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년 3번째로 클리퍼스에 뽑히며 역대 고졸 최고픽 경신. 뛰어난 사이즈에 엄청난 운동능력 그리고 비슷한 외모와 체형, 같은 등번호. 팬과 언론은 제 2의 가넷으로 조명. 마이클 조던도 가넷과 비교하며 1픽감이라고 언급 (다음 해에 콰미..)
주전으로 데뷔해 34분간 뛰고 루키 시즌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까지 기대감은 여전했다. 마일스 본인도 NBA가 기대만큼 빠르지 않다며 자신감을 내보임.
✓재능의 한계
2년간 제자리 걸음. 그가 가넷이 아님을 깨달은 클리퍼스는 팀의 가장 부족한 부분인 포인트가드를 채우기로 결정하고 어시스트 리더 클블의 안드레 밀러가 포함된 트레이드를 성사시킨다.
그리고 옮긴 클리블랜드, 21살의 나이에 팀 내 출장 시간 2위를 기록하는 등 기회를 받았지만 기대치는 점차 낮아짐. 가넷이 되기엔 사이즈가 작았고 (6-9), 슈팅은 없는 수준으로 제자리걸음 중이었다. 클블 팬들은 그저 르브론 드래프트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후 르브론이 픽된 뒤 마일스는 친구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고 결국 시즌 중 포틀랜드로 트레이드 된다.
✓전성기와 부상
04년 1월 포틀랜드로 이적하면서 나름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원래 재능과 관심이 있었던 수비에서 주목받았고 식스맨으로 출장하여 득점력 또한 상승했다. 그 결과 포틀랜드와 장기고액계약에 성공하며 다시금 기대받게됨.
그러나
05-06시즌 이후 부상으로 오른쪽 무릎을 수술해야했고(마이크로 프랙쳐) 이로 인해 사실상 커리어가 끝나게 된다. 고액계약으로 샐러리 캡이 부담된 포틀랜드는 마일스가 은퇴하길 원했고, 08년 3월 팀과 선수 측이 아닌 제 3의 의사에게 커리어 끝이라는 진단을 받은 뒤 4월 그를 방출했다. 결국 마일스는 25살에 얻은 부상으로 인해 27살에 은퇴하는 모양새를 띄게 되지만 그건 포틀이 원했던 것일 뿐 그는 복귀를 시도한다.
그러나 신체적인 문제로 웨이브 당한 해에 복귀해서 10경기를 소화하면 나머지 계약이 다시 샐러리 캡에 포함되기 때문에 포틀랜드는 타 구단들에게 경고의 이메일을 발송했고, 보스턴, 멤피스, 댈러스 등이 테스트만 할뿐 그를 쉽사리 로스터에 포함시키진 못했다.
그후 09년 1월에 멤피스로 복귀했지만 장점을 잃어버린 그는 평범 이하의 선수였고 로스터 마지막 쯤에 자리한 선수가 되었다. 이후에 트레이닝 캠프등을 통해 계속 NBA 복귀를 꿈꿨지만 모두 실패했다.
✓근황이라 적고 파산이라 읽기
예전에 은퇴 후 선수들의 파산에 관련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추가될 인물.
마일스는 대부분 실패한 고졸 선수가 그렇듯 멘탈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04-05 모리스 칙스 당시 감독을 라커룸에서 조롱하고 자극한 일은 대표적 사건이다.
*대충 이야기하자면 말싸움이 붙은 상태에서 마일스가 코치를 향해 “이리로 와서 얘기해봐 와봐” 뭐 이런 식으로 한 대 칠 듯이 얘기하자 감당안된 칙스가 자리를 떠났는데, 그 뒤를 향해 “아빠한테 이르러 가냐 가서 아빠한테 일러”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모욕한 사건. 나중에 사과했지만 당연히 팀내 징계를 받았다.
16년 6월 파산 신청할 때 자산이 $460,385 부채가 $1.57M였다. 한때 조던 브랜드의 한명이었고, 스칼렛 요한슨, 크리스 에반스와 함께 영화를 찍던(퍼펙트 스코어), 총 연봉이 거의 62M인 선수가 맞는지 의심스러운 수준.
