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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5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어린이는 만족하고 순수하고 겸손하다>
어렸을 때 천막을 쳐 놓고 방금 동남아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왔다고 하면서 기이한 쇼를 벌이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짱돌을 맨손으로 격파할 때는 저와 많은 분들이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막상 약을 팔 때에는 아이들은 다 밖으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돈이 없으니 그러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웬지 장사에 방해가 될까봐 그랬던 것도 같습니다.
며칠 뒤 동네 친구 집에 놀러갔더니 한창 부부싸움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 집 아저씨가 그들이 팔던 약을 비싼 돈을 주고 참 많이도 사 온 것입니다.
당시 제가 들은 액수로도 상당했는데, 시골에서 그런 돈을 주며 그런 약을 샀다는 것이 저도 희한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짐을 싸서 다 떠나버렸는데, 알고 보니 그 약이란 것이 그저 복분자 주스 정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마셔봤는데 그저 달짝지근한 딸기주스 정도였습니다.
아마도 그 아저씨는 큰돈을 주고라도 맨손으로 돌을 깰 수 있는 힘을 갖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약을 아무리 드셔도 그렇게 튼튼해지는 모습은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른들은 왜 저런 것에 저렇게 쉽게 넘어갈까?’ 궁금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어렸지만 그런 속임수를 써서 약을 파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약 저의 부모님이 사려고 했다면 말리려 했을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아이들을 밖으로 나가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 저도 얼마 전에 소공동체 봉사자들과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그 곳에서 상황버섯으로 만든 건강식품을 몇 통 사왔습니다.
그것이 진품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제주도 식품 인준 마크가 있으니 진짜겠지요.
그러나 저는 한 통도 제대로 못 먹고 먹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이렇게 욕심을 내서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은 양을 샀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옛날의 그 아저씨 생각이 났습니다.
그 아저씨가 자신의 정력을 키우기 위해 그 약을 샀던 것처럼, 저도 제주도 가기 며칠 전 감기를 앓았기에 면역력을 증가시킨다는 말에 뿅 갔던 것 같습니다.
어른들은 이 세상에서 바라는 것이 많고 그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희생시키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남자에게는 정력에 좋다고 하고, 여자에게는 피부에 좋다고 하면 남아나는 것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어린이들은 자신들이 지닌 것으로 만족합니다.
물론 다른 무엇을 살 수 있는 여력도 없습니다. 그저 부모님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또한 정력을 위해서나 면역력을 증가시킬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것들을 바라는 마음이 크지 않기 때문에 어린이들을 속이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어린이들은 그저 지금 이 순간 웃고 떠들며 행복하면 그만이고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은
부모님이 알아서 다 해 준다고 생각하니 필요한 것도 없고 그래서 사기당할 일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들처럼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여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다.
어린이들에겐 거짓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믿지 못하게 되는 때는 우리가 남을 속일 수 있는 사람이 되면서부터입니다.
내가 남을 속일 수 없는데 남이 어떻게 나를 속인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이 깨끗함 때문에 하느님과 이웃을 쉽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동기 신부가 첫영성체 준비하는 아이들에게 가정에서 부모님과 함께 기도를 하는 어린이 손들어보라고 하였더니 단 한명이 들었다고 합니다.
충격을 받은 나머지 첫영성체 어린이 부모 교육 때 부모들에게 가정에서 아이들과 함께 기도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공부 핑계를 막기 위해서 기도만큼 아이들에게 집중력을 키워주는 좋은 교육은 없다고 강조하였습니다.
함께 묵주기도를 하면 처음엔 몸을 이리 꼬고 저리 꼬고 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랫동안 앉아 집중하며 공부하는 능력을 키워줄 것이라고 설득하였습니다.
