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을 쌓은 상해 임시정부는 해방이 될 때까지 26년 5개월 간 상해와 항주, 남경, 중경으로 이동하며 일제를 상대로 광복군 조직 등을 통한 국내외 항일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해왔다.
특히 1920년~30년대 초반까지 임시정부는 공채 발행(아일랜드만이 500만달러 매입)과 미주교포들의 지원금으로 충당했던 운영자금이 여의치 않으면서 매우 열악한 재정 압박에 시달렸다. 그런데 이 시기 임시정부의 적극적인 항일투쟁이 가능하도록 인적·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단체가 바로 민족 종교인 보천교(普天敎)다.
보천교(1911년~1936년 간 존속)는 1925년 조선주재 미국 총영사 밀러의 「조선보고서」와 1926년 조선총독부 「보천교 일반」 자료에 따르면, 보천교 신도 수가 약 600만 명이다.
당시 조선 인구 1천902만 명임을 감안하면 30%가 넘은 거대한 조직이었다.
막대한 자금력을 확보하고 있던 보천교는 민족자존을 지키고 항일투쟁을 위해 상해임시정부 설립 자금 5만원(20억원) 지원을 시작으로
1921년 김규식의 모스크바 약소민족회의 참석 비용 1만원(2억원) 지원, 보천교 재정 담당자인 김홍규의 상해임정에 대한 군자금 11만원(42억원) 지원 발각사건, 보천교 간부 임규의 상해임정 간부 라용균에 5만원 전달, 보천교 간부였던 신채호선생 부인 박자혜 여사의 만주 정의부에 군자금 지원 가교역할과
1923년 임시정부의 국민대표회의에 보천교 간부 강홍렬과 배홍길 파견 및 의열단에 가입, 북로군정서 김좌진 장군에게 5만원 지원, 물산장려운동 등 사회운동 주도와 독립운동의 군자금 산실 역할을 묵묵히 해냈다.
한편, 비밀리에 전달되어야 하는 독립자금의 특성상 보천교의 정확한 재정 지원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보천교의 독립자금(현 가치 1,000억원 추정) 지원에 대한 정황과 언급은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만주 관동청 경무국, 일본 검경문서나 재판기록에 나온다.
특히,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데이터베이스에는 1923년 충청도의 보천교 신자 박운업이 "보천교는 상해임정에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하고 있다"라고 말한 내용이 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1945년 11월 23일 귀국할 때 환영 나온 국민들에게 "우리는 정읍 보천교에 많은 빚을 졌다."는 말을 했다. 김구 주석의 비서실장 조경한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김구 선생은 그 이후에도 측근들에게 평소 이 말을 자주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보천교의 활발한 항일독립운동에 대해 오늘날 우리는 전혀 알지못하고 있다. 그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친일 언론을 앞세운 일제의 교묘한 분열책동과 잔혹한 탄압정책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15년 부령 제83호 ‘포교규칙’을 공포하여 일본의 민족종교 신도와 불교, 그리고 기독교만을 종교로 규정하고 보천교, 천도교, 대종교 등의 민족종교를 ’유사 사이비종교‘로 규정하여 경무국에서 감독하게 한다.
일제의 교활한 이간책동은 친일 언론을 통해 결국 1925년 보천교를 친일단체로 매도케 함은 물론, 1936년 ’유사종교 해산령‘을 발동하여 해체시키기에 이른다. 이때 총독부는 보천교 본소 십일전 건물과 보화문을 불교단체에 헐값으로 매각하여 현재 불교 조계종 본사인 조계사 대웅전과 내장사 대웅전의 건축 목재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보천교 본소 청기와는 청와대 구 본관 건물 기와로 사용되어 청와대라는 명칭의 유래가 되었다.
둘째, 친일언론 및 종교인등 식민잔존 세력 간의 상호 카르텔이다. 이들은 일제가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우리 민족종교를 유사 사이비종교로 낙인을 찍어 왜곡 은폐시켰던 총독부의 행태를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이는 보천교를 대한독립운동사 전체 맥락에서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 많은 장애가 되고 있다.
일제 식민권력이 만들어낸 자료들 『보천교일반』과 『양촌 및 외인사정 일람』 및 각종 공문서들을 살펴보면 보천교의 월곡 차경석은 1910년대에 이미 ‘국권회복 표방’ 혐의로 1917년 4월 24일 ‘갑종(甲種) 요시찰인要視察人(블랙리스트)’으로 요시찰 대상 중에서도 ‘갑(甲)’이었다.
갑종(甲種) 요시찰 대상자의 경우 매월 3회 정도 시찰 받았다. 을(乙)과 병(丙)가 2회, 정(丁)가 1회 정도였다. 요시찰 대상자의 교제인물, 출입자, 여행지와 목적, 통신의 유무 등 제반 상황을 면밀히 감시·조사했다.
당시의 『조선사상통신』에도 요시찰 제도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경무국(警務局)의 눈으로 보면 사상불온(思想不穩)하던가 또는 총독정치(總督政治)에 불만을 갖고 찬성하지 않거나 또는 불만행동을 취하는 인물들이 요시찰인이라 불리웠다. 그들은 심각성에 따라 갑·을·병·정호로 구분하여 취급되었다. 그러나 1925년, 조선총독부가 당시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의 행적 등을 조사·작성한 기밀서류를 보면 갑·을 두 경우로 온건・과격의 정도에 따라 세분화 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언론인이자 사학자였던 문일평(文一平 1888-1936)도 1917년 1월부터 갑종 요시찰 인물로 편입되어 감시를 받았다.
또 조선어학회 중진으로 항일투사이자 평북 영변의 3·1운동을 주도하고 목숨 걸고 민족 얼을 사수한 이윤재(李允宰 1888-1943)도 1925년 독립운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경찰은 ‘갑종 요시찰인’으로 분류하고 감시하였다.
그리고 근현대사 및 한국기독교사에서 자주 거론되는 최흥종(崔興琮 1880~1966) 목사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1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에 식민권력으로부터 ‘갑종 요시찰인’으로 편입되었다.
월곡 차경석이 받았던 갑종 요시찰인은 시찰의 정도가 강한 측면에 속한다. 식민지배와 관련해 그 위험도나 비중 면에서 위법행위를 했거나 할 가능성이 농후한 사람들이다.
일제는 한국을 강점한 후 한국인들의 민족의식을 약화시키고 일본민족에 동화시키려는 노력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특히 역사교육과 종교였다. 일제는 강점 내내 이러한 노력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일본 제국주의의 천황을 인간으로 나타난 신神으로 숭배하라는 강요는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던 보천교는 초기에 박멸하거나 어용화 시켜야 할 대상이었다. 외형적으로는 유화정책을 펴면서 분열과 조직의 와해를 꾀했다. 그리고 종교단체는 학무국 종교과에서 담당했지만 유사종교로 분류된 보천교는 총독부 경무국에서 감독토록 하여 강력한 폭력성과 억압성을 띤 통제를 가하였다.
이런 점에서 보천교는 식민지 종교 통제정책의 ‘하나의 본보기’였다. 그 규모가 소규모였다면, 일제에 위협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동안 식민사관의 프레임에 의해 보천교는 오랫동안 왜곡 날조된 상태로 독립운동사의 미아로 남아있었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말처럼, 이젠 보천교를 항일독립운사의 큰 맥락에서 그 발자취를 사실 그대로 재평가하고 올바르게 복원하여 우리 한민족 역사주권의 진정한 회복의 첫 출발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