(부채에는 양육비 $2.000와 국세청 빚 $282.041, 부동산 빚, 사업부채 등이 포함됐다)
17년 6월 파산절차로 그의 물품들이 경매에 나왔는데 그중엔 르브론, 버드 등의 선수 사인저지도 함께였다. TMZ 스포츠에 따르면 경매용품으로 $12.780을 벌었는데 몇 품목의 낙찰가를 소개하자면 이러하다.
가넷, 코비의 대성공은 고졸출신들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높여놨고 마일스는 그 후광의 선수였다. 사실 드래프트도 예상보다 위에 픽 된거였는데 최악의 드래프트 뎁스가 한 몫했다. 고교시절부터 항상 공격에 대한 단점을 달고 다녔는데 어리니까 늘겠지 했다.(포틀 때 조금 늘어보이긴 했다) 대학에서 재능과 기대를 보정 받았다면 자신의 역할을 알고 길게 커리어를 가져가지 않았을까? 슛 없는 티맥이 생각난다.
베이비 샤크 에디 커리Eddy Curry
✓기대감
고교 시절부터 엄청난 유망주. 고교 졸업 후 01년 4번째로 픽되면서 등번호 2번을 받았는데 불스는 챈들러에게 3번을 주면서 의도적으로 23번을 만들었다. 거의 골밑에서 득점했고 덩치에 비해 빠른 움직임으로 페이스업이 가능한 선수였다. 03년 3월 샤킬 오닐과의 맞대결에서 팀과 매치업 승리를 가져가며 오닐에게 칭찬을 받는다.
“리그엔 정통 센터가 3명 있다. 나, 야오, 에디.”
✓전성기와 부상
기대만큼 성장하진 못했지만 04-05시즌 에디 커리는 팀의 득점을 리드하며 공격에선 꾸준함을 보여줬다. 그러나 3월 불규칙한 심장박동이 발견됐고 남은 13경기와 플옵 모두에서 아웃된다. 이어진 재계약 타이밍, 에디 커리는 꾸준히 맥시멈을 요구했고, 불스는 에디의 어머니도 과거에 경미한 심장 질환이 있었고 에디도 1년전에 비슷한 증상을 호소했던 것을 우려해 먼저 DNA 검사를 받고 이상없다면 4년간 32M, 이상있다면 50년간 20M을 계약하자고 제안한다. 에디 커리는 사생활 침해라며 검사 자체를 거부했고 결국 닉스로 사인 앤 트레이드 된다.
다행히 심장 문제는 더 이상 그를 괴롭히지 않았고 06-07시즌엔 1경기만 결장한 채 팀의 득점리더로 활약하기도 한다.
✓내리막 고속도로
이 당시 닉스는 승리에 대한 열정이 안보이는 팀이었다. 아이재아 토마스가 아직도 닉스 팬들에게 악몽으로 불리는 이유가 있다. 06-07시즌엔 자말-매버리-프랜시스로 시즌을 이끌고 07-08시즌엔 에디커리-잭 랜돌프 라인업을 들고 나왔다. 커리는 이런 분위기 속에 멘탈이 망가져 갔고 몸 관리 또한 엉망으로 무릎 또한 맛이 가버린다. 08년에 사실상 커리어가 끝나게 되는데 그는 이후 5시즌 동안 총 26경기 출전에 그쳤고 10분 이상 출전한 게임은 5번에 불과했다. 이후 복귀를 계속 꿈꿨지만 프로로서 마지막 시즌은 중국에서 치러야만 했다.
✓사건 사고와 근황
09년 1월은 에디 커리에게 잊을 수 없는 한 달일 것이다. 12일 동성의 전직 운전사 David Kuchinsky가 성희롱 등의 문제로 고발한데에 이어서 25일 그의 전 여친과 10개월 딸이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
운전사는 에디 커리가 두 번이나 누드로 나타나 자신을 만져보라며 희롱했다고 진술했고 추가로 인종 차별적 언어와 임금체불 등도 주장했다. 커리 측은 부정했고 이 사건은 결국 중재로 갔다. 운전사도 전과자 출신이라 신뢰하지 못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전 여자친구 Nova Henry는 3살 아들 Noah Curry, 10개월 딸 Ava Curry를 키우고 있었는데 그녀의 이전 변호사이자 전 남자친구인 범인의 침입에 딸과 함께 살해당했다. 이들은 교제문제 뿐 아니라 돈 문제로 얽혀있었는데 07년 남자에게 접근금지명령이 있었을 정도로 심각한 관계였다.