그날 나왔던 부모님들은 모두 신부님 말이 옳다고 한 마디씩 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3주가 지나서 큰 기대를 하고 아이들에게 부모님과 함께 기도하는 친구들 있으면 손 들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반대로 전에 들었던 한 명마저도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엔 아이들에게 부모들에게 한 것과 똑 같은 설명을 하며 가정기도를 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리고 3주 후에 손을 들어보라고 하였는데 이번엔 반 정도가 손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부모님을 설득하여 함께 묵주기도를 하였던 것이고, 정말로 그 중에 90%이상이 성적이 올랐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은 이렇게 쉽게 믿기 때문에 쉽게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또한 속지 않을 기재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어린이들의 겸손함입니다.
어린이들은 모든 것을 부모에게 물어보고 결정합니다.
우리는 교만해져서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그 교만이란 것 때문에
얼마나 잘못된 선택을 하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까?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라면 항상 하느님께 여쭈어보고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쉽게 믿기는 하지만 이런 겸손함 때문에 사기당하는 일이 드문 것입니다.
따라서 아이들은 잘 믿으면서도 동시에 속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오히려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기에 잘 속고 정작 믿어야 할 것은 믿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린이처럼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아무 것도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어서 부모님께 의존해야 하는 겸손함, 또 거짓말을 하지 않아 쉽게 믿을 수 있는 깨끗함, 이 세상 것에 물들지 않고 그저 받는 것에 만족하기 때문에 하느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우리가 잃어가는 것들 항상 어린이들을 보며 배워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 25일 [연중 제7주간 토요일]
마르코 10,13-16
<기쁨에 찬 신앙생활>
‘지금 내가 추구하고 있는 영성생활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내 신심생활이 주님 마음에 드는 것인가?
내 신앙생활이 주님의 제자로서 바람직한 것인가?’
많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을 식별할 수 있는 좋은 도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쁨’이라는 단어입니다.
지금 심연의 고통 속에서도 기쁨에 찬 기도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영성생활 잘 하고 계십니다.
갖은 시련 속에서도 기뻐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신심생활 잘 하고 계십니다.
끝도없는 역경 속에서도 기쁨으로 충만한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신앙생활 잘 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신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돈보스코와 더불어 ‘기쁨’을 삶의 모토로 삼은 성인이 한분 계시는 데, 바로 성(聖) 필립보 네리 사제(1515~1595)입니다.
돈보스코(1815~1888)보다 꼭 300년 앞서 태어나셨고 사셨지만, 모토, 영성, 생애의 싱크로율이 거의 99.9 퍼센트입니다.
두분 다 평생토록 염두에 두셨던 모토는 “기쁨 속에 주님을 섬기십시오!”였습니다.
두분 다 선택하신 성경 구절은 이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필립비 4장 4절)
두분 다 그렇게 아이들을 좋아하셨고, 아이들을 위해 생애 전체를 바치셨습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은 36세 되던 해에 사제로 서품되셨는데, 당시로서는 꽤나 늦은 나이였습니다.
그런데 사목자로서의 탁월한 그의 덕행은 사제가 되기 위한 꿈을 꾸기 훨씬 전부터 잘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따뜻하고 너그러운 성품, 호탕하고 쾌활한 성격, 탁월한 매력과 호감의 소유자였던 젊은 시절 필립보 네리는 발길 닿는 곳마다 폭풍 인기를 누렸습니다.
틈만 나면 아이들은 그를 뺑 둘러쌌습니다.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그와 함께 있기를 즐겼습니다.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그의 이야기에 쫑긋 귀를 기울였습니다.
깊이 있는 그의 영적 말씀에 큰 감동을 받고 주님께로 돌아섰습니다.
1551년 사제가 된 이후에도 필립보 네리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웃들을 향한 강렬한 사랑, 한결같은 겸손, 탁월한 유머감각, 검소한 생활이 똑같았습니다.
사제가 된 그에게 착한 목자로서의 여러가지 덕행들이 추가되니,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떴다 하면 즉시 수많은 사람들로 삥 둘러쌓였으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환영과 존경을 받았으며, 잠깐이라도 더 함께 있기를 원했던 필립보 네리 신부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오늘 우리들의 발밑을 내려다봅니다.
