸 줄은 압니다.”
“이 분이 태공의 아드님이십니까?”“제 미천한 자식 놈이오.”“그렇다면 제가 한 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그 말에 태공은 크게 기뻐하며 아들에게 그를 향해 스승의 예를 갖추어
받들라고 말했으나 젊은이의 노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아버님은 저 사람의 허튼 수작을 왜 곧이들으십니까? 한번 겨뤄 보면 단번에 아는 일입니다.
자아, 흰소리 그만하고 어서 나오너라. 내가 단단히 혼쭐을 내주겠다.”
그가 달려들자 왕진은 몽둥이를 하나 집어 들고 맞섰다.
물론 젊은이는 왕진의 적수가 아니었으니 왕진이 한번 몽둥이를 휘두르자 젊은이는 쉽게
나자빠지고 말았다.왕진이 황망히 그를 붙들어 일으키자 젊은이는 그때서야 공손히
허리를 굽혀 사죄를 했다.“제가 태산을 몰라 뵈었습니다. 앞으로 제 사부로 모시겠습니다.”
그 일로 왕진은 태공과 친교를 이루었다.욍진은 태공에게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말했다.
그 동네는 3,4백호의 집이 모두 사 씨(史氏)의 친척들만 사는 마을이었고, 태공은
그 중에서도 종갓집이었다.태공은 아들이 무예를 좋아하자, 고수들을 초빙해서
아들에게 창법과 봉술은 익히게 했다.젊은이의 몸에는 아홉 마리 청룡의 문신이 있어서
이곳 사람들은 그를 구문룡 사진(九紋龍 史進)이라고 불렀다.
왕진은 그때부터 그 집에 머물면서 십팔반무예(十八般武藝)를 처음부터 일일이
사진(史進)에게 전수해 주었다.사진은 반년 만에 무예를 통달하여 마침내 80만 군사를
거느리던 교두 왕진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게 되었다.
그러자 왕진은 사진과 헤어지기로 했다.사진은 십리 밖까지 따라 나와 눈물을 흘리며
스승을 배웅했다.
- 5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