16년 8월 기사에 따르면 커리는 대학에 가서 성장하고 성숙할 기회를 갖지 못한 걸 후회했다. 그는 그의 경험으로 느낀 바를 전하기 위해 고등학교 등에서 강연을 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유명한 유망주였지만 결국 기대만큼 못 컸는데 그만한 기회를 못 받은 것도 아니다. 항상 수비와 리바운드가 부족했고 사이즈를 이용할 생각 자체를 안했다. 챈들러랑 반반하면 딱 맞을 거 같지만 그둘은 시너지가 거의 없었고 따로 출전할 때 활약이 더 좋았다. 03년 한 기자가 불스 감독 스카일스에게 커리의 리바운드엔 뭐가 필요하냐고 물었는 때의 답변이 다 말해준다.
“JUMP"
제 2의 아이버슨 다후안 와그너Dajuan Wagner
✓기대감
캠던 고등학교 4학년 평균득점 42.5점, 그리고 한경기 100득점을 기록한 이 소년을 뉴저지에선 “The Messiah"로 불렀다. 01년 USA 투에이가 선정한 올해의 남자 고등학교 선수로 뽑혔고, 멤피스로 진학 평균 21점으로 NIT 우승을 이끈 뒤 NBA에 진출한다. 대학에 진학한 이유는 NBA 출신인 그의 아빠가 멤피스 대학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
✓부상
다리우스 마일스가 있던 그 클블에 6번픽으로 합류한다. 이미 르브론을 위한 탱킹이 가장 큰 목표였기에 와그너는 여유로운 출장시간에 자유로운 플레이를 보장받았으나 계속된 부상으로 성장하지 못했는데 특히 궤양성 대장염으로 입원, 05-06시즌을 쉬면서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게 된다. 약물 치료로 한계가 있어 수술로 대장 중 결장의 일부를 절제하기도 했다.(이때 체중이 72.5kg까지 떨어짐) 이후 복귀를 위해 골든 스테이트와 계약했으나 한 경기만에 방출 당했고 폴란드에 진출했지만 6경기만에 부상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근황
항상 NBA 복귀를 꿈꿨다. 폴란드 이후에도 계속 몸을 만들었고 14년 12월엔 필라델피아 스피릿이란 팀명으로 고향 팬들을 즐겁게 해주기도 했다. 36점을 기록한 그 경기장의 문엔 “Dajuan is Back”이란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15년 10월엔 AmeriLeague라는 곳과 계약했으나 설립자문제로 리그 자체가 취소됐다.
83년생인 와그너는 현재도 뉴저지의 스포츠 센터에서 운동을 하며 꿈을 완전 놓지는 않고 있다고 한다.
와그너는 공격형 단신 가드가 트위너로 불리던 시절의 선수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아이버슨과 비교됐다. 사실 그정도의 스피드와 순발력을 지닌 선수가 아니었고 래리 브라운도 그를 보고 아이버슨과는 전혀 다른 선수라고 평했다. 부상이 없었더래도 슈퍼스타의 모습은 아니었을 거라 예상되는데 자꾸 웨이터스가 생각난다.
유럽에서 온 가넷 다르코 밀리시치Darko Milicic
✓기대감
당시 키 크고 마르며 운동능력 있는 흑인은 제 2의 케빈 가넷 (콰미 브라운, 타이슨 챈들러), 유럽에서 온 장신은 제 2의 노비츠키 (파우 가솔, 츠키티쉬빌리)라며 기대했는데 다르코는 특이하게도 백인 가넷이라고 평가 받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고 닮고 싶은 스타일이기도 했고 또 그만큼 공격과 수비 모두에서 다재다능한 스타일로 주목받았기 때문이었다.
15살 때부터 NBA 스카우터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17살 땐 프로와 국제대회를 통해 검증을 받은, 르브론에 유일하게 근접한 잠재력 덩어리로 평가받았다. 그가 자국프로리그에서 성인들과 경쟁한 기록을 보면 그럴 만도 하다.
Year
Team
G
MPG
FG%
3P%
FT%
RPG
APG
SPG
BPG
TPG
PPG
2001-02
Hemofarm
YUG
18
18.8
.487
.200
.645
3.1
0.4
0.2
0.0
1.1
5.4
2002-03
Hemofarm
YUG
20
19.8
.487
.200
.676
4.6
0.8
0.4
1.6
0.0
9.5
다르코 본인도 03년 5월 인터뷰에서 “난 르브론이 내가 뛰었던 리그에서 뛰는걸 보고 싶다”며 고등 레벨에서 활약한 르브론과 성인을 상대한 자신을 비교하며 자신감을 내보이기도 했다.