사목자로서 대상자들로부터 진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딘가 나타나면 양떼들의 얼굴이 환해지고, 기뻐합니까?
양떼들은 우리가 너무 좋아 조금이라도 더 우리와 함께 있고 싶어하고 있습니까?
유머감각은 덕중에서 아주 큰 덕입니다.
기쁨 역시 성덕의 여정에 아주 중요한 덕입니다.
기쁨은 여러 그리스도교 덕행 가운데 아주 향기로운 덕행입니다.
기쁨은 가장 두드러진 성성(聖性)의 한 표현입니다.
울적한 성인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충실한 영성생활의 결과는 기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상의 기쁨을 주님 안에서의 기쁨, 영적인 기쁨으로 승화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우울한 얼굴로, 심각하게 고민하며 지내기엔 우리 인생이 너무나 짧습니다.
걱정하고 근심하며 지내기엔 우리의 나날이 너무나 아깝습니다.
하느님은 좋으신 분, 자비하신 분, 기쁨으로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기쁘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편안하게 지내기를 원하십니다.”
(성 필립보 리날디 사제)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7주간 토요일 강론>
(2024. 5. 25. 토)(마르 10,13-16)
<‘어린 아이들’이 아니라 ‘힘없는 이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3-16).”
1)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라는 말은 ‘안수’를 해 달라고 청했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어린이들을 꾸짖은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을 꾸짖었는데,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아마도 예수님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그랬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중이었다면 가르침을 방해하지 말라고 그랬을 것이고, 쉬시는 중이었다면 예수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고 그랬을 것입니다.>
‘언짢아하시며’는 뜻으로는 ‘화를 내시며’입니다.
제자들이 한 일은 크게 잘못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되어 있는
‘사회적 약자들’을 상징하는데, 교회 공동체에서 발언권이 약하거나 없는 ‘종교적 약자들’도 포함됩니다.
<어린이라는 말의 그리스어 원문 단어의 뜻은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원문 단어를 몰라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가 중요할 뿐입니다.>
2)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시는 분이고,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오는 것을 바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에는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이 들어 있습니다.
표현만 보면, “그냥 내버려두어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 말씀의 뜻은 ‘모든 사람’이 당신을 만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는(신앙인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특히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그렇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냥 놓아두어라.”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할 때, 그 만남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것은 큰 죄인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결코 작은 죄가 아닙니다.
소외당하거나 차별당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생기지 않도록 세심하게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만일에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만나는 일’에서
소외당하고 차별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 공동체는 예수님의 교회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3)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가령 여러분의 모임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누추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 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 한다면, 여러분은 서로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악한 생각을 가진 심판자가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참으로 성경에 따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지고한 법을 이행하면, 그것은 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짓는 것으로, 여러분은 율법에 따라 범법자로 선고를 받습니다(야고 2,1-4.8-9).”
코린토 1서에 바오로 사도가 부자들을 꾸짖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내가 지시하려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모임이 이익이 아니라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그것을 먹을 때, 저마다 먼저 자기 것으로 저녁
식사를 하기 때문에 어떤 이는 배가 고프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은 먹고 마실 집이 없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1코린 11,17.20-22).”
<당시 코린토 교회의 부자들이 ‘아가페 만찬’을 거행한다는 명목으로 자기들끼리만 어울려서 먹고 마셨고,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소외당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상황을 전해 듣고 대단히 노해서
그 부자들을 매우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4)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는,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의 나라다.” 라는 뜻입니다.
그 나라는 차별도 역차별도 없는 나라입니다.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고, 강자도 없고 약자도 없고, 유식한 사람도 없고 무식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없으니, 소외당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곳,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그런 나라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지금 자기가 유식하다고 해서, 지금 고위직에 있다고 해서, 지금 상류층에 있다고 해서, 지상에서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서도 특별대우를 받기를 바란다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