✓영광 뒤에 불운
르브론의 1픽이 이미 확정된 상태에서 2픽 역시 밀리시치로 고정되었다. 멤피스의 픽을 가지고 있던 디트로이트의 래리 브라운이 의문을 표시했지만 룰 개정까지 이끌어낸 다르코에 대한 기대를 넘기엔 그 압박이 너무나 강했다. (특히 조 듀마스는 한참 전부터 푹 빠져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게 불운의 시작이었다.
래리 브라운은 루키에게 많은 기회를 주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당시 리그의 초강팀이었던 디트로이트 상황 역시 다르코에게 좋지않았다. 그렇게 2년동안 밀리시치는 가비지 멤버로 불만이 쌓여갔고 멘탈도 서서히 붕괴되어 밖으로 표출됐다. 미국에 혼자 살고 있었기에 그를 잡아줄 가족도 없었고 우승에 집중하고 있던 구단도 별 케어를 하지 못했다. 연습 전 술을 마시고 온다거나, 경기 할때도 집에 갈 생각만 하는 등 삐뚤어져만 갔다.
예전 노비츠키를 키운 돈 넬슨는 그의 형편없는 루키 시즌에도 계속된 기회를 줬다. 하지만 밀리시치에 의하면 래리 브라운은 출장도 안 시킬뿐더러 별다른 지시없이 항상 골밑 근처에 있으라고만 얘기했다고 한다. 올랜도에서도 마찬가지로 슛 좀 던지려고 하면 브라이언 힐이 하워드에게 공 투입하라고 소리쳤다고..
09년 12월 그는 NBA는 모두 거짓말쟁이라며 인터뷰한다.
✓NBA 역사상 최고의 버스트 2픽
하심 타빗, 제이 윌리암스, 데릭 윌리암스, 마이크 비즐리 등 실패한 2픽은 많지만 다르코만큼 기대받은 2픽은 없었고 그들은 03드래프트에 나오지 않았다.
멤피스와 미네소타에서 정상적인 시즌을 치루기도 했지만 그의 첫 기대감의 반도 안되는 모습이었으며 팬들은 그가 기회를 받았어도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고 여기게 된다.
결국 "세르비아의 자랑이 되자"이란 스티커를 그의 BMW에 붙이고 다녔던 청년은 30살이 되기도 전에 NBA를 스스로의 의지로 떠난다. (12년 11월 그의 요청으로 웨이브됨)
✓근황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4년 9월 농구로서 은퇴를 선언하고 12월 킥 복싱 선수로 데뷔하지만 2라운드 TKO로 패함.
15년 5월 클럽 구단주의 설득으로 세르비아 리그에 뛰기로 결정하지만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 결국 무산.
그리고 현재 2017년 그는 고향에서 농부로서 성공적으로 자리잡았다.
이탈리아에서 토양, 나무, 품종 등 과수원을 공부하여 고향에 $8 million를 들여 사과 농장을 지었고 125에이커에서 10.000파운드 이상의 사과를 생산해 두바이, 러시아, 아프리카 등에 수출하고 있다. 앞으로 체리의 전망이 좋아 체리로 사업을 확장할 계획
다르코는 포워드가 되고 싶었지만 커리어 내내 센터였다. 비록 그가 기대만큼 클 재목은 아니었더라도 확실히 불운이 있었던 선수. 국대에서도 사고치고 그래서 국대도 안뽑힌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래도 어릴 때 멘탈 정리가 안된게 선수생활이 짧았던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현재 자신이 말하길 이젠 화와 비난을 남에게 돌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좀 늦은게 아쉽다.
제 2의 페니 하더웨이 션 리빙스턴Shaun Livingston
✓기대감
더 예전에 매직이 있었다면 00년대의 장신 포인트가드 유망주는 모두 제 2의 페니로 통했다. 6-7의 키에 6-11의 윙스팬을 가진 고교 가드는 ABCD 캠프와 맥도날드 올아메리칸 게임에서 주가를 끌어올렸고, 당시 고교 랭킹에서 하워드에 이어 2위로 주목받았다. 듀크와 NBA를 저울질하던 그는 결국 NBA를 택했고 페니보다 운동능력을 떨어지지만 퓨어포가로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으며 4픽으로 클리퍼스에 픽됐다.
✓부상
루키 시즌부터 부상에 자유롭지 못한 선수였는데 07년 2월 밥캣츠 전에서 충격적인 무릎부상을 당했다. ESPN 뉴스에서 방송할 때 사전 경고할 정도로 큰 사고였는데 커리어 은퇴는 물론 일상생활까지 걱정될 정도였다. 당시 리빙스턴은 무릎에 칼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고 했는데 커리어도 비슷한 길을 걷게 된다.
`복귀가 힘들 것, NBA 레벨이 아닐 것, 포인트가드로 활약이 불가능할 것‘
실제로 NBA에 복귀하는 꿈도 꾸며 16개월만에 농구 활동을 시작했지만 캠프와 방출, D리그, 트레이드의 연속이었다. 한땐 해외리그도 고려하기도 했다.
✓재기
리빙스턴은 항상 자기 자신이 농구보다 더 큰 목적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컴백이 누군가에게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며 노력해왔다. 그 결과 10-11시즌 샬럿에서 73경기를 소화하며 복귀에 성공했고 13-14시즌 브룩클린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게 된다.
골스는 넷츠에서 그의 멀티플 플레이와 BQ 그리고 백업가드로의 역할에 매력을 느꼈고 그 결과 리빙스턴에게 클리퍼스 이후 첫 다년 계약을 안겨주며 영입한다.
제 2의 노비츠키 안드레아 바르냐니Andrea Bargnani
✓기대감
"Il Mago" (마술사)로 불리는 이탈리아 농구 신동.
당시 소속팀 베네통의 감독 데이비드 블렛은 바르냐니가 20살의 나이지만 팀의 주요 선수며 진짜 플레이어라고 말함.
다양한 방법으로 득점이 가능했고 신장 대비 좋은 드리블과 퀵니스를 지니고 있어 제 2의 노비츠키란 이야기가 항상 따라다님.
소속팀 선배 중 02년 5번째로 픽된 츠키티쉬빌리와도 비교됐는데 바르냐니는 그는 팀에서 평균 6분을 뛰는 선수였다며 그와는 다름을 주장함. (츠키티쉬빌리는 워크아웃 드릴 등에서 뛰어나 대박남. 유럽 활약은 없는 수준인데 가능성만 보고 뽑은 선수)
06년 1픽. 미 고등-대학교를 거치지 않은 두 번째 선수(야오밍), 첫 유럽선수, 6번째 비 미국인 선수
✓반쪽 선수
7피트의 키지만 6개이상의 리바운드를 잡은 시즌은 한번뿐이다. 수비도 엉망이었는데 드래프트 전에도 수비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공격에 재능이 있긴 했지만 반쪽 구멍을 메울 만큼 특별하지 못해 결국 16년 2월 브룩클린에서 방출되며 NBA 여정을 마침.
✓근황
16년 7월 스페인 팀과 계약해 제 2의 유럽 생활을 시작했다.
League(s)
G
MP
FG%
3P%
FT%
ORB
DRB
TRB
AST
STL
BLK
TOV
PF
PTS
129
17.0
.487
.400
.728
1.0
2.3
3.3
0.4
0.8
0.7
1.2
2.4
8.6
03-04
Lega Basket
Euroleague
16
8.4
.588
.417
.563
0.5
1.0
1.5
0.2
0.3
0.2
0.6
1.3
3.4
04-05
Lega Basket
Euroleague
32
11.6
.475
.390
.596
0.8
1.7
2.5
0.4
0.7
0.4
0.8
1.7
5.0
05-06
Lega Basket
Euroleague
52
22.1
.498
.398
.750
1.6
3.4
5.0
0.4
1.4
1.2
1.7
3.1
11.6
16-17
Liga ACB
Euroleague
29
18.4
.458
.410
.820
0.4
1.8
2.1
0.6
0.2
0.5
1.3
2.5
10.1
알론조 모닝에서 빌 러셀까지 그렉 오든Greg Oden
✓기대감
타고난 신체에 운동능력, 좋은 태도와 검증받은 수비까지. 오랜만에 클래식한 빅맨이 나왔다며 모두가 흥분했다. 부상당한 오른손 대신 왼손을 주로 사용하며 토너먼트를 치러냈고 결승에서 호포드-노아의 NCAA 역대급 빅맨진을 압도하는 모습은 1픽을 더욱더 확정짓게 했다. 그에게 기대되는 건 올스타 슈퍼스타 수준을 넘어 걍 레전드였다.
✓부상
드래프트 전 양쪽 무릎 MRI에 문제가 없었고 그때까지 무릎으로 인한 어떠한 수술 경력이 없었음에도 시즌아웃. 07년 9월 오른쪽 무릎수술을 하게 된다. 오든은 포틀랜드 GM 케빈 프리처드에게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는데 문제는 이때가 끝이 아니었단 거다. 한 시즌을 치러내는 듯 했지만 09년 12월 이번엔 왼쪽 무릎 수술을 받아야했고 캐년 마틴 이후 최초로 양쪽 무릎에 마이크로프렉쳐 수술을 받은 선수가 됐다. 그리고 12년 02월 휴스턴의 애런브룩스와의 충돌로 오든은 쓰러졌고 브랜든 로이는 고개를 돌리며 오마이 갓을 외쳤다. 이렇게 왼쪽 무릎을 한번 더 수술하면서 NBA 선수로서 최초로 3번의 마이크로프랙쳐 수술을 받게 됐고, 이미 무릎은 정상을 꿈꾸기 어려운 상태가 되어 사실상 선수 생명이 끝나게 된다. 고등학교 때 오든의 양쪽 다리길이가 다르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직접적 이유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Biggest Bust In NBA History"
스스로가 자신을 표현하는 말.
오든이 코트에 나설 땐 항상 파울관리엔 문제가 있었지만, 리바운드와 수비에 존재감은 확실했고 그래서 사람들이 기대감을 쉽게 거두질 못했다. 반면 공격에선 투박한 편이었다. 원래 자유투는 괜찮은 편이었지만 커리어 내내 14피트 밖에서 던진 슛이 4개일 만큼 재능이 없는 편이었고 포스트업도 제자리 걸음 수준이었다.
어쨌든 몇 번의 부상 이후 모든 게 무너져버렸고 진통제와 알콜, 수면제에 의존에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계속 선수로의 복귀를 염원했고 13년 8월 히트에 합류 NBA 여정을 마무리할 기회를 갖는다. 이후에도 여러 팀과 워크아웃했지만 실패했고 15-16엔 중국에서 뛰기도 했다.
✓근황
16년 오하이오 스테이트로 돌아가 학위를 따기 위해 노력 중이고 동시에 코트로 돌아오기 위해 해외도 꾸준히 알아보고있다. 88년생이고 원래 멘탈이 좋은 편이라 도전하는 것 같은데 더 이상 그의 무릎에 기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
밀리시치는 디트에 간게 불운이였던것 같아요. (간지남앤써니가 디트에 갔어야 했는데.. 언젠가 뉴욕 간다고 그랬겠지만) 한참동안 잊고 지내다가 언제 시즌인지는 모르겠지만 러브 리바운드 머신 시절 미네소타에서 잠시 투쟁심 있어 보였습니다. 디트에서의 그 애송이가 독기와 투지가 많이 올랐구나 싶었거든요. 근데 또 언제부터 안보이더니 농부가 되었군요. 아쉬운 친구에요.
아 그리고 저중에그래도부상만 없었다면 그렉 오든은 정말 슈퍼스타 레벨 까진 갈꺼같았는데ㅠ 다리우스마일스 개인적으로 참 아쉬웠습니다....당시 성적은 별로였지만 라마오덤/키언둘링/퀀튼리차드슨 같은 젊고 나름 유망주들이 득실해서 눈요기 쇼타임 거리는 만았는데 말이죠...특히 라마오덤이 거의 토스 수준으로 올린앨리웁을 마일스가 덩크로마무리짓는 장면은 그해 명장면으로도꼽혔었는데 말이죠
에디 커리 50년간 20밀이면 ㅋㅋㅋㅋㅋㅋㅋ
HSteal님은 고퀄쟁이
정말 잘 읽었습니다. 예전 라이브게임 할때 생각 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추천!!!
좋은글 감사합니다. 오든 KBL오면 통할까요?
한두경기 뛰어도 금방 퍼질걸요
재밌네요
다르코 밀로시치는 분명 재능있는 선수였는데..신인픽을 디트로이트로 간게 좀 아쉽네요 출장시간도 래리브라운 휘하에서 별로 받지도 못하고 좀더 자유롭게 할수 있는 팀이었으면 어땠을까
너무재밌게잘봤습니다
오든은 진짜 레전드가 될 줄 알았죠....
저는 처음부터 불안했습니다 부상땜에... 포틀이 듀란을 뽑았다면...
추억이 돋는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재밌게 잘 봤습니다ㅎㅎ
농알못이지만 넥스트 원, 오지마요도 있지 않나요?
맞아요 고교시절 넥스트 르브론이랬나 팀메이트 빌워커는 넥스트 빈스카터ㅎㅎ
진짜 엄청난 글이네요 ㅎㅎㅎ 감사히 읽었습니다
조나단 벤더, 제이 윌리엄스도 기억나네요~
오든, 한국에 와서 2쿼터 정도만 뛰어도.....1쿼터 반이라도..
완전 정독했습니다. 어지러운 카페 분위기속 빛같은 코퀄글이네요.
잘봤습니다 ㅎㅎ
완전 잘 봤습니다.ㅎㅎㅎ
엊그제같은데 벌써 저들도 옛선수..
고퀄리티의 기사를 보는 기분이네요. 추억과 애증의 선수들.. 오든은 내구성이 너무 아쉽습니다.
역시 HSteal님이십니다. 정말 잘 봤습니다^^
아...최고...잘 봤어요
10년 후 쯤 10년대 선수들 글 꼭 보고 싶네요^^ 재밌게 잘봤습니다.ㅋ
드랩 때 누구를 뽑았다고 좋아하는 설레발은 금물임을 새삼 느끼네요
드랩 전 선수평은 하나의 희망사항이지 시즌 시작하면 어찌될지 모른다는 사실을 기억할랍니다
잘봤습니당ㅎㅎ 감사합니당
정말 잘 읽었습니다.재능도 중요하지만 멘탈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수있네요
와 재밌게 잘봤습니다!!
좋은글입니다!추억도 생각나고 좋네요
꿀잼글 잘봤습니다. 에디커리에서 다시한번 빡돌고 갑니다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뭔가 더 있기를 기대해본글은 처음인듯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밀리시치는 디트에 간게 불운이였던것 같아요. (간지남앤써니가 디트에 갔어야 했는데.. 언젠가 뉴욕 간다고 그랬겠지만) 한참동안 잊고 지내다가 언제 시즌인지는 모르겠지만 러브 리바운드 머신 시절 미네소타에서 잠시 투쟁심 있어 보였습니다. 디트에서의 그 애송이가 독기와 투지가 많이 올랐구나 싶었거든요. 근데 또 언제부터 안보이더니 농부가 되었군요. 아쉬운 친구에요.
오든은 꽤 착한 친구였네요. ㅠ
와 시간가는줄 모르고 다봤어요 ㅎㅎ
옛 기억들이 새록새록 돋는 아주 잼있고 유익한 글이였습니다 망한 아이들 최근 소식도 잼있었구요ㅠㅠ 시카고가 고졸 트윈타워 에디 커리 타이슨 챈들러 구축할때만 해도 이제 왕조 리빌딩도시간 문제일꺼야 생각했던 저의 짧은 안목도다시돌아보게됬네요ㅋㅋ
아 그리고 저중에그래도부상만 없었다면 그렉 오든은 정말 슈퍼스타 레벨 까진 갈꺼같았는데ㅠ 다리우스마일스 개인적으로 참 아쉬웠습니다....당시 성적은 별로였지만 라마오덤/키언둘링/퀀튼리차드슨 같은 젊고 나름 유망주들이 득실해서 눈요기 쇼타임 거리는 만았는데 말이죠...특히 라마오덤이 거의 토스 수준으로 올린앨리웁을 마일스가 덩크로마무리짓는 장면은 그해 명장면으로도꼽혔었는데 말이죠
공중에서 돌려서 올려주는.. 얼마전 디그린 커리 듀란트 앨리웁 봣을때도 생각나더라고요ㅎ
마일즈가 듀크 대학을 졸업했다면 ... ㅠㅠ
정독하며 잘 읽었습니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되서 흥미로웠던 글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